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란 없다. 이제는 그 어떤 소리 없는 것이 우리 안에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뿐이다." - 롤랑 바르트 (*주1)
사람의 뼈의 개수는 206개다. ‘온전한 유골’은 206개의 뼈로 구성된다. 3년 남짓한 한국전쟁 기간 당시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추정일 뿐이지만 최대 12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학살의 희생자들은 그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노무현 정부 당시 설립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희생자 유해 발굴을 주도했으나, 5년가량의 활동으로 유해 발굴을 끝마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던 유해 발굴이 와해되자, 시민들이 민간발굴단을 자처하고 나섰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짧게 줄여 ‘시민발굴단’인 이들은 유해발굴 전문가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완수되지 못한 과업을 이어가기 위해, 피학살자였던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린 시절 목격한 국가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혹은 단지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이들은 시민발굴단으로 활동한다. 허철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2021)은 시민발굴단의 활동을 기록한다.
다만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시민발굴단이 아니다. 물론 허철녕 감독의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은 전국 곳곳에서 발굴작업을 이어가고 발굴된 유해를 맞추어보며 206개의 뼈를 지닌 온전한 유해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시민발굴단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민발굴단에 참여한 개개인의 사연을 파고들지 않는다. 그들이 발굴단에 참여한 동기나 계기를 물어보는 간략한 인터뷰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 밖에 그들의 개인사에 관한 언급은 많지 않다. 정작 허철녕 감독이 직접 녹음한 내레이션이 향하는 대상은 영화 내내 등장하지 않는다. 편지처럼 써내려간 내레이션은 감독의 전작 <말해의 사계절>(2017)의 주인공 김말해 할머니를 향한다. 밀양 송전탑 투쟁을 기록한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밀양, 반가운 손님>(2014)에 참여한 허철녕 감독은 투쟁에 동참하고 있던 말해 할머니를 만난다. 감독은 그의 개인사를 듣게 된다. 보도연맹 학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며, 현재는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할머니의 삶. <말해의 사계절>은 그러한 김말해의 삶을 특정한 사건에 가두는 대신 역사를 받아내는 존재자로서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206: 사라지지 않는>은 민간인 학살에 관한 말해 할머니의 기억을 들은 허철녕 감독이 SNS에서 우연히 시민발굴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감독은 이 영화의 첫 관객으로 말해 할머니를 생각했다고 한다.(*주2) 한시라도 빨리 영화를 완성해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이 영화를 만든 동기였다. 하지만 말해 할머니는 영화가 한창 제작 중이던 2019년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발족부터 지금까지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뉴스 보도와 정치인들의 발언을 들려주며 시작된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성공의 역사입니다. 왜 과거가 미래의 짐이 됩니까?”와 같은 말들. 이 말들은 말해 할머니를 비롯한 학살 피해자와 유가족의 존재를 ‘정치적 의도를 품은 것’으로 취급한다. <206: 사라지지 않는>이라는 타이틀이 지나가고 영화의 첫 장면이 등장한다. 관객은 땅속에 파묻힌 유해의 시점으로 시민발굴단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어서 들려오는 감독의 내레이션은 말해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다. 사실 이 영화 전체가 말해 할머니에게 보내는 허철녕 감독의 편지라 해도 무방하다. 수신인이 부재한 편지, 이 형식이야말로 시민발굴단이 보여준 행동의 본질이나 다름없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다양한 유가족과 활동가의 얼굴을 보아왔다. 이들은 사회적 참사, 국가폭력의 희생자, 산업재해 등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쓴다. 영화에 담긴 시민발굴단의 활동들은 종이와 펜 대신 흙과 삽으로 쓴 편지다. <206: 사라지지 않는>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발굴된 무수한 유해가 뼈의 종류별로 분류된 모습이다. 발굴현장의 흙더미처럼 쌓여 있는 유해들은 206개로 구성되어야 하는 한 사람의 온전한 유해를 이루지 못한 채, 마치 한 덩어리처럼 쌓여 있다. 각자의 육체로 각자의 기억을 품고 살아갔어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 파묻힌 땅과 같은 색의 유골이 되었다. 변색된 유골이 206개의 온전한 유해로 맞춰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여러 이유로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은 유실되거나 파손되었으며, 한데 뒤엉켜 있던 유해를 퍼즐처럼 맞춰본다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 시민발굴단이, 그들을 기록하는 허철녕 감독과 그 결과물을 지켜보는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편지쓰기’라는 애도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영화 내내 내레이션 속 편지글의 수신인이었던 말해 할머니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등장한다. 집의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할머니의 모습만이 페이드아웃되며 사라진다. 허철녕 감독은 수신인의 부재를 알고 있음에도 편지를 쓴다. 누구의 유해일지 모를 뼛조각들을 발굴하고, 그것이 206개의 온전한 유해이길 기도하는 시민발굴단의 모습도 이와 같다. 아산에서의 발굴이 끝나고 진행된 유해 안치식에서, 시민발굴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박선주 교수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략) 찾아드렸어야 했는데…. 위로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말과는 다르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몸소 실천해왔다. 국가폭력에 의해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제대로 기록되지도 위로받지도 못했다. 유해발굴은 그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위로하고, 흩어진 육신의 조각을 되찾아주는 일이다. 이들이 발굴한 것은 뼛조각일 뿐 아니라 진실이자 정의다. 닿지 못할 편지를 쓴 허철녕 감독처럼, 시민발굴단은 온전한 유해를 찾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편지쓰기와 발굴, 서로 다른 두 행위는 <206: 사라지지 않는> 속에서 조응하며 진실과 정의, 진정한 위로로 나아간다.□
p.s. <206: 사라지지 않는>과 비슷한 시기 개봉한 황윤의 <수라>(2022) 또한 국가권력에 의해 삶이 파괴된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은폐된 진실과 정의를 찾아 자발적 모임을 조직해 활동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오랜 촬영기간을 거쳐 마침내 관객을 찾은 두 영화가 보여주는 성실함, 더 나아가 두 영화가 담아낸 시민발굴단과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활동은 그 자체로 강력한 동기가 된다. 무엇에 대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그들의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하고 싶게 만든다는 것.
*주
주1.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김진영 역, 걷는 나무, 2018. <206: 사라지지 않는>의 영화제 버전은 이 문구를 자막으로 띄우며 시작된다.
주2. "[인터뷰] 유해 발굴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주목한다, ‘206: 사라지지 않는’ 허철녕 감독" cine21.com/news/view/?mag_id=102961
글쓴이. 박동수(ACT! 편집위원)
영화평론가. 보고 읽고 씁니다.
다큐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장윤미) - <보라>의 끝과 <파산의 기술>의 시작 (0) | 2023.07.14 |
---|---|
한국 독립영화의 모험과 도전– 『이방인들의 영화』 리뷰 (0) | 2023.07.14 |
다큐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 -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 (0) | 2023.05.25 |
타성에 젖은 대화. 그리고 그 타성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영화 <컨버세이션>을 보고 (1) | 2023.05.25 |
거울 앞의 사람들 - 다큐 <장기자랑> 리뷰 (2) | 2023.05.25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