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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마이 프렌즈>, 퀴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거리감을 드러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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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12. 1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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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마이 프렌즈>는 정상성의 벽 앞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는 퀴어의 파편화된 경험의 기록이자,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떠올리는 다큐멘터리 작가의 기록이다. 자주 슬프고, 자주 감동적이다."

 

[ACT! 133호 리뷰 2022.12.22]

 

<퀴어 마이 프렌즈>, 퀴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거리감을 드러내기

 

김태현

 

햇빛이 가려진 지하철 창문 너머로 어두컴컴한 도시가 지나간다. 바깥의 풍경은 똑바로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녹화 중임을 의미하는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 창문에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침내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실내를 밝히고, 외부의 풍경이 카메라의 렌즈 안에 들어온다. 첫 장면이 보여주듯, <퀴어 마이 프렌즈>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연출자 아현을 숨기는 법이 없다. 그는 매 순간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다큐멘터리의 대상인 강원과 함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자신이 바라본 세계에 대한 고민을 밝히고, 가끔은 다큐멘터리의 결말을 상상하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기독교 모태신앙을 가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군에 입대한 게이 친구 강원을 알리는 것은 <퀴어 마이 프렌즈>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다큐멘터리의 촬영 시점을 기준으로 강원의 커밍아웃은 아현과 주변 친구들에게 새로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관객 또한 퀴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그들을 수용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다. 강원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아현의 제안을 듣고는나한테 영화로 만들만한 이야기가 있어?”라며 되묻는다. 아마도 그 질문은 자신의 정체성을 편안히 밝힐 수 있는 아현에 대한 친밀함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아현은 이미 강원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있고, 두 명이 함께 속해있는 공동체의 사람들은 강원에게 차별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나는 게이 감성 좋은데?”라는 장난 섞인 친구의 말이 얼마나 올바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강원에게함께라는 기분을 충분히 안겨주고 있다.

 

그렇다면모태신앙으로 자라며 동성애는 죄라고 배웠는데, 강원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아현의 질문은 강원의 퀴어 정체성을 수용할 수 있느냐는 고민이 아니라, 퀴어 정체성을 가진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함께 해보려는 우정의 고민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타인의 삶을 매체 안에 담는 행위인 다큐멘터리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다큐멘터리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전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퀴어 마이 프렌즈>는 당신의 삶을 소재가 아닌 존재로 그리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필요할지 고민하는 여정이 된다. 카메라는 강원과 아현 사이에서 무엇을 담아내고 있을까.

 

아현의 카메라에는 인물들을 둘러싼 우정의 공동체가 담긴다. 함께 웃고 떠들고, 선물을 교환하고, 밥을 먹는 사람들. 사랑을 말하고 꿈을 이야기하는 순간들. 공동체의 풍경은 따뜻하다. 그 풍경은 언제나 기록으로 남는다. 친구들은 매번 거울 앞에서, 혹은 카메라 렌즈 앞에서 순간을 남긴다. 하지만 카메라에는 언제나 세계의 풍경이 함께 담긴다. 결혼식은 지인을 축하하는 마음과는 별개로상상할 수 없는 행복의 모습을 남기고, 퀴어의 존재를 세계에 가시화하는 퀴어축제에는 언제나 혐오 집회의 소리가 흘러들어온다. “동성애는 죄라고 말하는 혐오 집회의 시끄러운 소리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파티의 시간까지 이어진다.

 

강원은 언제나 공동체를 믿는다고 말하며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지만, 공동체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감각이 남아 있다. 두 풍경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감각은 퀴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의 풍경이 여기 있지만,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세계의 풍경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함께하는 따뜻한 풍경과 혐오 집회의 풍경은 다른 땅의 일이 아니다. 아직 인물들의 말로 전해지지 않았지만, 파편화된 세계의 모습은 언제나 퀴어가 바라보는 풍경 속에 그려지고 있다. 그 모습을 카메라가 담아낸다. 그리고 아현의 내레이션은 매번 강원을 떠나보낸 풍경 앞에서 등장한다.

 

 

▲영화&nbsp; < 퀴어 마이 프렌즈 >&nbsp; 스틸컷 .&nbsp; 출처 :&nbsp;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

 

아현은 강원의 곁에서 자신이 바라볼 수 있었던 두 풍경의 충돌을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질문한다. 강원은 독일로 떠나게 되고, 한국의 풍경에 혼자 남은 아현은 자신의 상태를 떠올린다. 정상성의 풍경 속에서어른이 되어야 하는 나이에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통해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강원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한다. 정상성이라는 높은 벽은 퀴어에게만 체감되는 것은 아닐 테고, 아현의 동질감은 일면 그럴듯해 보인다. 오히려 아현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강원이 자신보다 온전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퀴어의 삶에서 경험되는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강원은 주저앉게 된다. “세상과 나 사이는 너무 멀어서 눈물이 난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세계의 정상성으로부터 승인 받지 못한 퀴어의 문제는 이야기의 층위에서도 가시화된다. 그의 말처럼 퀴어 정체성은 그의 전부가 아니지만, 세계로부터 승인 받지 못하는 단 하나의 문제가 된다. 병무청의 심리검사에서 젠더, 혹은 섹슈얼리티의 퀴어니스를 드러낸다는 것은잘못 답변한 것이 되고, 나의 존재가잘못이 되었을 때 세계의 풍경은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이자 가닿을 수 없는 먼 풍경이 된다.

 

강원과 아현은 카메라를 의식한 채로 대화를 나누어 왔다. 강원의 이야기는 한 공간에 두 명이 함께 있는 이미지를 지나, “이제 시작되나요?” 같은 말들을 지나, 인터뷰 형식으로 제시된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타인 앞에 서는 일과 비슷하다. 타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내어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조금의 연기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카메라에는 연기하고 의도하지 않은 순간들이 담긴다. 카메라가 담아내고 있던 강원과 세계와의 거리감이 강원의 입을 통해 제시된 이후, 아현의 카메라는 더 이상 무해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간다고 느끼는 강원은 자신의 상태를 어디까지, 왜 카메라와 당신에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묻는다. 여전히 퀴어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계의 풍경 속에서 카메라 또한 온전한 나를 보여줄 수 없는, 정상성을 체화한 두려운 존재가 된다. 각자가 세계의 압력에 답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통해, 강원의 경우 당당히 퀴어축제의 무대에 오르는 것, 아현의 경우 해피엔딩을 가진 다큐멘터리의 완결을 통해, 둘을 온전한 존재로 증명하려던 아현의 시도는 실패한다. 하지만 우정의 기록은 여기에 남아있다. 강원은 세계로부터 온전한 위치를 부여받지 못했지만. 아현의 풍경 속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리고 싶은 우정의 마음에서 출발한 아현의 카메라는 그의 의도처럼 강원과 아현을 완성된 사람으로 세계의 풍경 속에 기입하지 못하지만, 강원의 옆에서 함께 실패의 순간을 겪으며 퀴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거리감을 담은 기록이 된다.

 

 

▲영화&nbsp; < 퀴어 마이 프렌즈 >&nbsp; 스틸컷 .&nbsp; 출처 :&nbsp;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

 

강원은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국적을 포기한 남성이라는 이유로 취업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함께 나누던 우정의 풍경이 사라진다. 이곳에서 온전한 삶을 기대하던 강원과 아현은 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실패한다. 하지만 아현의 노력이 강원에게 닿는다. 당신의 풍경에 내가 있는 것처럼, 나의 풍경에도 당신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강원은 아현의 카메라를 손에 든다. 그리고는 아현을 바라보며빚을 갚는다고 이야기한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실패를 위로한다. 강원을 둘러싼 두려운 세계를 비추는 도구가 되어버린 카메라는 다시금 너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우정의 도구가 된다.

 

세계에 나를 내어 보이는 일은 나와 함께해줄 당신을 찾아 나서는 기대 섞인 일이지만, 나를 자신의 세계 바깥으로 밀어내는 사람들의 도마 위에 오르는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온전한 나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나는 당신의 색안경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 사회 정상성 바깥에 위치한 퀴어에게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카메라로 타인을 기록하는 행위는 그의 모습을 다른 이들의 시선에 그대로 내어 보인다는 점에서 두려운 일이 된다. 다만 영화는 카메라를 든 연출자의 시선과 피사체의 곁을 지키며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된 감각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다. 퀴어의 자리를 정상성 속에 기입하는 일은 한 편의 영화가 할 수 없다. 대신 여기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한 명의 사람이 왜 한국이라는 풍경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상할 수 없어야 하는지 관객에게 질문할 수 있다. <퀴어 마이 프렌즈>는 정상성의 벽 앞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는 퀴어의 파편화된 경험의 기록이자,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떠올리는 다큐멘터리 작가의 기록이다. 자주 슬프고, 자주 감동적이다. 

 

 


 

글쓴이.김태현

영화 언저리에서 이리저리 떠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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