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가족 안에서, 세상 밖으로 - 다큐멘터리 <가단빌라> 리뷰

전체 기사보기/리뷰

by acteditor 2022. 10. 5. 19:07

본문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멋대로 어지럽힌 가족의 역사 바깥으로 나와 효진이 스스로를 더 큰 세상 밖으로 놓아주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 나를 포함한 효진의 여러 이웃들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ACT! 132호 리뷰 2022.10.19]

 

가족 안에서, 세상 밖으로

- 다큐멘터리 <가단빌라>(2022) 리뷰

            

                                        나선혜

 

효진을 처음 만난 건 2019년이었다. 효진은 자살 충동을 겪는 자신을 고백했고, 원인을 세세하게 파헤칠 수는 없겠지만 그 충동의 기저에는 뿌리 깊은 가족의 불화가 자리한 듯했다. 효진은 복잡하고 미묘한 자신의 마음을 <자살도 할 기운이 있어야 할 수 있다>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로 제작했고, 영화를 만든 이후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은 효진을 보며 잠시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 효진이 자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장편 다큐멘터리를 구상하고 있다고 얘기했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나와 나를 둘러싼 가장 가까운 세계를 담아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작 기간이 당초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효진은 점점 지쳐갔고, 나는 그런 효진에게 밋밋한 응원의 말을 건넬 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효진은 <가단빌라>라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렇게 <가단빌라>를 접하게 되었다.

 

▲영화 <가단빌라> 스틸컷

 

전작인 <자살도 할 기운이 있어야 할 수 있다>와 비교했을 때, <가단빌라>는 큰 도약을 시도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연출자인 ‘나’의 자살 충동을 영화의 시작으로 삼지만, 그 전개는 사뭇 다르다. 전작의 경우 ‘가족으로 인해 주저앉은 나’를 중심으로 두고 전개되었다면, <가단빌라>는 이를 뒤집어 ‘나를 주저앉게 만든 가족’을 우선적으로 탐구한다. 가족의 평온한 일상과 지옥 같은 다툼이 영화 안에서 누적되면서, 느린 호흡으로 시작된 이 탐구는 꽤나 명확하게 ‘무엇이 우리 가족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가단빌라>는 가족을 해체시킨 주범으로 가부장제를 먼저 지목한다. 경제적으로 늘상 어려움을 겪어온 가족. 빚, 사채, 연대보증과 같은 무거운 단어들이 수시로 침범하는 가족. 가족의 모습을 이렇게 만든 자는 누구인가? ‘집을 몰래 팔아넘긴 할아버지’, ‘돈을 떼어간 뒤 돌려주지 않는 삼촌’으로 답을 단순하게 개인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팔아치우고 떼어가는 가족 내 남성들의 뒤에, 그들의 주머니를 끊임없이 채워주다가 소진되어 버린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단빌라>는 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모녀 3대의 결속이 가족 내 남성으로 인해 깨지고 흩어지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며, 가족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기울어진 권력관계임을 암시한다.

 

▲영화 <가단빌라> 스틸컷

 

하지만 <가단빌라>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가부장제를 떠받치고 있는, 현대사회의 가장 공고한 경제체제인 자본주의를 건드린다.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이익을 내는 데에 밝은 할머니의 말처럼 이 세상은 ‘집을 지어 성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는’ 세상으로, 영화는 자본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이 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단빌라>에서 자본주의는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가족 내 모든 구성원을 파고들 만큼 강력하다. 끊임없이 자본을 추구했지만 역설적으로 가난에 당면해 분해되어버린 가족은, 현재 살고 있는 가단빌라가 재개발 지구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소식에 다시 뭉치기 시작한다.

 

자본은 무언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지만, 쉽게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 가단빌라의 재개발이 거론되자 연출자인 ‘나’는 이 같은 자본의 두려운 특성을 감지한 듯하다. 가단빌라가 재개발이 되고 당장 ‘나’의 앞에 몇억이 떨어지게 되면, 긴 세월 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무언가가 너무나도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가단빌라가 재개발이 되고 가족들이 자본을 손에 쥐게 되면, 자본이 다시금 가족을 뒤흔들고 갈라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자살을 생각하는 나’는 자본이 몰고 오는 행복과 불행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자본에 휘둘리며, 사느냐 죽느냐를 끝없이 고민해야하는 걸까?

 

▲영화 <가단빌라> 스틸컷

 

‘나’는 이 질문에 뚜렷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애써 키워온 닭들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답을 대체할 뿐이다. 애지중지 키워왔지만 때가 되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할머니의 닭과 ‘나'의 목숨은 일맥상통한다. 그러기에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라는 이 두 가지 선택지에서 벗어나 이웃들에게 닭을 나눠주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꾸역꾸역 살아온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을 수용하면서, 앞으로의 ‘나’의 인생을 넓은 세상 밖으로 용감하게 흘려보내는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가단빌라>는 ‘나를 주저앉게 만든 가족’을 탐구하다가 끝내 ‘가족으로 인해 주저앉은 나’를 어루만지는 작품이다.

 

이제 영화의 바깥으로 나와, 효진은 영화의 ‘나’처럼 이전까지의 삶을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삶을 도모하고 있을까? ’이제는 스스로를 지우려 하지 않을 거’라는 영화 속 ‘나’의 다짐이 효진에게도 유효할까? 다큐멘터리 속 ‘나’와 현실의 나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가단빌라> 속 ‘나’와 효진이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게 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멋대로 어지럽힌 가족의 역사 바깥으로 나와 효진이 스스로를 더 큰 세상 밖으로 놓아주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 나를 포함한 효진의 여러 이웃들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글쓴이. 나선혜

여전히 다큐멘터리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