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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의 세계 속에서 세계 속으로 -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기록하고 반영하고 형성할지 고민하며 떠돌기

독립 미디어 세미나

by acteditor 2024. 12. 1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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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미디어세미나에서는 지난 첫번째 주제인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 네트워크에 이어서 두번째 주제로 기후위기를 다뤘습니다. 지난 8월부터 월 1회 총 5차례의 모임을 통해서 독립 미디어 영역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했습니다. 영화/미디어 제작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제도적인 노력, 기후위기 관점으로 콘텐츠를 새롭게 보는 방법과 큐레이션, 기후위기에 대한 새로운 콘텐츠 제작과 제작 주체에 대한 지원 및 네트워킹 등, 분야별로 국내외의 다양한 사례를 살펴봤습니다.

이번 글은 다큐멘터리가 기후위기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그린워싱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 고민점을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해봤습니다. 이후에도 다양한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하겠습니다.

 

[ACT! 140호  2025.01.23]

 

기후위기의 세계 속에서 세계 속으로...

-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기록하고 반영하고 형성할지 고민하며 떠돌기

 

윤세훈

 

기후위기만큼 시급하면서도 외면 받는 의제를 꼽으라면 떠오르는 것들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시의성 있는 행사나 콘텐츠가 나오면 응당 따라붙는 문제의식이 있다. ‘유행’이 가지는 기본적 속성이 그것인데,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도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일시적으로 타올랐다가 꺼져버릴 수도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유행의 종료는 자연화로 흐를 때도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기후위기라는 ‘소재’가 민주주의만큼이나 어디서든 중요한 기본값이 되기 위해 어떤 논의가 필요한지 물을 필요가 있겠다. ‘소재’로서의 관심과 무관하게 기후위기는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점차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의 상황 속에서 다큐멘터리는 어떤 것을 해왔고 또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여러 ‘행사’를 다니다보니 ‘기후위기 행사’는 무엇인지 묻게 되었다. 그 물음을 갖고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영상을 만들다보니, ‘기후위기 다큐멘터리’에 대한 질문이 생기기도 했다. 이 질문들에 접근하는 과정에 쌓이는 또 다른 물음들을 독립 미디어 세미나에서 나누는 이야기에 보태보았다.


불가능성에서 시작해서 불확실성과 함께하며, 다시 불가능성에서 시작해서 [...]



기후위기 관련 자리에서 자주 언급되는 느낌 중 하나는 불가능성을 마주한 이들의 무력감이다. 캐릭터들의 능력을 훨씬 웃도는 크리처들이 등장하는 코즈믹 호러 속에 사는 것처럼 개인들은 기후위기를 상대하는 것을 넘어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무력감과 우울함을 말하면서 기후위기와 불가능성이 결합해가는 방향으로 익숙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향해 살아가야 한다. 불가능성은 습관처럼 도달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더라도 시작해야 할 곳일 테다. 에바 키테이가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삶이 자신을 살피려는 삶이라면서 단호하게 말하듯 “성찰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살아낸 삶의 현실이지 이상화된 삶이” 아니다. 기후위기와 무관한 삶은 “살아볼 수 없는 삶”이다. 에바 키테이, 『의존을 배우다』, 김준혁 역, 반비, 2023, 35쪽.

키테이가 기후위기와 함께 등장한 곳은 대학로예술극장(이하 아르코)이었다. 아르코에서는 독립미디어세미나처럼 ‘기후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2024년 3월부터 9월까지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지식을 나누는 것과 더불어, 극장 앞에 텃밭을 만들어 각종 작물을 재배하거나 1층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였는데 각종 피켓팅이 이용자들을 반겼다. 또한 참여하는 여러 팀들 중 하나인 ‘균넼’이 주도한 균 배양을 가시화했고, 균으로 이루어진 우리가 균으로 만들어진 빵을 만들어 먹는 프로그램은 아르코 1층에 어떤 특유의 냄새를 채우기도 했다. 워크숍 기간 동안 기후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일상적으로 나눌 수 있는 시공간을 조성하는 것 같았다. 나는 8월 30일에 있었던 ‘기후위기 시대 창작자들의 작업과 고민’이라는 제목의 포럼에 참여하러 갔을 때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포럼에는 총 네 명의 패널이 있었고, 그 중 한 명이었던 공연예술비평가 장기영은 산전 검사와 선택적 임신 중지에 관해 말한 에바 키테이를 경유하며 묻는다. 우리는 분명 ‘선택’을 통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그곳은 늘 불확실성에 지배되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프레이밍 설정은 우리의 몫이다. 에바 키테이, 위의 책, 146쪽.


따라서 어떤 것이 더 적절한 관점인지는 정해져 있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늘 협상의 상태일 것이다. 여기서 장기영은 질문한다. 계속해서 기후위기의 실태에 대해 접하는 것, 실천 방안에 대해서 학습하는 것과 별개로 이러한 알고도 방치하게 되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떤 프레임 속에서 이야기 나눌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기후위기가 아니더라도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이 늘 안고 가야 할 물음 중 하나일 테다.

 

 

 

 


아르코의 행사는 나에게도 두 가지 질문을 안겨줬다. 1)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가 다큐멘터리의 내용뿐 아니라 제작/배급/상영에서도 같이 이뤄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2) ‘기후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서사는 환경파괴를 비판하고 그것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 외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물론 질문이 무색하게 이미 국내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지속 가능한 영화제작을 위한 가이드라인’(2020)을 오픈소스로 등록해놓았고, 해외에서는 마치 벡델 테스트처럼 ‘기후 현실 점검(Climate Reality Check)’, PGA의 그린씰(Green Seal)처럼 영화 내용과 제작과정 전반을 기후위기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척도도 마련되어 갔다. 하지만 이것들이 국내 다큐멘터리 제작 환경에 적용될 수 있게 변형되고 있는지, 혹은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고려할 정도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각각의 제작환경에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런 고민을 끌고 가고 방안을 마련하고 또 홍보까지 실행할 주체가 대체 누가 될 수 있을까. (이에 관해 참조해볼 만한 해외 사례는 다른 참여자 분께서 자세히 다뤄주셨고, 그 글에 서술을 미룬다.)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땐 어설플지라도 나름의 구분이 필요했다. 우선 크게 작품 안과 밖을 나누어 위에서처럼 제작과정에서의 실천을 ‘작품 밖’이란 이름으로 따로 빼냈다. 다큐멘터리는 제작과정 또한 하나의 내용일 때도 있지만 영상 자체에만 주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작품 안’에 대해서 말할 때 다시 이를 두 가지로 나눠보았다. 2-1) (순수한) 자연을 파괴하는 이미지를 따라가며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 즉 기후위기의 실태를 고발하고 그것의 원인을 파헤치며 해결을 촉구하는 다큐멘터리. 2-2) 인간, 자연, 동물, 사물 등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즉 주체 자체를 재해석하여 관점을 바꿔내려는 다큐멘터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알리 타브지리의 <카우스피라시>(2014), <씨스피라시>(2021)처럼 직관적으로 힘을 얻고 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소정의 <로맨틱 머신>(2019)이나 동물영화제에서도 상영한 데보라 스트라트맨의 <마지막 것들>(2023)처럼 후자의 관점에서 상상을 해낼 때 우리는 기후위기를 어떤 식으로 다룰 수 있을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여러 (불확실한) 실마리를 얻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각종 쓰레기와 흙, 물, 동물이 엉킨 것일 테고, 곧바로 선과 악이 명확한 전개에 바탕을 둔 서사가 연상될 수도 있겠다. 이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외의 상보적 관계에 놓인 것들에 대한 상상의 어려움과 필요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한 배급사 직원에 따르면 기후위기 관련 다큐멘터리 상영 의뢰가 들어올 때 사람들이 조금 더 교육적인 것이 없는지 물을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난처하다고.

 

 

알리 타브지리 감독이 만든 다큐멘리터 [카우스피라시](2014), [씨스피라시](2021)

 



공회전◎○●◑◐◉의 일부인 나는 어디로↗↘↑↓→


나 또한 (당연히) 별반 다르지 않다. 기후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한다면 왠지 일단 기후정의행진부터 가야 할 것 같다. ‘아름답고 순수한 자연’을 연상시킬 이미지를 무조건 촬영할 것이다. 일단 확인할 수 있는 환경오염 이슈를 파악하면서 리서치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9월 기후정의행진에서도 동물주체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를 보이콧하는 사람들이 있듯 어떤 현장에서도 단일한 선악 구도가 형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담아가지 않을까. 


하지만 카메라는 이미 기후위기에 관한 현장으로 정해진 곳만을 향해야 할까. 이야기는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영화제에 선정되고, 사람들이 많이 보면 그것은 소셜임팩트를 입증한 것인가. 혹은 영화제가 아니라 온라인상이라면 조회수와 댓글이 양적으로 늘어갈수록 그 다큐멘터리는 지금의 상황이 나아지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인가.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관점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다큐멘터리는 기후위기에 있어 도움이 될까? 이에 대해 곧바로 답하기가 쉽지 않다. 기후위기 관련 행사가 기후위기를 더 악화시키는 꼴이거나, 이를 다뤘다는 것 자체만으로 박수를 보내는 자기만족에 머무르게 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다시, 우리(?)는 기후위기 속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상영하고, 배급하고, 감상하고, 다시 기획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 상품을 소비하고 쓰레기를 배출하고 환경을 파괴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그럼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만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구체화하며, 그 안에서 무엇을 해볼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는 것일까. 제약과 한계를 평가하며 그 방안을 끊임없이 수정해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그 순환이 공회전이 되지 않고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질문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유튜브에 기반을 두고 활동했던 닷페이스에서는 기후위기에 관한 영상 제작 외에 왜 캠페인을 이어서 진행했을까. 영화제라는 플랫폼은 기후위기를 다루기에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다면 어떤 수정이 필요한가. 서울환경영화제는 기후위기를 다각적으로 다룰 수 있을 만큼 후원처에 있어 독립적일까. 기후위기 관련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상의 끝에 참고할 웹사이트 주소와 관련 기관 연락처를 적어두는 시도 외에도 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나누기 위해서는 어떤 자리가 필요할까.


필요하고 가치 있는 내용을 다뤘더라도 해당 다큐멘터리의 접근 방식에 대한 질적 차원에서의 논의가 동시에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후위기에 있어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고민하는 과정에 그러한 논의가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이는 뒷짐 지고 마치 남일 말하듯 ‘종이 빨대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 있다’고 말을 얹는 태도를 지향하자는 것이 아니다. 종이 빨대에 대한 조롱에 대응하기보다 (완벽하지 않겠지만) 더 나은 빨대를 같이 찾자는 제안에 가깝다. 이런 시행착오를 지속적으로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데보라 스트라트맨 감독의 [마지막 것들] (2023) 스틸 이미지



제약회사의 핑크워싱 : 각종 기업의 그린워싱 =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의 협상 : ?


기업의 후원을 통한 그린워싱 또한 제약회사의 핑크워싱에 관한 논의를 참고하여 다르게 상상해볼 수 있겠다. 지난 9월 24일에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가 주최한 토론회가 열렸다. 초국적 제약회사의 핑크워싱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적어도 제약회사의 ‘핑크워싱’은 퀴어 단체들에게 있어 추상적인 절대악이 아니었다. 제약회사들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실체를 가진 협상을 만들기도 했다. 


코로나치료제 이전부터 제약회사 길리어드는 HIV 예방 및 치료제의 특허를 계속 연장해서 비싼 가격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겨왔다. 그런데 그 길리어드는 국내 아주 작은 자조모임에까지 후원을 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선 ‘지금 이 돈 안 받으면 다른 단체가 가져간다’고 속삭인다. 그렇다면 길리어드의 돈을 받은 행사/단체와 아닌 행사/단체를 나누고 후자를 더 진정성 있는 곳으로 평가하면 그만일까. 토론자 중 한 명이었던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활동가 남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업과의 관계를 돈으로만 매개된 것으로 상정한다면 관계를 적대와 협력의 양자택일 문제로 좁힐 수 있다. [...] 후원을 받자/받지 말자의 이분법 너머, 그 안에서 어떤 소통들이 이뤄지고 이뤄질 필요가 있는가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좋겠다.”


그린워싱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감시하는 체제는 두말없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럼 서울환경영화제는 없어져야 할까? 아니면 상품 생산을 하는 기업들이 해외 사례처럼 기후위기 관련 기금을 마련한다면? 기업 의존도를 분명 줄여야 하는 것은 맞겠지만, 그 기금의 활용방식과 기금이 비판을 억제하는 족쇄가 되지 않도록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겠다. 그런 끊임없는 협상을 서사로 만들어볼 수도 있겠다. 이 과정에서 ‘진정성’은 판단하기도 어렵고, 애초에 척도로서 기능하기에 부적절한 것은 아닐까. 이스라엘의 핑크워싱을 규탄하고 관련 창작물을 보이콧하는 것이 ‘진정성’ 결여에 원인을 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기후위기 다큐멘터리 ≠ 기후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편의상 ‘기후위기 다큐멘터리’라고 말해왔지만 이는 ‘기후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연결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 환경오염에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는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기후위기 다큐멘터리’는 ‘기후위기 속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감상하는 것’을 압축한 말일 때 더 넓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후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라는 범주를 놓고 고민을 이어간다면, 접근성이 장애가 소재이거나 장애인이 출연하는 영화에서만 주로 고려되거나, ‘퀴어영화’라는 따로 분류된 카테고리가 종종 다른 영화에서 퀴어가 부각되면 어색함을 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부작용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겠다. 12월을 채우고 있는 탄핵집회에도 풍선과 응원봉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듯, 기후위기는 그 어떤 영상을 만들어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로서의 기후위기. □

 



글쓴이. 윤세훈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며 곁을 지키고 싶은 현실을 포착기록번역한다. 이왕이면 그곳에 균열이 생기길 바라면서 난리를 피운다. (그러려고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귀귀퀴퀴> <ㅈㅣㅂ> <비건들의 수다>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2년 전 이태원참사에서 시작하여 밀고 나간 참사애도에 관한 질문을 다큐멘터리로 (열심히) 번역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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