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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22호 퍼블릭액세스]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여덟가지 질문 -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서서, 디지틀 시대의 미디어 운동을 위한 숨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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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여덟가지 질문

-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서서, 디지틀 시대의 미디어 운동을 위한 숨고르기

 
김 명 준 ( 미디액트 소장 )
(아직도 적절한 한국말이 떠오르지 않고 있는) ‘퍼블릭 액세스’를 강화하기 위한 미디어 운동은 이제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첫번째가 90년대 중반부터 99년까지의 입법화 투쟁단계였고, 두 번째가 99년 통합방송법을 통한 시청자 제작 참여 프로그램의 합법화이후 작년에 이르기까지 초보적인 제도화와 실천이 진행된 초기 실험단계였다면, 이제 각종 법규 및 제도를 구체적으로 정비하며 본격적인 모델링이 시작되는 초기 정착 단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쟁점은 너무도 많고 현실은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독립적인 영상운동에 있어서는 결코 후발주자가 아니지만 퍼블릭 액세스 구조의 제도화에 있어서만큼은 후발주자인 한국의 퍼블릭 액세스는 지난 6년간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다. 그것은 대부분의 방송 매체에 걸쳐 법적 근거를 갖추고 지니고 있으며, 공적 지원의 확대에 힘입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이미 대안적 소통에 대해 익숙할 뿐만 아니라 디지틀 비디오라는 기술적 수단을 확보한 민중에 의해 서서히 독자적 운동으로 형성되고 있다. 비록 아직까지 퍼블릭 액세스는 그 개념에 걸맞게 모든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합법화를 꿈꾸던 10년전과 생존을 걱정하던 5년전을 생각해본다면 변화의 속도는 결코 느린 것이 아니다.
퍼블릭 액세스가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모델의 구축 시기에 접어들었고, 그 조건과 상황이 지난 50여년간 진행되어온 전지구적 미디어 운동의 경험을 얼마나 확대시키고 있는가는 다음 두가지 예에서 쉽게 드러난다.

 
“한국으로 이민오고 싶다.”
 

2005년 5월, 2200명의 활동가들이 모인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미디어 개혁 회의(2005년 7월 ACT!에서 다룰 예정이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케이블 TV의 액세스 구조 (지상파, 위성을 아우르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 퍼블릭 액세스라고 하면 그것은 언제나 케이블의 PEG액세스를 가리킨다)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한 연세 지긋한 활동가가 중 한국의 지원제도에 대해 물어오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당신이 한국의 케이블 TV에 25분짜리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방영하면 무조건 1천달러의 지원금이 방송위원회로부터 사후 지급된다.” 그의 반응은 무척 단순했다.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다 있나 ? 한국으로 이민가고 싶다!” 덧붙이자면, 미국의 케이블 액세스 구조에서 프로그램에 대한 제작비 지원이 없는 것은 지원이 없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지원을 상상해본 적도 그런 지원을 요구하며 싸워본적도 없기 때문에 생긴 결과물이지 운동의 원칙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지난 10여년간 미국 케이블 액세스 방송국의 활동가들은 이른바 공동체 제작자들에 대한 기금 지원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써왔다)

 
컨텐츠에 대한 규제의 도입인가 혹은 지원제도의 혁신인가 ?
 

역시 2005년 5월, 퍼블릭 액세스를 주제로 한 활동가들과의 토론에서 있던 일이다. 케이블 액세스에 대한 방송위원회의 사후 지원이 액세스의 개념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보이는 작품에까지 기금 지급을 하고 있는 것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기이한 제도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 논의하던 끝에 해결방법은 둘중 하나임이 분명해졌다. 어떤 형태로든 지역별로 위원회같은 것을 설치해서 컨텐츠를 사전 규제하든지 (다시 말하면 프로그램이 방영 여부를 결정하든지), 아니면 방영은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하되 현재 무차별로 지원되는 방송위 기금 지원 제도를 무엇인가 엄격한 기준을 지닌 선택적 지원 구조를 도입하든지 말이다.
당연히 후자의 방법이 올바르다고 보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다양한 현실적 제약이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프로그램의 자유로운 방영이 보장되어야 말이 되는 것인데, 퍼블릭 액세스의 심의 문제가 법에 의해 묶여있고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법적 책임을 해당 방송국이 져야 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방송법과 시행규칙을 뜯어고치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지역마다 도대체 어떤 체계를 통해서 선택적 지원을 해나갈 것인지 그리고 방송위는 어떻게 그 집행을 위임해갈 것인지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부산 시청자 미디어센터의 운영정책 의결권 문제는 방송위가 지닌 권한을 어느 정도나 위임할지에 대한 태도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결국 이 두가지 짧은 예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한국의 퍼블릭 액세스는 그 어떤 나라도 경험해보지 못한 조건 속에 처해있으며 (인터넷이 퍼블릭 액세스가 실험되기 전에 먼저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전무후무한 상황을 포함해서) 현실에서 서서히 잠복해있던 혹은 새롭게 등장한 각종 쟁점을 전략적이면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해결해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진도가 빨리 나가다보니 점점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해외의 사례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이럴 때일수록, 다른 나라의 (특히 미국의) 퍼블릭 액세스가 지닌 개념과 철학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그러한 지금까지의 액세스 개념이 지닌 한계를 짚어보면서 지난 5년여의 실천에서 얻어진 성과를 기반으로 그 정의를 풍부하게 살찌워내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던 5년전이나 상당 부분 고착되어버릴 수도 있는 10년후의 중간에 놓여있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퍼블릭 액세스 개념이 지닌 고유한 긴장이 무엇인지, 어떤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지, 그런 해석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 등등의 고민을 발전시키기 위해 여덟가지 쟁점을 제기하고 그러한 쟁점을 생산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간단한 발상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1, 표현의 자유인가 접근의 권리인가 ?
 

퍼블릭 액세스(Public access)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공적(퍼블릭) 접근(액세스)의 권리”이다. 넓은 의미로 보자면, 이것은 어떤 매체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로서 주로 권력과 자본이 독점하고 있는 매체 영역의 일부(시간 혹은 채널)를 개방해서 일반 민중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단순해보이는 출발로부터 여러가지 긴장과 딜레마가 발생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어떤 매체를 개방한다는 것은 그 매체 소유자에 대한 규제를 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우리가 흔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게 된다. 전통적인 표현의 자유 개념은 매체 소유 주체가 주로 국가권력이라는 매체 외부의 주체에 의한 개입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매체 소유자에 의한 편집권의 침해를 막아내기 위한 근거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매체에 대한 접근권의 확대는 매체 소유자 혹은 편집권자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따라서 표현할 수 있는 주체의 권리를 주로 강조하는 표현의 자유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해석의 과정은 표현할 수 없는 주체의 권리를 강조하는 커뮤니케이션 권리와 같은 새로운 개념으로 보완될 수도 있다. (미국의 케이블 액세스 구조를 파괴하려했던 케이블 사업자들의 논리는 그러한 액세스 구조의 도입이 사업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바람직한 방향은, 주류 방송 구조의 혁신과 퍼블릭 액세스 구조의 확산이 포괄적인 전략 속에서 배치되는 것일텐대, 이러한 전략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은 이른바 현업 제작자들의 뿌리깊은 엘리트주의가 초래하는 사회적 고립이다.

 
2, 개방이 보장되면 접근이 가능한 것일까 ?
 

그렇다면, 공간을 보장하면 액세스는 실현되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보편적 서비스는 선택적 서비스와 결합되어야하며, 사회적 격차와 억압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선택적 서비스 혹은 지원은 불가피하다. 돈과 시간이 풍부한 은퇴한 사업가라면 모르겠지만, 주당 60시간을 넘게 일하면서 최저임금도 제대로 못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찾아가지 않는, 그리고 지원하지 않는 퍼블릭 액세스는 빛좋은 개살구다.
액세스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두가지 결론은 불가피하다.
한편으로는 매체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권은 보장하되 선택적 지원 구조가 없다면 접근권은 오히려 격차를 확대한다. 보편적 서비스를 넘어서는 혹은 보편적 서비스를 재구성하는 미디어 접근권의 보장이 필요한 것이다. 불평등한 세상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그러한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적 서비스가 없다면 퍼블릭 액세스는 사기다.
그런 의미에서 퍼블릭 액세스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 그러한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인식을 필요조건으로 하며, 동시에 선택적 서비스는 언제나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므로 사회적 불평등의 극복없이 퍼블릭 액세스는 미완성이다. 좀 더 나아가면, 그러한 극복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이 공간 내부에 없다면, 그리고 이 공간에 대한 전략이 없다면, 이 공간을 지켜내고 만들어가는데 동참하지 않는다면 퍼블릭 액세스는 공허하다.

 
3, 표현일까 소통일까 ?
 

접근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된다면, 그 다음 문제는 그 공간 속에서 무엇이 표현되고 소통되며 그런 표현과 소통이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이다. 몇달전 있었던 지역 퍼블릭 액세스 활동가 네트워크의 모임에서 퍼블릭 액세스를 각자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퍼블릭 액세스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는지, 각자의 의견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주류 매체를 통해서 대변되지 못하던 사람들이 직접 스스로 자기 표현을 하는 공간 혹은 활동이라는 정의를 내놓았다.
스스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주류 미디어의 전통적인 한계는 한편으로는 내용의 한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전문가들이 ‘대신해서’ 표현한다는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제약이다. 따라서 자기 표현은 그동안 표현되지 못했거나 혹은 ‘대신해서’ 잘못표현되었던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또한, 자기 표현은 자기 표현의 과정에서 주체를 각성시키고, 주체와 세상의 관계, 그리고 주체가 속한 공동체 내부의 다른 구성원과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록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표현이 없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대의제 민주주의만을 유일한 방도로 내세우는 현대 자본주의의 체제가 지닌 결함을 똑같이 지닐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소통이다. 자기 표현이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완성되는 것은 소통과 (모니터를 포함하는) 평가의 과정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가능하니까 말이다. 이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명제로부터 역시 긴장이 생겨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특정 집단 혹은 경향을 선택해서 지원한다는 것, 그리고 소통에 주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규제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전지구적으로 보자면, 흔히 개방채널로 표현되는 공간과 (Open channel) 공동체 채널로 표현되는 공간 (Community channel)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에서 이러한 현상은 발견된다. 전자의 가장 극단적인 발전 형태는 선착순원리를 신봉하며 보는 사람들의 조건보다는 표현하는 사람들의 공간 보장에 집중하는 그래서 다원주의의 구현에 만족하는 일부 퍼블릭 액세스 방송국이며, 후자의 가장 극단적인 발전 형태는 특정 공동체가 모든 편성과 제작의 권한을 독점하는 일부 활동가 TV이다. 이러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은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을 배치하고 다양하게 실험해내고 작동시킴으로서 상호보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낼 것인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그 짧은 퍼블릭 액세스의 역사 속에서나마 그 어느 나라보다도 다양한 방송 구조를 통해서 다양한 모델을 실험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실천과 제도화의 과정이 네트워킹에 의해 뒷받침되어왔다는 것이 긍정적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방송 시스템(방송통신의 융합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에 액세스 구조를 도입할 수 있다면 상호보완적인 전략 구상과 실천을 위한 첫 번째 전제가 충족되는 셈이다.

 
4, 체제로 흡수되는 제도화의 공간 ?
 

“제도화는 위험하다.” 맞는 말이다. “제도화는 가야할 방향이 아니다” 틀린 말이다. 퍼블릭 액세스는 제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에 대한 다른 발상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정치적 조건이 허용한다면 언제나 제도화를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그런가,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변혁운동의 관심은 여전히 그리 높지 않다. 반대는 없지만 적극적인 동의도 많지 않다. 급진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운동의 의제를 통해서 퍼블릭 액세스를 재해석하기 위한, 아울러 흔히 퍼블릭 액세스의 담론이 빠지기 쉬운 평화로운 제도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몇가지 단서를 찾아보자.
(1) 퍼블릭 액세스 구조는 상당수 국가에서 급진적 프로그램들이 생산되고 소통되는 유일한 공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표현의 자유가 적극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급진적 프로그램은 소통될 수 없다. 물론 주류 미디어 영역의 급진적 변화를 위한 노력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며, 그러한 변화는 양자의 경계 및 영역을 유동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주류 미디어의 역할과 퍼블릭 액세스의 역할을 다시 규정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대의제 방송과 직접참여방송의 상호보완적인 경계 파괴로 나타날 것이다.
(2) 전사회의 상품화,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퍼블릭 액세스 구조는 공적 생산 및 소비 구조를 확대하는 유력한 공간이다. 액세스 구조는 공적 지원과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결합되며 실험되는 대안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며, 컨텐츠를 이윤 확보를 위한 상품이 아니라 소통의 매개체로 끌어올리는 공간이다. 스크린 쿼터가 국적을 지닌 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퍼블릭 액세스는 전사회의 상품화에 대항하고 저지하는 공간이다.
(3) 퍼블릭 액세스라는 공공적 영역의 확대는 규제와 지원과 참여와 감시를 실험함으로서 자본주의 시장구조와는 다른 공적 시스템을 실험하는 미래를 위한 예비기지와도 같다. 말하자면, 개방성을 지니면서 형평성을 가져야 하고, 보편적 접근권을 보장하되 사회적 불평등이 전제되어야 하며, 부분적으로는 전국적 보편적 규제로, 상당 부분은 지역 공동체의 자율적 규제로 운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퍼블릭 액세스는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실험실이다. (2)와 (3)의 자연스러운 결론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미디어의 상품화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퍼블릭 액세스는 언제나 미완성이다.
(4) 퍼블릭 액세스는 대항적 커뮤니케이션 내부의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그것은 특정 공동체 (그것이 노조이든 농민이든 성적 소수자이든 청소년이든 지역 공동체이든) 내부의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운동 내부의 관료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항하는 유력한 무기이다.
(5) 결과적으로 퍼블릭 액세스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중 하나이다. 민중의 직접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퍼블릭 액세스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갱신하며 직접민주주의를 확대 (자기결정, 행동권) 하는 것이며, 상품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컨텐츠의 생산과 소비를 아우르며 지원과 자율을 결합시키는 공적 영역의 제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퍼블릭 액세스라 불리는 모든 제도들이 이러한 정치적 성격을 저절로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판과 반성, 구체적인 전략과 제도의 모색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5, 지원은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 아닌가 ?
 

아주 민감한 문제로 넘어가보자. 퍼블릭 액세스 구조에 대한 공적 지원의 문제는 어떻게 봐야할까 ? KBS의 열린 채널 구조가 KBS의 사보타지와 방송위원회의 수수방관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일부 독립영화 제작자중에는 열린 채널을 통한 방송위원회의 재정 지원을 없애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재정 지원을 받지 않으면 그만큼 더 떳떳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이 주요 근거였다. 돈받지 않으면 떳떳하다는 표현이 과연 이 사안에 적합한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자금 지원이 공적 구조와 운동을 망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이건 항상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규제기구로부터 직접 돈을 지원받으면 잘못된 규제에 대해 싸우기 쉽지 않으며, 재단들로부터 돈을 받다보면 프로젝트하느라 왜 운동을 하는지 잊어버리고, 노조로부터 제작지원을 받다보면 노조가 맛이 가는 순간 재원이 사라지는 등, 방송에 납품하다보면 독립제작자가 아니라 하청업자가 되는데 익숙해지고, 그런 점에서 이른바 사회적 시장의 판매(예를 들어 노조나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 판매나 학교나 도서관등을 대상으로 한 판매)가 기금 확보보다 오히려 독립성을 보장하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을 쉽게 해소해버리는 입장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돈은 어차피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를 나눠먹는 것이니 (바꿔 말하면 원래 노동자의 것, 우리 것이니) 조건없는 돈은 무엇이나 받아도 상관없다는 논리 말이다. 이런 논리 역시 그러한 지원 자체가 계속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변화해가는 상황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는 속수무책일 수 있다.
이 복잡하고 뿌리깊은 문제를 해결하는 뾰족한 수는 없을까 ? 제대로 된 해명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만 퍼블릭 액세스와 관련해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정리가 필요하다. 우선 넓게 보자면, 공적 자금 (그리고 일부 민간 기금)은 큰 틀에서 보자면 민주주의를 확대하거나 혹은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투쟁해야 할 방향은 일단 이러한 공적 자금을 전자의 방향으로 가게 하는데 있다. 말하자면 돈의 문제는 특정 프로그램이나 주체가 지원을 받든 안받든 상관없이 중요한 문제이며 그 쓰임새에 대해 우리는 급진적 변화의 관점에서 개입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여기서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지원은 인프라에 대한 지원과 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지원, 그리고 좁은 의미의 인프라를 넘어서는 각종 활동의 활성화(해외 프로그램의 수급, 액세스 프로그램에 대한 모니터 등등)에 대한 지원 등으로 다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 구조에 대한 개입과 생산적 비판을 위해 퍼블릭 액세스 지원의 주체와 (‘열린 채널’처럼 불가피하게 선정의 주체가 필요한 경우) 프로그램 선정의 주체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미국식 액세스 구조의 영향이 커서 그런지 자꾸 액세스와 관련된 제작활동에 대한 지원이 마치 액세스의 일반 원칙에 위배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미국에서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에 대한 방영료 지원이 없는 것은 현실적 한계의 반영이지 순수한 액세스의 추구 과정에서 만들어진 목적의식적 활동의 결과물이 아니다. 액세스는 지원받으면 안된다는 법칙은 없다. 우리에게 문제는 오히려 이러한 지원이 막연한 기대의 대상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향해 이미 넘어야 할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타산지석으로 삼거나 베낄 곳은 더 이상 없다. 지금 당장 우리는 지원의 확대와 액세스 구조의 차이에 따른 지원 구조의 차별화를 고민하고 세부적인 정책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6, 액세스는 모두 다 같은 액세스다 ?
 

한국의 액세스 구조는 다양하다. 후발주자 한국은 액세스 구조의 폭에 있어서만큼은 타국의 추종을 불허한다. 공중파의 일정 시간을 개방하는 구조 (KBS), 공중파와 시민사회단체간의 파트너쉽 구조 (마산 MBC), 케이블의 지역 채널 개방 구조 (지역채널), 위성방송의 독립 퍼블릭 액세스 채널 (RTV) 등 그림표로만 그려놓으면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다채로운 구조가 만들어지는 바람에 상황이 복잡해져버렸다. 다양한 구조를 실험할 수 있게 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다양한 구조 각각에 걸맞는 원칙과 제도를 만들고 지원 구조를 확보하며 제작자 및 행정가 등 다양한 활동가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지역 혹은 채널의 특성에 걸맞는 실천 전략의 수립과 실천을 섬세하게 그러나 본격적으로 다듬어갈 때가 왔다. 채널의 특성면에서 보자면 주류 채널의 일정 슬롯(KBS 열린 채널)과 독립적 채널 구조(RTV) 및 과도기적 독립채널 구조(케이블) 등 세가지 구조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지역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전국과 지역의 관계 및 각 지역의 고유한 조건에 걸맞는 전략의 수립이라는 과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린 채널은 모든 프로그램을 무조건 방영할 수가 없으며, 케이블은 프로그램의 방영을 제한해서는 안되며, 열린 채널은 사후 일괄 지원이 일차적 방식이나 케이블은 사후 선택적 지원이 가능한 방식으로 가야하며, 지역미디어센터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의 전략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등등... 그러니 하나의 액세스 구조에 적용가능한 원칙을 무작정 확대하거나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지는 말자. 각각의 구조의 특성을 고려한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며, 구조의 특성이 원칙을 결정하고 결정된 원칙이 구조를 변화시킨다.

 
7, 전문가가 추방될수록 액세스는 성공이다 ?
 

지금도 그렇지만, 한 때 한국의 퍼블릭 액세스 구조를 평가하면서 이른바 일반 시민(그런데 일반 시민은 과연 누구일까?)이 만든 제작물이 얼마나 많은가를 액세스 제작 활동 액세스의 활성화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많았다. 말하자면 전문가들이 만드는 작품은 액세스의 활성화와 무관하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런 판단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이다. 이른바 기술적 전문성이 갖춰지지 않은 작품을 원천봉쇄하는 주류 방송의 폐해에 대한 올바른 지적이 함축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판단은 액세스의 대중화를 전문가의 참여와 대립시키는 오류를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선, 그동안 방송 구조로부터 소외되어왔던 주체는 비전문적 제작자뿐만 아니라 전문적 제작자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방송국 외부의 전문 제작자로는 하청 구조에 종속된 독립 프로덕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20여년동안 온갖 악조건을 돌파하며 실천해온, 흔히 독립영화라고 불리우고 그래서 방송과 무관한 영화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 영상 활동가들도 있다. 
그러한 전문 제작자 (물론 디지틀 비디오 기술 덕택에 이제는 그 경계가 무척이나 애매하다) 들의 작품만으로 액세스가 채워질 경우 그 또한 주류의 대의제 방송 구조와 마찬가지의 대리주의적 컨텐츠만 범람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우려가 마치 그러한 전문 제작자의 작품이 없고 비전문 제작자들의 작품만이 있어야 액세스가 활성화된다는 주장으로 비약한다면 그것은 액세스 구조의 다양한 발전 가능성을 훼손하는 공격이 되어버린다.
가끔 출몰하는 ‘진성 액세스’라는 용어아닌 용어도 그렇다. 방송국 외부의 주체가 완성해온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구조에 대해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하는 이 용어는 언뜻 그럴듯해보이지만 오히려 액세스의 풍부한 확대 가능성을 가로막는 형식주의적 발상이다. 액세스는 사회적으로 혹은 미디어 구조에서 소외되어왔던 이들의 소통을 위한 자기표현이며, 그 표현의 책임을 온전히 그들에게만 돌려놓는 것은 또다른 폭력이다. (공동체측에 결정권의 우위를 두는) 전문 제작자와 공동체의 파트너쉽은 공동체 스스로의 제작과는 다른 결과물을 낳을 수 있으며 그것은 액세스의 훼손이 아니라 액세스의 확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보충하면, 한국에서 전문적 독립제작자는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독립된 세 영역 내부의 적극적인 활동 주체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영화 산업에 있어서 공공적 주체이자, 방송 구조에 있어서 전문 독립제작주체이자, 퍼블릭 액세스에 있어서는 교육자이자 표현의 지원 주체이자 직접 표현의 주체로서 말이다. 적극적으로 이런 역할을 더 해야 함에도 하고 있지 못한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분에 매달리는 것을 넘어서 액세스의 실질적인 활성화를 위해 평가가 필요한 것중 주목해야 할 지점들은, 어떤 계급 계층의 참여가 있는 것인지, 어떤 사회적 의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는지, 다양한 제작모델 각각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한 종합적 판단과 그에 기초한 지원과 실천이다.

 
8, 디지틀 시대의 공공성과 퍼블릭 액세스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이야기 한가지가 더 있다. 디지틀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매체가 계속해서 쏟아져나오는 매체 융합의 한가운데에 있는 한국의 퍼블릭 액세스는, 40년전 아날로그 케이블 구조를 중심으로 태동하고 성장해온 미국의 액세스 구조와는 무엇인가 다른 고민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기술적 조건이 다르니까 말이다.
그렇다.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보다 넓게 보자면 퍼블릭 액세스만이 아니라 공영방송의 혁신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아직은 수사학에 불과한) 디지틀 시대의 공공성이라는 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아다시피, 새로운 기술은 엄청난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일단 문제의 출발점중 하나는 채널 개념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것이다. (이진행의 발제 참조) 그런데 전통적인 퍼블릭 액세스의 개념은 정해진 채널 혹은 채널의 시간대를 사용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왔기 때문에 VOD나 채널 개념이 없는 인터넷 환경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이 거창한 주제를 여기서 해명하긴 역부족이니 (올해말쯤 한번 시도해보자) 보다 자세한 내용의 정리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 여기서는 몇가지 질문을 던져보기로 하자.
일정 비율의 할당 원리나 지역 미디어센터와 같은 공공 인프라 구조의 도입은 채널 개념이 없는 새로운 디지틀 미디어에서 한번쯤 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채널 개념이 있는 디지틀 미디어의 경우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퍼블릭 액세스 방송국이나 시민 영역의 방송들에 대해 강제적인 혹은 선택적인 의무 전송 제도를 구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이미 거대기업이 되어버린 인터넷 서비스 관련 사업자들에 대한 공적 의무 제도는 어떤 형태로 도입되어야 하는걸까 ? 공개 게시판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데이터방송에는 퍼블릭 액세스의 개념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 그렇다면, 퍼블릭 액세스는 <공공성-커뮤케이션권리+표현의 자유> 구도의 주요한 하위 범주로 기존 방송을 넘어서서 그 개념을 재구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아날로그 시대의 퍼블릭 액세스를 미처 정비하기도 전에 디지틀 시대는 도래했다.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원칙과 전략이 아직 미완이라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연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전체 미디어에 대한 시야 속에서 퍼블릭 액세스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세상은 구상한대로 변해가지 않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지난 6년간의 퍼블릭 액세스는 분명 미디어 운동의 확대를 위한 새로운 조건을 제공했다. 아마도 앞으로 1년 정도의 기간동안 어떤 활동이 진행되는가에 따라 5년후 퍼블릭 액세스의 모습은 결정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다시 5년후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작은 쟁점 하나도 소홀히 대할 수가 없다. □

* 이 글은 계간 '열린미디어 열린사회' 2005년 여름호에도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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