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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의 차이는 없다 - 다큐 <작은새와 돼지씨>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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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3. 1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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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4호 리뷰 2023.03.30]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없다

- 다큐 <작은새와 돼지씨> 리뷰

 

최현수(프리랜서 에디터)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무엇인 것 같아?’ 영화를 찍는 딸의 물음에 시를 쓰는 아버지 돼지씨는 ‘차이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종이 한 장이기 때문에’라고 답한다. 종이 한 장.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에서 종이 한 장의 차이는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반도체나 항공 기술에서도 티끌 같은 오차는 심각한 오류를 유발할 만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김춘나(작은새)와 시를 쓰는 김종석(돼지씨) 부부는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치 경계를 구획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김새봄 감독의 <작은새와 돼지씨>(2021)를 보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을 이 ‘종이 한 장’의 의미에 골몰했었다.

 

‘종이 한 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종이의 특성을 고려해야 했다. <작은새와 돼지씨>에는 비유적인 표현 외에도 물질로서의 종이가 자주 등장했다. 아버지는 담배 박스와 전단 뒷면에 시를 썼고, 어머니는 스케치북과 노트에 그림을 그렸으며, 두 부부는 젊은 시절부터 줄곧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시, 그림, 편지라는 서로 다른 형식은 모두 종이라는 동일한 질료로부터 시작됐다. 질료는 형상이 기입되는 순간 잊히기 때문에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형상이든 덧씌울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의미한다.

 

한편, 종이는 쉽게 찢어지는 유약함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은새와 돼지씨>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특정 시구는 귀퉁이만 남기고 유실되어 원문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종이는 시간이 지나면 누렇게 변하고, 물이라도 닿는 날에는 울퉁불퉁하게 울어버린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태껏 보관했던 글들은 죄다 지난 태풍 때 젖어버려 쭈글쭈글하게 울었고, 두 부부가 과거에 작성했던 연애편지는 누렇고 찢어진 모습에 한눈에 봐도 낡고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에도 언제든 잊힐 수밖에 없는 질료의 특성, 언제든 소멸할 위험이 있는 유약함. <작은새와 돼지씨>에서 제시된 종이가 지닌 물질적 특성은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길만큼 옅은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 <작은새와 돼지씨> 스틸컷 (출처: 필름다빈 홈페이지)

 

 

앞서 언급했던 ‘아마추어와 프로’의 이분법을 제외하더라도, <작은새와 돼지씨>에는 대립항으로 나눌 수 있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가령, 두 부부의 시와 그림은 텍스트 - 이미지의 이분법을 유도할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의 창작 행위를 나타내는 쇼트들이 지속해서 그들의 노동을 나타내는 쇼트와 병치된다는 점에서 노동과 예술을 분리할 수도 있다. 혹은 대상으로서 프레임에 등장하는 부모와 관찰자로서 카메라를 든 딸의 관계를 구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작은새와 돼지씨>는 각 요소가 대립하는 등의 도식이 전혀 유효하지 않다. 낡고 헤진 종이에만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 딸의 물음에 아버지는 ‘글을 쓰는 사람은 테두리에 얽매이기 싫어한다’라고 답한다. 오히려 이런 방식의 분류법은 이 영화가 견지하는 태도에 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은새와 돼지씨>는 그의 말처럼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순찰 업무를 돌면서 아버지가 썼던 ‘그림자’라는 시가 소개될 때, 집 안 화초에 물을 주며 어머니가 그린 식물을 담을 때, 분명 영화는 노동과 예술의 현장을 교차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몽타주는 ‘노동으로서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노동’ 등의 고정적인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작은새와 돼지씨>는 노동과 예술을 분리하여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없다. 두 부부가 일을 하고 창작하는 행위는 별개의 요소가 합치되는 것이 아닌 연속적으로 살아온 삶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 <작은새와 돼지씨> 스틸컷 (출처: 필름다빈 홈페이지)

 

 

이런 방식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은 두 부부의 예술을 담아내는 영화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김종석과 김춘나의 합동 전시회 장면을 살펴보자. ‘어머니와 시계 소리’라는 시를 아버지가 낭송할 때, 여러 종류의 시계가 탁자 위에 올려진 이미지가 먼저 스크린 위에 등장한다. 어머니가 그린 작품 ‘동해바다’는 반대로 그림이 등장하기 전에, 다른 작가의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그녀의 언급을 먼저 덧붙인다. 분명히 시는 이미지를, 그림은 텍스트를 선행하면서 두 예술의 속성은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이번에도 두 영역을 구분하여 새로운 의미 작용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번 전시회를 두고 “이게 세상 살아가는 이유인 것 같다. 여러분과 나의 얼굴을 맞대는 이유인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두 부부가 개최한 전시의 목적은 바로 대면에 있다. 그들에게 시와 그림은 삶을 풀어내는 방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방식 너머의 그들이 겪어온 생의 궤적을 서로 바라보는 데에 있다.

 

카메라를 든 딸 김새봄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삶을 대면한다. 하지만 그녀가 온전하게 부모의 삶을 관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야말로 그 삶에 깊게 관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카메라 밖에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집 중앙에 삼각대를 두고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지만, 도저히 프레임 밖에만 머무는 관찰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새봄은 30년 전 유치원 장기자랑에서 멜로디언을 부는 자신이 담긴 홈비디오를 <작은새와 돼지씨>의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에도 그녀는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고, 전시회를 진행하는 등, 가족의 일부로 프레임 위에 직접 모습을 보인다. 김새봄은 카메라를 든 시선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포착하려는 대상의 일부가 된다.

 

<작은새와 돼지씨>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중첩되고, 교차하며, 경계를 벗어난다. 이 과정에서 <작은새와 돼지씨>는 특정 범주의 영화로 정의하기에 조금씩 엇나가는 틈이 생긴다. 가령, 예술의 영화라고 명명하기에는 이 영화는 예술의 범주를 정하는 데에 관심이 없고, 노동의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노동의 장면이 너무 적게 제시된다. 김새봄의 에세이 필름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작은새와 돼지씨의 삶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다큐멘터리라고 보기에는 인물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작은새와 돼지씨>는 노동과 예술, 에세이와 다큐멘터리, 시와 그림 그 어느 것의 영화라고 규정하는 데 실패한다. 대신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모든 요소와 일정 부분 맞닿는다. <작은새와 돼지씨>가 걸쳐있는 삶의 각 요소는 그들을 구분하고 있는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 <작은새와 돼지씨> 스틸컷 (출처: 필름다빈 홈페이지)

 

 

그리고 <작은새와 돼지씨>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한 경계를 찢고 끝내 삶의 총체를 다루는 데 성공한다. 김춘나와 김종석의 전시가 끝나고 세 가족은 근처 바닷가로 나들이를 떠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닷가에서 작은새와 돼지씨는 바닷물에 몸을 담근다. 이윽고 흥이 난 돼지씨는 우산을 던진 채 파도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는 ‘이것이 인생이로다’라고 외친다. 그런 돼지씨를 담기 위해 딸 김새봄도 카메라를 들고 파도에 발을 담근다. 작은새도 수줍지만 흥이 넘치는 표정으로 비 내리는 파도 위에서 춤을 춘다. 그 순간 카메라는 더 이상 김새봄의 손에 들리지 않았다. 내내 대상으로서 프레임 위에 머물던 돼지씨가 카메라를 들고 춤을 추는 모녀를 잡는다. 그는 프레임 밖에서 경상도의 민요 ‘쾌지나 칭칭 나네’를 부른다.

 

카메라를 바꿔들기는 실로 쉬운 일이었다. 그저 손에서 손으로 카메라를 건네주면 된다. 대상과 카메라를 가로막는 경계는 ‘종이 한 장’보다 얇았다. 기꺼이 손을 뻗어 경계를 허무는 순간, 삶은 분절된 요소들의 배합이 아닌 총체적이고 연속적인 유기체가 된다. ‘인제 그만 꺼라’라고 말하는 돼지씨의 말로 영화가 멈춘다. 이는 관찰자로 질료로 존재하는 카메라의 추가적인 개입이 필요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작은새와 돼지씨>에는 개념과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는 세 사람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흔적이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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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최현수 (프리랜서 에디터)

붕괴하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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