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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의 사람들 - 다큐 <장기자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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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5. 2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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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6 ACT! 135호 리뷰]

 

거울 앞의 사람들

- 다큐 <장기자랑> 리뷰

 

권나은(비평가)

 

연극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몇몇 친구와의 관계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연극은 원만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반목하게 만든다. 연극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모든 소동과 소요가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타인과 교오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극장으로 돌아왔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연습실에서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프로그램북에 올라갈 글을 쓰고, 하우스에서 관객들에게 티켓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됐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다툼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우리는 파국을 체험하기 위해, 연습실에 모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교차하는 얼굴, 흔들리는 마음

 

늦은 밤, 경기도 안산시의 차량용 배터리 가게. 유리문 너머로 춤을 추는 중년 여성이 보인다. 카메라는 중경(中景)에서 여성의 동작을 담아낸다. 짙은 남색 점퍼를 입은 여성은 책상 위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팔과 다리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카메라는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여성의 상기된 얼굴이 화면에 잡히면서, 내레이션이 나온다. “욕심이 되게 많아요, 제가. 지는 걸 싫어해요.” 카메라의 시선은 여성의 뒤로 향하고, 관객은 여성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찾아낸다. 모니터 화면에서 걸그룹 오렌지캬라멜 <까탈레나> 안무 영상이 나오고 있다. 적막한 실내에서, 여성은 섬세한 손동작을 선보이며, 골반을 흔든다. 그는 극단 노란리본 단원 이미경(영만 엄마)이다.

 

영화의 배경은 안산시의 한 연극 연습실로 전환된다. 여전히 오렌지캬라멜의 <까탈레나>가 흘러나오고 있다. 노란리본 단원들이 춤을 추는 가운데, 이미경과 박유신(예진 엄마)도 몸을 움직이고 있다. 카메라는 연출의 지도에 따라 열연하는 박유신과, 박유신을 은근하게 바라보는 이미경의 옆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이미경의 표정은 무덤덤하나, 눈빛에 서운함이 서려 있다.

 

(#이미경의 가게) 이미경이 열변을 토한다. “왜 나는 쟤보다 잘하는데 난 맨날 주인공 안 시켜주고 난 이런 역할만 주지?” (#박유신의 집) 박유신이 카메라를 보며 항변한다. “모든 게 그 언니 눈에는 오해로 비쳤던 거예요.” (#다시, 이미경의 가게) 이미경이 과거를 회고한다. “예진이 엄마 데리고 연극 하세요. 저 연극 안 할 거예요.” (#다시, 박유신의 집) 박유신이 웃으며 고백한다. “정말 싫었어요 그 언니. 그래서 지금 안 봐요.” 무표정으로 영화 <장기자랑>을 보다가, 이 편집 장면에서 웃음이 터졌다. 다시는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말도, 누구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도, 전부 내가 했던 말이었다.

 

연극은 사람의 유치한 면을 낱낱이 들추어낸다. 사람이 모인 곳은 어디나 다툼이 있다지만, 연극에서의 다툼은 유달리 사람을 어려보이게 한다. 연극 자체가 목적과 보상이 분명하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월급이라도 주지만, 연극은 딱히 돈이 되지도 않고, 내세울 만한 이력으로 남지도 않는다. 대신 연극은 아주 잠깐, 우리가 희구하는 환상을 제시한다. 환상은 연습실에 도사리고 있기도 하고, 무대로 올라오기도 한다. 극단은 환상 공동체인 셈이다. 각자가 그리는 환상의 이미지는 다를 수밖에 없기에, 사람들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최지영(순범 엄마)은 말한다. “갈등이 없다고 볼 수는 없어. 근데 조금씩 있지만, 있어도 어차피 같이 가야 되는데.”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머리하고 화장하는 엄마들

 

갈등은 우리가 범인(凡人)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범인의 특징은, 자기 욕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다는 마음.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 <장기자랑>의 엄마들은, 욕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다. 이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화장품 브랜드가 있고, 단골 미용실이 있다. 학창 시절 친구보다 시험 성적이 잘 나와서 기뻐하기도 했을 것이고, 이웃을 험담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장기자랑>에서, 엄마들은 거울 앞에 자주 선다. 박유신(예진 엄마)은 헬스장에서 아령을 들고 근력 운동을 한다. 박유신은 (거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면 벽을 보며, 아령을 든 자신과 마주한다. 김명임(수인 엄마)은 미용실 거울 앞에 앉아 파마한다. 머리에 약을 바른 상태로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는 김명임이 화면에 잡힌다. 김도현(동수 엄마)은 안방 거울 앞에서 파운데이션을 두드리고, 립스틱을 바른다. 김순덕(애진 엄마)은 분장실 거울 앞에서 입술 화장을 고친다. 이미경(영만 엄마)은 분장실 거울 앞에서 노란 리본을 머리에 두른다. 최지영(순범 엄마)은 거울 앞에서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빗는다. 중간에 합류한 박혜영(윤민 엄마)은 연습실에서 거울과 같은다른 엄마들을 보며, 안무를 따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멋진 모습을 갖추고 싶어 한다. 연예인같이 치장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어 한다. 행색 관리는 자기 돌봄(self-care)을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이건 루키즘 이슈와는 구분되는, 삶을 대하는 낯빛에 관한 문제다. 안색을 환하게 유지하는 자는, 자신을 존중하는 자다.

 

그간 세월호 사고 유가족들, 생존자 가족들의 모습을 미디어로만 접했다. 미디어는 이들의 슬픈 낯빛을 부각하여 보여주었다. 시신의 신원이 확인되자 절규하는 어머니, 진도 바다를 보며 울부짖는 아버지, 피켓을 들고 서명받는 형제들과 자매들. 아마 이런 모습이, 국민 다수가 기억하는 유가족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장기자랑>은 유가족들, 생존자 가족들도 멋진모습으로 존재하려는 욕구가 있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엄마들을 비추는 거울은, 그들을 평범한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매개체다. 이미경(영만 엄마)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 엄마가 애 보내고 뭐가 저렇게 좋아가지고 저렇게 살 수 있지?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영화 후반부, 새 작품의 시놉시스와 배역이 공개된다. 이후 엄마들의 개인 인터뷰가 차례대로 제시된다. 엄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가장 대사가 많은 노란 리본역할을 맡고 싶다고 답한다. 이 팀은 앞으로도 크고 작은 갈등을 경유하며 무대에 오르지 않을까. 그렇지만 갈등은, 극단의 단원들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장치일 수도 있다. 인간적 본성과 욕심을 회복하는 일은, 작업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과제다.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연극이 끝난 후

 

우리는 그렇게 합의했다. 연극 무대는 허구의 장소라고. 통상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은 무대에서 발생하는, 꾸며낸 사건만 목격한다. 그런데 영화 <장기자랑>, 연극 무대를 촬영한 숏과, 대기실과 분장실을 촬영한 숏을 번갈아 제시한다. 관객은 배우들이 허구와 실재를 넘나드는 광경을 보게 된다. 연극 무대에서, 김도현(동수 엄마)은 아들이 좋아한 캐릭터인 <원피스>루피를 연기한다. 파트가 끝나고, 그는 곧바로 무대 뒤로 가 주저앉고 얼굴을 파묻는다. 최지영(순범 엄마)이 다가와 그의 등을 토닥인다. 한편 무대 뒤의 최지영은 굳은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자신의 배역, 방미라로 등장하는 순간에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모델처럼(*주1) 호기롭게 걸으며 무대로 향한다. 영화 초반 갈등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던 이미경(영만 엄마)과 박유신(예진 엄마), 대기실과 분장실에서는 서로를 다독인다. 박유신이 그 드라마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라는 대사를 멋지게 소화하자, 이미경은 무대 뒤에서 함박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은 연극을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이벤트로 인식한다. 그렇지만 연극은 우리의 (잃어버린) 평범함을 되찾는 작업이다. 인간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성숙한다. 의견 충돌을 겪고, 불화하고, 서로 비난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변변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 그런데도 자신과 동료를 용서하고, 무대에 오르는 경험. 그런 경험이 극을 견인한다. 공연 전, 김명임(수인 엄마)골반이 틀어지게 한 번 해볼게요!”라고 외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춤을 추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9주기가 지나갔다. 이 사고와 관련된 모든 글자와 숫자, 이미지들이, ‘기호화된상흔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세월호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 프로필 사진에서 노란 리본을 내리지 않는 사람, 지겹다고 투덜대는 사람, 대뜸 빈정거리는 사람. 알고 보면 대부분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범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상반(傷瘢)을 의지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 <장기자랑>,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의 평범함에 주목한다. 생존자 엄마인 김순덕(애진 엄마)오늘이 416일인 것처럼 사는 아이들이 많거든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보통의 사람이므로, ‘평범하게살 권리가 있다.

 

상영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본다. 멀어진 친구, 죽은 가족, 이별한 애인이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갈등도, 서로의 보편성을 자각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실제 상황이라고 믿은 일들이, 슬프고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건들이, 실은 연극의 한 부분이라면? 우리가 서로 미워한 게 아니라, 주어진 배역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면? 거울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말을 건다. “너네 무대 위에서 혼자 덩그러니, 나 쓸쓸하게 춤추게 할 거야?”(*주2)

 

*주
1) 최지영의 아들 고 권순범은 모델을 꿈꾸는 학생이었다.

2) 연극 <장기자랑> 속 조가연의 대사. 박유신(예진 엄마)이 조가연을 연기했다.


글쓴이. 권나은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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