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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 말하는 얼굴들 - 영화 <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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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7. 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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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다>는 끝내 설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군다의 취약성과 고통으로부터 스스로 공명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얼굴은 연민을 유발하는 이방(異方)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정의를 요구한다."

 

[ACT! 131호 리뷰 2022.08.17.]

 

말 없이 말하는 얼굴들

- <군다> 리뷰

 

원정 (바로 VARO 대표)

 

  생추어리 (sanctuary 안식처, 피난처)는 착취당하거나 위험에 처한 동물을 구조하여 보호하는 시설이다. 한국에는 대표적으로 돼지 새벽이와 잔디가 살고있는 새벽이 생추어리가 있다. 지난 8월에 구조된 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꽃풀소 프로젝트도 현재 진행 중이며 곧 소 생추어리도 지어질 예정이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군다>는 노르웨이, 스페인, 영국의 농장과 생추어리에 살고 있는 농장 동물들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작은 문밖으로 얼굴을 내민 돼지, ‘군다가 자식을 낳는 장면을 천천히 클로즈업하며 시작한다. 여명이 밝아오고 아기 돼지들은 엄마의 등을 타고 문밖으로 나온다. 오물에 뒤덮인 축사가 아닌 곳에서 동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생경함을 준다. 카메라는 농장 동물인 돼지, , 소를 따라가며 우리를 미지의 안식처로 인도한다.

 

▲영화 <군다> 스틸컷 제공: (주)영화사 진진

 

  <군다>의 재현은 기존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비인간 동물만 등장하기 때문에 구술을 통해 현장성을 담보하는 다큐멘터리와 차이가 있다. 코사코프스키 감독은 디렉팅에 대한 질문 또한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의도디렉팅없이 동물들을 내버려 두었다.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저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고 한다. 텍스트와 내러티브 없이 의인화를 최소화하며 동물을 숨, 소리, 빛이 깃든 생명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점에서 <군다>의 재현은 도전적이다.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의 윤리적 관계 맺기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디어에서 비인간 동물은 대개 교훈적이고 감동을 주는 대자연으로 치환되고, 순수하고 귀여운 것으로 연출되거나,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된다. 하지만 <군다>는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이미지, 배경 음악, 동물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인간의 목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흑백 대비와 사운드만으로 화면을 이끌어가며 관객이 대상을 장악하듯 감상하는 것을 내려놓게 만든다. 색을 배제하니 분홍색 귀여운 돼지도, 현란한 닭도 볼 수 없다. 강렬하고 섬세한 자연의 소리와 빛을 통해 우리는 동물의 외모가 아닌, 그들의 존재를 체험할 뿐이다. 동물들의 일상을 보며 아름답다라고 느낄 수 있지만, 무어라 이름 붙이기 어렵다. 역광에 비친 보송보송한 털의 즉물적 촉감, 흙먼지 속에서 뛰노는 돼지들, 새끼의 다리를 밟는 어미의 모습 등을 매우 가까이 보여주며 심오한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카메라에 담긴 동물들의 언어와 몸짓은 대부분 인간이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군다>의 주인공인 돼지, , 소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주장하거나 선언하지 않을뿐더러 공적 공간에 있지도 않다. 이들은 수용 가능한 언어 체계로 포섭되지 않는 타자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르렁 그르렁. 꽤액 꽤액.”

서로 몸을 부대끼며 질척거리는

뿌드득, 푸드득.”

엄마의 젖을 빠는

낑낑

부스럭부스럭

나란히 누워 잠이 들며 쌕쌕

 

  여기서 관객은 생의 치열함, 적자생존이라든가, 목가적 풍경, 비건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떠한 것도 들을 수 없다. 동물들은 아직 언어와 이름이 없는 낯선 이들이다. 이 협소한 상태. 이들은 인간과 똑같은 동물이지만 우리와 같지 않다.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인간 동물들은 그 자리에 막연히 있다’, 움직인다. 빛이 있듯이. 어느 누구도 그들의 언어를 해독해 주지 않는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가?

 

  카메라의 위치와 태도를 보자. 보통 동물들은 인간의 접근에 놀라서 도망가기 일쑤이다. 하지만 <군다> 속 무거운 스테디캠의 렌즈는 풀에 가릴 정도로 (불투명해지기도 하면서) 낮은 시점으로 동물들에게 접근한다. 동물들은 카메라가 주위에 없는 것 마냥 불편해하지 않는다. 촬영팀은 동물들과 유대감을 쌓고 그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인내했다고 한다. 반복하고 연출할 수 없는 순간을 담기 위해 그들은 사전에 다양한 환경을 실험하고 원테이크로 동물들을 담아냈다. 감독은 이로써 카메라도 영화의 주인공이자 환경이 된다고 한다.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 사이에는 절대적 위계와 심리적, 사회적 거리감이 존재한다. 서로가 타자이기 때문에 마냥 융해되는 관계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사코프스키 감독은 동물들에게 더 섬세하게, 천천히, 부드럽게 다가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접근 불가능한 간극에는 신비가 자리하고 <군다>는 대상화의 딜레마에서 한 발짝 벗어나고 있다.

 

▲영화 <군다> 스틸컷 제공: (주)영화사 진진

 

  다음으로 닭들, 그중 다리가 한 개인 닭에 초점을 맞추며 신비는 장엄함으로 확장된다. 우리에서 나온 닭들을 마치 사냥에 나서는 사자처럼 묘사하며 닭에 대한 익숙한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이토록 닭을 가까이서 우러러본 적이 있었을까? <군다> 속 닭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땅에 발을 디디며 빛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감독은 닭은 멍청하지 않고, 생각하며, 감정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닭은 고기가 아닌, 자유를 느끼는 존재이다.

 

  동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상처받기 쉬운 얼굴을 하고 공동체 안에서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카메라는 상품 가치로만 매겨지던 농장 동물들의 얼굴을 다각도로 비춘다. 익명의 소 떼들이 얼굴로 현현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서 우리는 동물들이 모두 얼굴을 가진 생명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호소하고 표현하며 각각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진흙 목욕을 좋아하는, 비를 마시는, 코로 흙을 파는 것을 좋아하는, 빛에 예민한, 작은 파리에 반응하고, 서로의 꼬리로 파리를 쫓아 주는.

 
▲영화 <군다> 스틸컷 제공: (주)영화사 진진

 

  후반부에는 동물이 아닌, 육중한 바퀴와 날카로운 갈퀴를 가진 트럭이 농장으로 들어온다. 군다의 자식들은 무럭무럭 자라 몸집이 커졌다. 여느 때와 같이 일상을 보내고 있던 새끼 돼지들은 갑작스레 트럭에 실리게 되고, 엄마 군다는 이별을 겪는다. 이곳에도 인간의 모습은 없다. 피 한 방울 묘사되지 않지만, 카메라는 자식을 빼앗긴 군다의 표정과 몸짓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잔인해진다. 엄마는 자식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낑낑 울며 냄새를 찾고 격하게 몸을 흔든다. 트럭이 가는 방향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을 같은 자리를 맴돌고 또 맴돈다. ‘상실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이 떠오른다. 군다의 눈빛과 목소리, 몸이 말한다.

 

  군다는 처음 등장한 곳, 문안으로 조용히 돌아간다. 얼굴이 없는 검은 공간만이 남아있다. 1시간 30분 동안 생동했던 음성과 빛은 꺼지고 침묵이 있다. 군다가 머문 어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도 느끼는 존재이다.”

 

▲영화 <군다> 스틸컷 제공: (주)영화사 진진

 

  <군다>는 끝내 설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군다의 취약성과 고통으로부터 스스로 공명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얼굴은 연민을 유발하는 이방(異方)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정의를 요구한다.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 근거하고 있다.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얼굴에서 도덕적 힘이 나온다.”(*1) 윤리적 관계는 타자와의 완전한 동일시가 아니다. 문밖으로 나온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동물들의 얼굴을 마주하듯, 관계는 나와 다른 얼굴을 향해 열려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

1) E. Levinas, Totalité et Infini, 172

   


글쓴이. 원정 (바로 VARO 대표)

미술, 사업, 요리, 저술 등 다방면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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