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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최종 단계를 위하여 - 책 『눈에 선하게』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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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5. 2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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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5호 리뷰 2023.05.30]

 

 

영화의 최종 단계를 위하여 -  눈에 선하게 리뷰

 

오재형 (영화감독)

 

한 감독이 상영이 끝난 후 무대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영화를 전공했는데요, 아무래도 잘 못 배운 것 같아요. 처음부터 돌아봐야겠어요.” 객석에서 혹평이 나온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감독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화제가 있다.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는 과감히 공모 선정작에 손을 댄다.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말 그대로 장벽 없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형식으로 재가공해서 상영한다. 게다가 감독과의 대화 현장에는 수어통역과 문자통역이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또 객석에는 전동 휠체어들이 가득하고..

 

영화제 제법 돌아다닌 감독에게도 꽤나 낯선 광경일 테다. 영화 전문가들이 즐비한 교육기관에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감각이고 경험하지 않았던 세계다. 보통 이름에 장애 인권이 붙은 영화제들은 이렇게 굳이 품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을 지향한다. 상상력 빈곤과 예산 핑계로 규모 큰 영화제들도 시도하지 않는 영역을 가장 가난한 영화제들이 매년 기적처럼 해내고 있다. ‘관객은 다양하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뒤로 미룰 수 없는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돌아보겠다는 그 감독의 결심은 몇 년 전의 내 마음과 같다. 우리의 혼란은 다음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어떤 영화를 만들까? 보다 중요한 문제, 누가 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화면해설이라는 단어와 마주치게 된다.

▲책 『눈에 선하게』 책표지

 

눈에 선하게

 

화면해설작가라고 하면 그게 뭐하는 직업이에요? 라며 되묻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드라마나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까? 라고 상상해본다면, 그게 가능하도록 만드는 직업 중 하나다.

 

“‘화면해설이란 시력이 약하거나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하여, TV나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설자가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서비스를 말하며, () 영상 속 장면의 전환이나 등장인물의 표정, 몸짓, 그리고 대사 없이 처리되는 모든 화면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화면해설이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 화면을 해설하는 원고를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 화면해설작가.” - <눈에 선하게>, 09 -

 

이렇게 설명을 해도 이 단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영화계 사람들조차) 보통 대혼란에 빠진다. 장애와 접근성 용어가 워낙 생소한 사회다보니 청각 장애와 시각 장애, 화면해설과 배리어프리 자막에 관한 개념들이 머릿속에서 비빔밥처럼 뒤섞여 총체적으로 엉뚱한 질문이 탄생하곤 한다.

 

그러니까  청각 장애인을 위해서 화면해설이 필요한 거잖아요? 그 자막 말이에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요..!”

 

북한산 가야되니까 수영복 챙길까요? 와 비슷한 질문을 받으면 음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이런 경우 책 한 권을 넌지시 추천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눈에 선하게>는 화면해설작가 5(권상아, 김은주, 이진희, 임현아, 홍미정)의 생생한 분투기를 담은 에세이집이다. 시각장애인도 영상물을 즐길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위하여 대신 눈이 되어주는 사람들의 보람과 고충이 잘 담겨 있다. 드라마, 극영화, 다큐멘터리, 예능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화면해설 예시를 든다. 읽다 보면 그간 내가 즐겨보았던 영상물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상상력이 샘솟는다. 두 세계를 잇는 번역가로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화면해설작가가 특정 장면(긴 여백과 로맨스)을 만나면 어떻게 주관적인 문학가로 변신하는지의 대목도 상당히 재미있다. 화면해설방송을 덕질하는 비장애인 커뮤니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유명한 영화의 각본집이 출판물로 팔리는 시대가 왔듯이 곧 화면해설의 시대도 점점 확장될 것이다.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인지능력이 다른 모든 장애 유형이나 노인, 어린이에게 도움을 주며, 그 특유의 문학적 해설로 드라마 덕후들까지 품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이 책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읽으며 혼자 무릎 치며 공감했다. 저자들과 밤새 수다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나도 이 주제라면 전문가는 아니지만 옆에서 방귀 정도는 껴볼 수 있을 정도로 고민해봤기 때문이다.

 

▲영화 <피아노 프리즘> 스틸컷

<피아노 프리즘>과 화면해설

 

<피아노 프리즘>은 내가 연출, 촬영, 편집, 음악은 물론 주인공도 맡은 영화다. 북 치고 장구 친 김에 배리어프리 작업(화면해설 대본, 화면해설 녹음, 배리어프리 자막)도 직접 수행했다. 배리어프리 영화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평소 장애학과 접근성에 관한 관심도 한 몫 했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관심종자이기 때문이다. 누누이 말하고 다니는데 진정한 관종의 최종 단계는 배리어프리 컨텐츠 제작이라고 생각한다. 왜냐고? 이렇게 만들면 관객 한 명이라도 더 품을 수 있으니까. 또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완벽하진 않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심정으로. 어떤 영화인은 내 영화를 보고 이런 평을 남겼다. “영화의 최종 단계는 이런 것일까 배리어프리 요소를 윤리적 관점뿐 아니라 영화적 실험으로도 도전했던 나의 작은 의도를 알아주셔서 뿌듯했다. 관종의 최종 단계, 영화의 최종 단계가 되기 위한 배리어프리 영화의 필수 요소인 화면해설은 고단한 작업이었지만 절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영화 <피아노 프리즘>의 편집화면

 

화면해설 정말 만만치 않다. 원래 '내가 본 것을 남에게 말로 설명하기'가 가장 어려운 일 아닌가. 게다가 세상의 99.9%의 영상물은 화면해설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고 제작하기 때문에 해설 들어갈 틈이 턱없이 부족하다. 화면해설작가는 인물의 대사와 대사 사이, 그 좁쌀만 한 틈을 찾아 설명해낸다. 가령 누군가 매일 5초 만에 식사해야 하는데, 그 시간 안에 식감도 좋고 맛과 건강에 훌륭한 식단을 짜내야 한다면 어떨까.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경이로운 직업이 화면해설작가다. <눈에 선하게>를 보면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다. 로봇 만화의 변신 장면을 잘 해설하려고 문구점에서 변신로봇을 직접 구매해서 합체해봤다는 일화는 감동적이다. 짧은 시간에 압축된 언어로 상황을 설명하는 훈련은 시인의 언어를 장착해가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화면해설을 직업으로 삼다 보면 결국 시인이 될 것이다.

 

나처럼 감독이 직접 화면해설을 한다면 부족한 틈에 관한 문제를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영상의 앞 뒤 클립을 살짝 늘리는 식으로. 그래서 훨씬 더 퀄리티 높은 화면해설이 들어갈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나는 주변 영화감독들에게 배리어프리 영화를 직접 제작해보라고 권유한다. 접근성 면에서도 물론이거와 본인 영화의 화면해설 대본 쓰기와 녹음 과정을 수행하다보면 가상의 관객에게 음성 편지를 남긴다는 로맨틱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전문가에게 맡기기 싫을 정도로 재미있는 작업이다. 하나 더. 화면해설과 배리어프리 자막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영화적 실험이 될 가능성이 많다. 즉 배리어프리 요소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사후적인 요소가 아니라, 애초에 배리어프리 영화만이 성취할 수 있는 미학적 영역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다른 감독이 만든 배리어프리 영화를 최대한 많이 접하고 싶다.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걸을 때 내가 입은 티셔츠에 직접 새긴 문구는 다음과 같다. “Let’s Barrier free!”

 

+ 덧대기 1

넷플릭스가 배리어프리 컨텐츠를 많이 보유한 것은 그 회사가 문화적으로 엄청 진보해서라기보다는 미국 통신법의 의무조항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에 선하게>를 읽고 처음 알았다. 이래서 법이 필요하다. 화면해설작가들이 자주 듣는다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 필요 없고, 법으로 제정해서 '당연한' 일로 만들면 어떨까.

 

+ 덧대기 2

<피아노 프리즘> 의 자세한 배리어프리 제작과정은 아래 링크로.

https://blog.naver.com/owogud/222512376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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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오재형(영화감독)

영화 <피아노 프리즘>, <모스크바 닭도리탕>, <덩어리> 등을 연출했다. 에세이집 <피아노를 치며 생각한 것들>을 썼다. 최근에는 동료들과 영화제 <반짝다큐페스티발>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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