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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송환>의 이물감을 논함 - 다큐멘터리 <2차 송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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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12. 1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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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3호 리뷰 2022.12.22]

 

<2차 송환>의 이물감을 논함

 - 다큐멘터리 <2차 송환> 리뷰


윤아랑 (비평가)

 


당신이 나와 함께 새천년을 넘어온 사람이라면 Fucking U.S.A.라는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이른바 ‘안톤 오노 사건’의 여파에 편승해 대중적 반미 감정을 자극하고자 만들어진 이 노래는 내게 있어 (한일 월드컵 이상으로) 2002년을 기억하기 위한 주요 지표인데, 그것은 이 노래에 얽힌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5살의 나는 어디선가 이 노래를 접했다. 노래가 무얼 외치는지는 이해하지 못해도 “Fuck”이란 단어의 생경한 발음 하나는 마음에 들었던 어린 나는 당시 다니던 유치원에서 친구들에게 인사 대신 “안녕 뻐뀨뻐뀨”라고 말하곤 했고, 그런 행동이 반복되면서 “뻐뀨”는 원생들 사이에 유행어처럼 퍼져나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어린 내가 알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적잖은 흥분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만들기 시간에 자기가 쓴 동화를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치원 교사에게 원한을 품을 정도의 어린이였으니, 유행어를 만들었다는 의식은 보통의 자극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다 며칠 뒤 한 원생이 교사에게 “뻐뀨”를 해버렸다. 유행어는 순식간에 금지어가 되었고, “뻐뀨”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던 교사는 서늘한 목소리로 나를 따로 불렀다.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 외의 사람에게 쓴소리를 듣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이던 와중 들려온 교사의 (아마도 다른 교사와 나눴을) 짜증 섞인 말은 여전히 기이할 정도로 선명히 기억난다. “하다하다 이런 일도 생기고, 미국 놈들이 진짜 쓰레기들이네요.” 그가 왜 미국을 입에 올렸는지 이해하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2002년에 ‘미제’를 비난하는 것은 운동권들만의 행동은 아니었다. 어린 나에게도 그것은 분명히 지각됐다. TV를 틀면 ‘효선이 미순이 사건’을 다루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으며,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미국은 나쁜 나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분위기는 보편적인 수준에서 들끓어 심지어는 몇몇 보수 언론도 당시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싣곤 했을 정도였다. 한편 반대로 남북한의 관계는 북미 간의 삼엄한 대치 속에서도 거듭 진보했고, 그만큼 (당시엔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빨갱이’ 소리가 심심치 않게 귀를 때렸다. 요컨대 2002년은 반미와 북한이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문제다운 문제였던 시기였던 게다.

 

 

▲ 다큐멘터리 <2차 송환> 중 한 장면


<2차 송환>(김동원, 2022)을 거듭 다시 보며, 나는 이런 유년의 기억이 갑자기 엄습해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느낌을 자꾸만 받았다. 하지만 쓰고 나서 보니 이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소 있는 듯하다. 그 느낌은 단지 영화가 그 시대의 한복판을 직접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며, 또한 단지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문득 회상하는 일과도 상관이 없다. 이 말의 맥락은 영화의 시작을 여는 한 문장과 맞닿아 있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수평선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듯한 문제.


김영식을 비롯해 첫 송환에서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생활이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이 생활의 묘사에 있어 <2차 송환>은 <송환>의 후속편이라 하기 난감할 만큼 <송환>의 그것과 상이한 방법론을 취한다. 잠시 돌이켜보자. <송환>은 장기수들의 생활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동시에 영화의 감독인 김동원이 낯선 장기수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말 그대로 ‘배우고’ 또 그 기억을 반추하는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이런 이중성은 당대의 레드 콤플렉스를 돌파해 장기수들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시키려는 태도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편 <2차 송환>은 어떤가? <송환>의 촬영이 끝난 직후이기 때문에 제작진과 장기수들은 이미 친밀하며 (원래 <2차 송환>의 연출을 맡았던) 공은주는 질문을 던질 때 프레임-인 해서 장기수들의 바로 옆에 앉기도 한다. 게다가 언젠가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이른바 ‘1호선 광인’ 중 하나인 김영식의 사연이 구구절절하게 펼쳐지니, 이 영화에는 더 이상 심리적인 간극이란 없을 것만 같다. 한데 이상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오히려 이 노인들과 우리 사이의 넓은 간극이 더더욱 느껴진다. 어째서? <송환>에서 드문드문 제시되던 이야기들이 <2차 송환>에서는 좀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조선 인민’으로서 그들의 삶.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여서 주체사상을 공부하는 장면, “김정은 위원장님”이라는 호칭, 교회가 주최한 북한 인권 시위에 나온 여자들을 향한 김영식의 고함. 장기수들이 공은주 감독을 공주라 부르며 “딸처럼 귀여워” 할 때의 미묘한 불편함. <송환>에서도 조창손이 야유회에서 ‘김일성 찬가’를 부르다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2차 송환>의 이물감에는 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2022년의 영화로 우리에게 던져졌기 때문이다. 남한의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장면들, 곧 장기수들의 현실감각은 한없이 불편하고 시대착오적으로 비친다.


이런 이물감은 사실 장기수들의 현실감각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김동원이 미국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고백하는 애니메이션 장면을 떠올려보라. 지금 누가 ‘미제’를 말하는가? 누군가 말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미국과 북한은 어떤 대상이고 어떤 문제인가? ‘남북한은 같은 민족’이라거나 ‘미국은 사악한 제국주의 나라’ 같은 말이 엄연한 ‘문제’로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는 어렵다. 설사 이런 말들이 나온다 한들 그것이 통일에 대한 절대적 지지나 미국에 대한 절대적 거부로 이어지기는 더더욱 어려울 테다.


국가보안법에 따른 억압이 여전히 활발히 이뤄지고 있고, 미국의 손길이 뻗친 전쟁은 아직도 벌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2차 송환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이 문제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문제다운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럴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물론 문제 설정이 스스로로 인해 설득력을 잃고 진부해졌을 수는 있다. 더군다나 급격히 ‘극단화’되고 있는 오늘날 남한의 현실감각은 그런 문제들로 고개를 돌릴 여유조차 없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문제 설정을 넘어 문제 자체가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어쩌면 우리가 어느 정도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굴복하고 동조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당연하지만 ‘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은 ‘그 시대의 존재들은 사라졌다’는 말과 온전히 포개어지지 않는다. ‘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정확히 지시하는 바는 어떤 존재들이 서로와 맺던 관계 방식의 변화이다. 설령 어떤 존재들이 가시화되고 중요시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라고 해도 그 존재들은 여전히 ‘여기’에 있(을 수 있)으며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이 세계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와 어떤 관계의 대상은 아닌 것. (사변적 실재론에서 얻어갈 ‘사회적’ 교훈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이 자리의 맥락에서 그것은 잉여다. 구조의 외상적 실재(the real)도 아닌, 그저 역사의 주름 속에 접혔거나 그럴 위험에 처해있는 잉여. <2차 송환>은 그런 잉여가 된 문제와 존재를 우둔할 만큼 가감 없이, 그것의 이물감까지도 통째로 제시하고 있다.

 

 

▲ 다큐멘터리 <2차 송환> 중 한 장면

 


항상 실패를 끈질기게 직시하는 김동원은 여기서 이 이물감을 외면하거나 해소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 잉여들의 모습이 2022년의 영화로서 우리에게 던져질 때, 그것은 내용이 아닌 매개의 층위에서 다음의 (내기에 가까운) 질문으로 화하는 것이다. ‘<2차 송환>을 본 여러분은 장기수들을 (여전히, 그럼에도) 동지로 여기고 송환을 위해 연대할 수 있는가?’ (이쯤에서 전향 장기수인 마영주의 에피소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장기수들의 사상을 “학습 받은, 내면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김동원에게 항변하듯 ‘<송환>은 원인에 대해선 말을 안 한다, 수박 껍질만 겁나게 핥는다’고 말했던 김영식의 불만을, 김동원은 그런 이념을 여전히 삶의 태도로 삼는 자신을 직시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인 걸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이와 비슷한 질문을 품고 있는 양영희의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2차 송환>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것은 신기한 우연이다)


그런데 이 요청은 기묘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닿는다. 앞서 ‘던져진다’는 수사를 쓰긴 했으나, 사실 <2차 송환>은 “우리” 관객의 자리를 영화 안에 미리 비워 놓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프롤로그, 북녘의 자식들을 향한 김영식의 영상편지를 떠올려보자. 자식들에게 닿지 못한 채 리버스 숏 없는 숏에 그치는 이미지. 이때 몽타주의 불가능과 만남의 불가능은 등가 관계에 놓인다. 이런 식으로 몽타주를 이루지 못한 이미지들이 <2차 송환>에 빼곡하다. 북한을 촬영하는 것의 연이은 실패. 대답 없는 양쪽 정부. 2010년대의 반응 없는 시민들,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을 꼬집는 ‘평양 아줌마’ 김련희의 인터뷰.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별난 것은 역시 김동원 개인의 사적 회고다.

 

 

▲ 다큐멘터리 <2차 송환> 중 한 장면

 


김영식에게 어떤 고난이 가해질 때 김동원은 죽음으로 시작되는 자신의 가족사를 문득 풀어놓는다. 북녘에 가기를 갈망한 아버지와 북녘에 가기를 두려워한 어머니. “내가 북한에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셈이다”라는 다짐. 김동원의 회고와 장기수들의 삶의 교차는 분명 떨어져 있긴 해도 서로에 대해 유추 가능한 지점을 흩뿌려 놓는다. 하나 ‘조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북한 촬영 계획도 무산되었을 때, 곧 학수고대한 만남이 불가능해질 때 영화는 김동원의 이야기로도 김영식의 이야기로도, 혹은 (<송환>의 경우처럼) 겹쳐진 이야기로도 귀결되지 않는다. 이중으로 유예된 몽타주.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평행해 영화의 서사를 양쪽으로 잡아당긴다.


물론, 마지막 시퀀스에서 우리는 강력한 몽타주를 만난다. 일상적으로 투쟁을 이어가는 김영식의 숏과 영화를 완성하려는 김동원의 내레이션이 주어 없이 뒤섞이는 멋진 순간을 뇌리에서 지우기란 힘드리라. 하지만 이 몽타주는 서로 만나 “희망”을 이루는 게 아니라 “희망”을 고대하는 모습을 이루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할 수 있을 이 장면의 조건은 다름 아닌 부조화의 상태인 것이다. “희망적으로 끝맺고 싶었지만” 끝까지 공백으로 남은 영역. “희망”을, 몽타주를 이루기 위해선 무언가가 더 필요한 듯하다. 그리고 그 필요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바로 (몽타주의 부재로 인해 초대된) “우리” 관객이다.

 

 

▲ 다큐멘터리 <2차 송환> 중 한 장면

 


<2차 송환>을 한 편의 영화이기 이전에 몽타주를 이뤄 영화가 되고자 하는 파편들의 모음으로 바라본다면, 영화 속의 삶을 대면하고 가로질러 (영화와 역사 양쪽에서) 몽타주가 성립되도록 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관객인 것이다. 이는 법정의 배심원이 되는 일이 아니다. 이는 영화로 만난 잉여들을 하나의 ‘평면’에서 살아가는 동지로 삼는 연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2차 송환>이 Fucking U.S.A.가 울려 퍼지던 2002년의 재림을 촉구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또한 장기수들의 일상적 몸짓에서 게스투스를 촉발시키거나 그들의 존재 자체에 결부된 정치성을 회복하는 데에도 <2차 송환>은 관심이 없다.


반복건대, “장기수들을 (여전히, 그럼에도) 동지로 여기고 송환을 위해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2차 송환>에서 감지되는 강력한 바람이다. 직전의 <내 친구 정일우>에서 연대의 실패를 뼈저리게 직시했던 김동원은 이제 연대를 위한 방법을 고심하는 듯하다. 더없이 소박한 과업. 그러고보니 연대란 말은 동일성 없는 이들 사이에 최소한의 동일성을 만드는 일을 이르지 않던가? 물론 그렇기에 연대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 연대를 할 수 있는 관객은 아마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따라) ‘인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체계를 거슬러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서 권리를 갖는 주체. <2차 송환>은 관객들이 그런 ‘인민’이 되길 바라면서, ‘인민’으로서의 관객을 위한 자리를 영화 안에 비워 둔다. 여기서 연대는 재현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발생해야 할 관계다. 


글쓴이. 윤아랑

글을 씁니다. 책을 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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