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 글은 ACT! <리뷰> 코너를 비롯한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좀 다르지만, 필자의 관점과 글을 존중하여 전문을 싣습니다. - 김서율 (ACT! 편집위원)
[2023.05.30. ACT! 135호 리뷰]
타성에 젖은 대화.
그리고 그 타성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영화 <컨버세이션>을 보고
김신(자유기고가)
“나를 둘러싼 아주 작은 기호들에 대해서도 나는 습관 때문에 잃어버린 의미들을 복원시켜야 했다. (…)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정신이 아닌 입술이 선택한 말들, 대화에서 나누는 것 같은 유머로 가득한 말들, 그리고 타인들과의 긴 대화 후에 우리 자신에게 가식적으로 하는 말들, 우리의 정신을 온통 거짓으로 채우는 말들, 이런 말들을 옮겨적을 만큼 실추한 작가에게서, 이를테면 매 순간 생트뵈브 같은 사람이 구술한 문장을 왜곡하게 만드는 가냘픈 미소와 쨍긋한 표정을 동반하는 그 모든 육체의 말들을 멀리할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주1)
1.
<컨버세이션>의 제목은 왜 “컨버세이션"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언뜻 바보 같아 보인다. 이 영화는 열다섯 개의 시퀀스를 통과하는 인물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들로만 구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감독 본인도 오직 대화 장면을 찍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의도를 여러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밝힌 바 있고, 영화도 그런 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작동한다. 그건 나도 보면 안다. 내 말은 그렇다고 해서 그게 굳이 영화의 제목을 ‘대화’라고 이름 붙일 필연적 당위가 되냐는 것이다. 비틀어 물어보자면, <컨버세이션>보다 더 많은 대화가 등장하는데도 제목을 “컨버세이션"이라고 안 짓는 영화들은 왜 무수히 많은가.
손시내 평론가는 이 영화에서 “각각의 장면들은 명확한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고, 시간 축도 고정돼 있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오가는 말과 인물 사이의 관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주2)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인터뷰하는 기사의 도입부에서 짧게 꺼내놓은 말이라서 그다지 심각한 고려 없이 꺼내놓은 말 같기는 하지만, 나는 이 진술을 다소 졸렬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반박하고자 한다. 저 말이 작품의 구조와 내러티브를 방만하게 풀어헤치고 남은 요소들을 그저 배열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주목할만한 미적 효과나 현대적 소외에 대한 저항적 함의를 산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여러 평자들의 그릇된 비평적 관성과도 은연중에 조응하는 바가 있는 진술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컨버세이션>이 치밀한 서사적 구성과 형식적 세공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게 잔여물로 남은 대화의 밀도를 절로 배가하는 효과를 창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주3)
막상 대화를 진정으로 탁월하게 써내려가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구태여 그 작품에서 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새삼스럽게 방점을 찍을 이유가 없다. 이를테면, 작년에 개봉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공식적으로 알려진 러닝타임이 <컨버세이션>과 거의 똑같은 <우연과 상상>(*주4)은 내가 어림잡아 짐작하기에 <컨버세이션>보다 대사량이 최소한 1.2배 정도는 더 많은 영화다. 그런데 왜 <우연과 상상>의 제목은 “대화” 가 아닐까. 이유는 자명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목적이 대화를 열거하는 작업 자체가 아니라, 그 대화를 통해 도달하려는 구체적인 영화적 효과이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각별히 영화의 3부에서 빛을 발한) 불균질한 타자성을 환기하는 스크린의 우연적 역량이 상실된 동시대 영화의 위기를 임시적으로 타개하는 연극적 무대를 구축하는 작업 외에도 여기에서 일일이 요약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작품의 제목은 그 구체적 효과를 집약하는 모티프인 “우연과 상상”이라 지으면 될 일이다. <우연과 상상>이 대화로 흘러간다는 현상의 사실성을 새삼스럽게 지목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굳이 <우연과 상상>이 아니더라도 특정한 영화나 문학이 빚어낸 인상 깊은 대화의 순간과 직면할 때, 관객은 그 대화가 환기하는 실제적인 감각과 감정에 주목하고 있지, “어머나 세상에, 저들이 대화를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예술가란 자신이 특정한 전략을 채택할 명목상의 필요성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이가 아니라, 자신만의 직관과 미감으로 구축한 감각을 통해 그 전략의 정당성을 구체적으로 증명해내는 존재인 까닭이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이 나는 <컨버세이션>이 잡다한 대화를 그저 열거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실질적인 효과를 빚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의 도입부에서 제사로 역대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인 프루스트를 인용하고, 동시대 영화가 직면한 전례 없는 난관을 대중적 서사로 타개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인 하마구치 류스케를 들먹이며 독립영화를 내려치는 것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내가 봐도 그건 타당한 지적이긴 하다. 김덕중 감독은 인터뷰에서 본인이 제작 지원을 받는데 계속해서 실패하는 와중에, 지원과 투자를 받지 않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소규모 제작을 감행하기 위해 <컨버세이션>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이 글은 <컨버세이션>에 대한 비판적 논조를 이어가고자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탁월한 첫 작품인 <에듀케이션>에서 엿볼 수 있었던 김덕중의 역량이 앞으로 <컨버세이션>보다는 더 훌륭한 작품으로 개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둘째로 <컨버세이션>이 나로 하여금 영화에서 잘 쓰인 대화를 구축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털어놓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2.
먼저, 왜 <컨버세이션>의 대화가 지지부진하게 느껴지는지 짧게 말하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이런저런 인물 사이에서 오가는 이런저런 말들은 캐릭터의 개성을 각별하게 채색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서사적 국면을 도약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의 대화가 서사적 기능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 탄력적인 감흥을 선사하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라서, 요즘처럼 방송이나 유튜브에 아무 게스트나 일반인을 불러 한가로운 잡담을 떠들게 하는 영상이 넘쳐나는 시국에 굳이 이 영화의 대화가 지닌 픽션으로서의 차별적 미덕이 있는지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그 영상들도 <컨버세이션>처럼 하나같이 픽션을 매듭짓는 결단이 약화된 일회성의 무대에서 시답지 않은 농담과 현대적 삶의 공허에 대한 특별할 것 없는 성찰을 던지는 건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영화는 일견 여러 시퀀스들을 서사적 선형성과 상호 연관성이 거의 부재한 파편적 양상으로 열거하면서, 선형적 드라마를 달리는 캐릭터의 성격 묘사를 소홀히 할 알리바이를 스스로 얻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 파편적 형식은 관습적 작법을 폐기한 후 대안으로 가용한 자기 나름의 모더니즘적 구성을 치밀하게 조직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몇몇 평자들은 <컨버세이션>의 내부를 떠도는 시퀀스들의 일부가 필재와 승진의 동성애적 뉘앙스를 머금고 있다는 디테일에 주목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 뉘앙스는 은영과 승진의 투닥거리는 관계와 함께 느슨하게 배열된 장면들의 시간축을 연결하는 미약한 단서를 마련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에 대해 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단서들은 파편적인 시퀀스들을 효과적으로 매듭짓거나, 설령 매듭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름의 주관에 따라 배치의 규칙을 설정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빈약하며, 로맨틱한 뉘앙스는 감독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듯 임의적으로 두서없이 흩뿌려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승진이 KTX안에서 필재에게 쓰는 편지의 내용에서 보듯, 인물과 인물이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애상적 감정을 전하는 필력이 탁월한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결여의 측면들이 오히려 파편적 구성이라는 영화의 형식과 ‘효과적으로’ 조응하고 있는 게 아니냐.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재차 말하지만 어떤 작품이 치밀한 서사적 구성과 형식적 세공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게 자동적으로 파편적 구성에 대한 정당성과 현대적 소외에 대한 비판적 함의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안겨다 주는 건 아니다. “어떤 영상작품이 파편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작품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주5) 심지어 요즘은 1세기 전의 영화감독들이 도시 교향곡을 만들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분산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일상화한 지 오래라서, 일상과 예술에 파고든 분열적 면목은 어지간해서는 아무런 충격도 미학도 전하지 못한다. 가령, 현대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단속적인 해프닝을 묘사하는 <숏박스> 같은 스케치코미디 유튜브 채널을 보는 시청자들은 코스모폴리탄적 관계에 대한 냉소적 묘사를 저항적 함의가 탈각된 편안한 일상물로 소비하며 즐긴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집 앞에서 “내일 다시 왔을 때 이발소가 완전히 뜯겨 나가고 아이스크림 가게나 애견 카페가 생겼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늘 벌어지는 일”(*주6)이기 때문이다.
3.
<컨버세이션>의 파편적 형식이 충분히 치밀하지 않다는 논지와 관련해서는 이 영화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얼굴들>에 대한 비교 분석을 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부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강현 감독의 <얼굴들>도 인과론적 선형성이 파기된 분열적 구성을 띠고 있으며, 그 분열된 토막을 관통하는 존재가 박종환 배우가 분한 인물(기선)이라는 점에서 상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상수의 최고작들에 비견될 만한 독보적인 형식을 창안하는 데 성공한 2010년대의 거의 유일한 한국영화라고 할 수 있는 <얼굴들>은 그저 두서없이 파편을 열거하는 작품이 아니다. <얼굴들>은 외려 합리적 인과성을 획득하지 않는 파편적 작업조차 나름의 지적 설계를 거쳤을 때 의도한 효과를 훨씬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예시한다. 설령 그 효과가 의미의 결여와 부재와 같은 현대적 증상과 연관될 때조차 말이다. 우리는 ‘탁월한’ 예술가들이 종종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쓰거나 찍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내용을 어느 정도는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컨버세이션>과 <얼굴들>은 파편적 장면들을 사전에 선별하는 과정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인물들이 공적 윤리나 직업인의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사적 담화를 나누는 장면을 취사선택한 <컨버세이션>과 달리, <얼굴들>은 여러 인물이 특수고용노동자나 근로자로서 노동하는 장면만을 골라내는 이례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그래서 <컨버세이션>과 같은 영화가 단절된 관계와 파열적 내면을 프레임 아웃과 같은 피상적인 차원을 통해 암시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소외된 사회적 관계와 노동이 지배하는 현실로부터 특권적으로 면제된 단란한 사적 담화의 공간을 마련하는 예능 프로그램적 기획에 그치는 것과 달리,(*주7) <얼굴들>은 인물들이 직업인의 명분을 통해 접선하는 순간만을 담아내면서 사적 접촉의 순간을 소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훨씬 육중하게 배가된 단절적 관계의 증상이, 시민으로 하여금 사회의 타자를 사무적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에서 유래한다는 객관화된 성찰에 도달한다.
여기에 더해서 <얼굴들>은 시공간적으로 동떨어진 장면을 절합하는 과정에도 정교한 원리를 바탕에 둔다. 이를테면 <얼굴들>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감흥을 전하는 몽타주를 살펴보도록 하자. 택배 기사인 현수가 우연히 화물 차량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일기장을 펼친 후에, 관객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 일기장 주인의 플래시백이 펼쳐지는 기이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 뜬금없는 몽타주는 그냥 무연관적인 시퀀스들을 별생각 없이 이어붙인 결과물이 아니다. 영화가 도입부에서 일찌감치 혜진이 전 애인인 기선과 찍었던 사진을 미련 없이 폐기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기억과 관계의 연속성을 파기한다는 문제의식을 내비친 바 있다는 점을 유념하도록 하자. 플래시백의 주체와 플래시백의 화자가 서로 상이한 장면을 덧붙인다는 괴상한 발상이 빚어낸 이 독창적으로 부조리한 감각은 기억의 붕괴라는 현대적 문제의식과 의미심장하게 조응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런 혼란스러운 기억의 조합이 데이빗 린치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처럼 초현실주의적인 기교로 성립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던 택배 기사에 의해 실행된다는 설정 또한, 물류 경제가 기억과 사물의 장기적 일관성을 뒤죽박죽으로 뒤섞어버린 동시대의 일상에 대한 성찰을 건조하게 담아내기 위한 의도적 설계다. 나아가 여기서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처럼, 뒤틀린 시공간의 조합에 경악하는 인물의 리액션 숏 같은 게 뒤따르지 않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디테일이다. 이강현은 현대 도시를 관류하는 미로적 감각을 희석시키지 않고 오롯이 드러내기 위해 리액션 숏이나 직접적 내레이션과 같은 일말의 감상적 장치를 발라낸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면적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인물이, 아까 거론한 그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 일기장의 주인이라는 점도 이런 부조리의 증상을 심화하기 위한 아이러니다. 이런 요소들은 모두 임의적 연출이 아니라 플래시백의 관습적 형태를 왜곡한다는 지적인 계산 아래 완벽하게 디자인되어 있으며, 심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서사적 기억이 소멸한 현실을 반영한다는 영화의 전략과도 효과적이고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다.
이 지면은 <얼굴들>을 비평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말하겠지만, 어쨌거나 이강현 감독이 언뜻 느슨해보이는 <얼굴들>의 시나리오를 두터운 단행본 한 권의 두께로 작성했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며 뻘짓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파편을 배열해 부조리와 무의미라는 주제를 전하는 작업조차 엄밀한 구조화를 통해 깊이를 더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냥 카페에서 잡담을 엿듣는 느낌을 주는 장면들을 배열한 다음 상호연관성을 부여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발상에 몇몇 연결고리를 사후적으로 급조한 <컨버세이션>(*주8)과 비슷한 작업으로 거론하기에는 스크린의 밀도 자체가 차이 난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똑같이 파편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더라도 <얼굴들>이 동시대의 사회적 징후에 대한 통찰력 있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과 달리, <컨버세이션>의 인물들은 “한남"이나 “정의당" 같은 예민한 정치적 단어가 대화 중간에 튀어나오면 “우와아 정의당~? 우와아……”(필재)와 같은 아둔한 대사를 내뱉으며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전술했듯이, 나는 감독이 대화를 찍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제작에 임했다는 점은 감안하고 이런 논평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어쨌거나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비평의 자율성이라는 게 또 있긴 한 거니까 마지막으로 조금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말들을 끼적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4.
지금까지 말한 바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컨버세이션>은 가벼운 마음으로 찍었기 때문에 느슨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게 맞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런 흐지부지함을 넘어서는 관계와 대화의 밀도를 구축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난감해하는 한국 독립 영화의 고질적 문제를 연상시킨다. 이런 느슨함은 “즐거운데 뭔가 좀 붕 뜬 것 같지 않아?”라는, 어딘가에서 이미 수십 번쯤 들어본 대사를 기입한다고 해서 적당히 합리화될 수 있는 측면은 아니다. 그런 말은 그냥 동네에서 친구끼리 만난다고 해도 굳이 서로 안 꺼내놓는 말이지 않은가. 그러면 차라리 왜 우리가 일상에서 그 말을 굳이 안 꺼내는지, 그걸 안 꺼내놓는 상황은 개인의 어떤 냉소적인 심경이나 가족적, 계급적 내력에서 기인해서 어떤 신체적 습관으로 구체화되는지, 그 상황은 그 인물 바깥에 있는 또 다른 타자나 역사적 상황과 어떻게 결부되거나 때로는 파열되는지, 그리고 그 파열조차도 또 다른 타자에게는 인지될 수 없다면 그건 또 그 타자의 어떤 개인적 상황이나 사회적, 매체적 조건에서 기인하는지 등등. 리서치로 디테일을 더 파고들어 갈 여지는 차고 넘쳐난다. 그리고 그런 디테일을 염두에 둔 대화를 쓰는 데 성공하게 되면, 그때는 장면을 덧붙이는 논리도 자연스럽게 심화될 것이며, 영화 제목을 굳이 “컨버세이션"이라고 붙일 필요도 없게 된다. 그 여지를 거의 다 포기하고 “정신이 아닌 입술이 선택한 말들"(*주9)을 열거한 영화를 만드는 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감독 본인이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잖나) 그 범상한 결과물을 보고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이러한 파편적 대화들로 이뤄진 건 아닐까”라고 뭔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듯 새삼스러운 상투구를 늘어놓는 평자들을 보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주10)
나는 이런 문제점이 “대화”의 범주를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한정하는 독립영화나 한국문학 특유의 관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직업적, 구조적 문제를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는 프리랜서적 인물들이 쉬는 시간에 주고받는 쇄말주의적 잡담만 대화로 간주하는 작가 지망생들의 경향이랄까. 이런 대화들은 경솔하기 그지없는 평론가들이 관성에 따라 내뱉는 표현처럼, ‘서사의 경직성으로부터 해방된 대화를 오롯이 드러낸다’거나 하기보다는, 그냥 인물이 속한 세계에 대한 디테일을 편의적으로 결락하면서 인물의 입체성과 대화의 밀도를 동시적으로 저하시킬 뿐이다. 따지고 보면 <컨버세이션>보다 대사가 훨씬 적은 <에듀케이션>의 침묵이 <컨버세이션>의 무수한 잡담보다 훨씬 더 밀도 있게 느껴졌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기인한다. <에듀케이션>에서 인물이 배치된 상황은 사적 내면을 넘어서는 공적 책임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컨버세이션>은 그 “교육”이라는 공적 층위를 도려내고, 서로 관계에 책임질 필요가 없는 30대 후반 프리랜서들의 사적인 “컨버세이션”만 남긴 영화다. 그러니 이 영화가 굳이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는 현대인을 대충 두 세 명쯤 모아놓은 곳이면, 아무 데서나 들을 수 있는 잡담으로 가득 차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분명 부분적으로 재밌게 들리는 구석도 조금은 있는 그 잡담은, 과연 지리멸렬한 우리의 일상을 위로한다거나, 아니면 피사체를 판단하지 않고 응시하는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걸까. 윤리에 대한 문제로 한정한다면, 보다 심화된 구조적 질문을 던질 필요성을 소거한 채 인물의 사담을 오롯이 바라보기만 하면 그게 저절로 인물에 대한 윤리적인 응시를 담보하는 걸까. 고통을 공유하는 사회적 대화에 관한 엄기호의 통찰을 빌리자면, 한국 사회에서 특히나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라는 식의 말로 옹호되어 온 이런 응시와 대화의 윤리학은 타자를 그저 ‘현존’할 뿐인 수동적 존재로밖에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고통의 곁이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자리라는 점"을 편의적으로 간과한다. 심지어 엄기호는 다른 어떤 사회학자보다 386세대의 계도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절절하게 소리쳐온 실천적 지식인인데도 이런 주장을 한다.(*주11) 그의 말처럼 구체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대화를 구축하지 못한 패착이 바로 <컨버세이션>의 대화가 인물의 일상적 헛헛함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같이 흐지부지하게 종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5.
“비평은 질문을 제기할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식의 진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글을 끝내기는 싫어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나만의 실용적인 해결책을 짧게만 제시해보겠다. 그런 실용적 해결이 불가능한 시대의 부조리한 조건을 형식주의적으로 구조화하면서 걸작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는 이미 이강현의 <얼굴들>을 논하는 대목에서 간략하게 얘기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그런 곤경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밀도 있게 구축하는 방법에 대한 나만의 소견을 얘기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인물들이 자신의 상황을 보다 사회적인 서사로 다듬어 발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직업군의 인물을 대화에 포함시켜,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기자나 변호사, 면접관이나 콜센터 직원 같은 직업들. 곡해될 우려가 있을까 봐 덧붙이는데, 이 말은 사회학적인 주제를 다루라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나는 인물들이 자신의 내면과 상황을 보다 객관화된 방식으로 서술하도록 유도하는 타자와 시공간을 전략적으로 도입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전략을 도입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쓰는 이야기가 저절로 걸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이를테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는 여러 인물의 파편적 서사를 탁월하게 연결한 걸작이지만, 그 연결의 탁월함은 단지 편집적인 기교의 유려함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경찰, 기자, TV쇼 호스트, 간병인, 전화상담사처럼 타인의 사정을 경청하는 직업군의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세기말의 소외된 인물들이 실존적 고통을 고백하는 대화의 스펙타클이 발생하도록 사전에 설계했다. 물론 앤더슨은 그 고백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거나, 아니면 고백하고 싶은 데도 긍정적인 얼굴만을 내보여야 하는 미국의 문화적 관습에 따라 고백을 할 수 없어 신경증이 발생한다거나 하는 심화된 층위의 기술도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다. 가령, 천재 소년 스탠리가 퀴즈 쇼 도중 오줌을 지렸는데도 진행자인 지미 게이터에게 그 실수를 털어놓지 못한다거나, 그걸 듣고 있는 지미 게이터도 마찬가지로 TV쇼에서 자신의 파탄난 가정사와 병리적 질환으로 썩어 들어가는 내면을 고백하지 못한다는 상황 설정이 그렇다. 대화의 공간을 설정하고, 또 그 대화적 공간이 어떤 부조리를 함유하고 있는지를 성찰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물의 성격이 입체화되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성찰도 녹아든다. 그리고 그 대화가 발휘하고 있는 실질적인 효과가 구체적이라서 굳이 영화의 제목에서 인물들이 “컨버세이션”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도 없어진다. 따지고 보면 인터넷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탈물질적이고 분산적인 경험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2010년대의 극히 예외적인 성취인 장강명의 『댓글부대』가 탁월한 이유도 이런 전략적 측면과 유관하다. 『댓글부대』 또한, 소설에서 저널리스트가 출현해 ‘댓글부대’로 하여금 본인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전략은 바로 대화가 추상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서술을 포함할 수 있도록 대화의 형식 자체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전후의 상황을 다룬 아담 맥케이의 <빅쇼트>를 떠올려보자. <빅쇼트>는 대체로 (인문학 책은 많이 볼지 몰라도 경제학적인 지식은 부족한 경우가 허다한) 시네필들이 선정한 걸작의 리스트에서 배제되곤 하는 영화다. 여기서 아담 맥케이는 오늘날까지 여파를 남기고 있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라는 난해한 사태를 구체적인 인물과 인물이 연루된 흥미로운 서사로 풀어내기 위해 관습적 대화의 양식을 넘어서는 온갖 술수를 남용한다.
그 술수의 예시로, 전문 용어를 관객에게 그때그때마다 설명하기 위한 필요에 따라 대화의 범위를 자의적이고 유연하게 확장한다는 전략을 거론할 수 있겠다. 가령 난해한 금융 용어가 출현해 관객이 길을 잃을 것 같자, 아담 맥케이는 셀레나 고메즈나 마고 로비를 까메오로 출현시켜 관객에게 직접 공매도와 CDO에 대한 개괄적 설명을 늘어놓게 했다. 디제시스 내부에 속한 등장인물들도 종종 카메라를 바라보며 관객에게 직접 “지금 이 상황이 원래 실화랑은 좀 다른데, 상황을 좀 더 효과적으로 재현하려고 실화를 왜곡한 거예요.”라고 말을 건넨다.
이동진 평론가는 <빅쇼트>에 대해 남긴 20자평에서 아담 맥케이가 “한국영화에서 가장 찾기 힘든 종류의 재능”(*주12)이라고 썼다. 이 말에 100퍼센트 동의한다. 한국 영화는 홍상수 같은 형식주의의 거장이 부족한 게 문제라기보다 아담 맥케이 같은 감독이 부재한 게 진정한 문제다. 심지어 나는 관습적인 서사적 장치를 왜소화하는 형식주의를 극한의 경지로 밀고 나간 페드로 코스타의 <행진하는 청춘>이 영화사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도 그렇게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국내에서 비평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영화 감독 중에 아담 맥케이처럼 능청스러운 유머 감각과 저널리즘적 집요함을 가지고 동시대의 문제를 정면돌파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주13) 그 저력의 부재가 바로 홍상수처럼 기껏해야 프레임과 편집의 관습이나 기억의 자기동일성을 조작하는 형식적 장난질을 치는 것밖에 혁신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경직된 발상과 비평적 타성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가.(*주14) 그런 타성이 <컨버세이션>과 같은 범상한 결과물을 보고 “모더니티의 충격”(*주15) 이라는 과장된 수사를 내뱉게 한 것은 아닌가. 그게 바로 오늘날 한국의 서사 예술이 최근의 경향신문의 「“노조 왜 해?” 물으신다면」 기획 기사나 KBS 시사기획창의 <이대남 이대녀>와 같은 다큐멘터리나, 전혜원 기자의 걸작 르포르타주인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과 같은 과감한 저널리즘을 접하는 게 차라리 훨씬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동시대의 복합적인 현실을 비추는 역량을 상실해가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컨버세이션>과 그에 대한 비평을 보면서 떠올린 몇 가지 생각을 다소 길게 이어 나갔다. 물론 김덕중 감독의 말마따나 무슨 영화를 찍을지는 본인의 자유에 달린 일이고, 제작의 선택지가 열악한 여건에 따라 불가피하게 축소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어떤 예술가가 지금까지 강조한 대화의 전략, 유머감각이나 면밀한 취재 정신이 결락한 일상적 상황만을 비추는 방향을 고수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는 일상적 대화를 ‘따사롭게', ‘오롯이' 포착하는 게 무슨 대단한 미덕으로 간주되는 시기는 끝난지 오래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첫 작품인 <에듀케이션>에서 그런 미덕에 경도된 예술가라고는 할 수 없을 역량을 보여준 김덕중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테다. 사실 김덕중보다는 <컨버세이션>에 하나마나 한 호평을 남긴 평론가들이 그 점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하기사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비평도 이렇듯 하나마나 한 말들로 이뤄져 있는 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주
1)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2』,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22.
2) 손시내, 입에 달린 욕망, 『웹진 리버스』, 2021.02.04. http://reversemedia.co.kr/article/554.
3) 이런 말을 하면 <컨버세이션>이 대화를 열거하는 것 외에도 이런저런 형식적 장치들을 운용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텐데, 그런 주장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뒷부분에 가서 논박하겠다.
4) <우연과 상상>은 121분, <컨버세이션>은 120분이다.
5) 유운성, 파편들 사이에서 말하기, 2020.02.06.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20/02/blog-post.html.
6) 김혜진, 『9번의 일』, 한겨레출판, 2019.
7) 자연스럽게 하룬 파로키가 <110년간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사에서 최초의 카메라는 공장을 향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세기 후, 영화는 공장으로 거의 이끌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장으로부터 추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동 또는 노동자들에 대한 영화는 주요 장르가 되지 않았고, 공장 아의 공간은 사이드라인에 남아왔다. 대부분의 극영화는 노동이 뒤에 남겨지는 삶의 부분에서 일어난다.” Harun Farocki “Workers Leaving the Factory,” in Nachdruck/Imprint: Text/Writings, Laurent Faasch-Ibrahim(trans.), New York: Lukas & Sternberg, 2001;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에서 재인용.
8) 김덕중 감독 본인이 그랬다고 밝혔다; 김태현, 안민정, [인디즈 기획] <컨버세이션> 김덕중 감독 인터뷰: 영화를 이루는 마음, 2023.02.23. https://indiespace.kr/5842.
9) 마르셀 프루스트, 위의 책.
10) 김형석 저널리스트가 네이버 영화에 남긴 20자평. 나는 김형석이 이 문장을 쓰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일상도 이러한 파편적 대화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데 손모가지를 걸 수도 있다.
11)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나무연필, 2018. 물론 엄기호는 이 책에서 고통을 “심리학화"하는 접근 못지않게 고통을 성급하게 “사회학화”하는 태도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12) 이동진 평론가가 네이버 영화에 남긴 20자평.
13) 최근에 공개된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바로 이런 점에서 탁월한 작품인데, 이용철 평론가는 이 영화의 2부가 다소 작위적이라는 점을 근거로 별점 6점을 주고, <컨버세이션>에는 별점 8점을 줬다. 이런 당황스러운 배리가 바로 내가 이 글에서 지적하려는 문제인 것이다.
14) 이건 내가 의도하는 바를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과장을 가미한 말이다. 나는 홍상수의 <도망친 여자>가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화 다섯 편 안에 들어갈 가치가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15) 이용철 평론가가 씨네21에 남긴 20자 평.
글쓴이. 김신(자유기고가)
종종 그림 그리고 글 쓴다. 진지한 얘기를 웃기게 하고 싶다.
blog.naver.com/sans_soleil
수신인 없는 편지: <206: 사라지지 않는> 리뷰 (0) | 2023.07.14 |
---|---|
다큐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 -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 (0) | 2023.05.25 |
거울 앞의 사람들 - 다큐 <장기자랑> 리뷰 (2) | 2023.05.25 |
영화의 최종 단계를 위하여 - 책 『눈에 선하게』 리뷰 (0) | 2023.05.25 |
<다음 소희>를 보고 난 다음 나는 - <다음 소희> 리뷰 (0) | 2023.03.14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