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돌봐야한다. 그럼 비평가 하나를 키우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윤아랑은 그들을 하나하나 언급한다. 그중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이 있다. "비평을 쓰려는 이들이 속한 곳은 어떤 형식들과 어떤 사회적인 것들이 한데 공존해 때로는 서로 얽히고 때로는 한없이 멀어지는, 복합적이고 복잡한 우발성의 장이다.”(중략) 마을이 있으려면 아이들이 필요하다. 비평계가 있으려면 누구의 돌봄이 필요한가?"
[ACT! 131호 리뷰 2022.08.17.]
공동-동시 돌봄으로서의 비평
문윤기
2018년이었고 민음사에서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이 출판되었을 때였다. 제도로 크게 한탕 해먹은 사람이 제도에 대해 왈가왈부하다니, 세일즈 포인트를 바로 짚었지만 당시 나는 화가 많았고 뭔 소리든 전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읽긴 다 읽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고 제도에 대한 것만은 아니지만 제도에 대한 비평으로 1부를 여는 비평집이 나왔다. 이제 『당선, 합격, 계급』을 다시 훑어보니 그저 등단제에 대한 친절한 르포르타주로 느껴진다. 제도 비판의 열기가 비교적 사그라든 지금이라면 여유를 가지고 무슨 소리든 짚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식은 죽도 불어가며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까. 여기서 나는 이것을 윤아랑의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1부 제목, ‘몇 발짝 물러나서’의 뜻으로 마음대로 변형해 적었다. 인플루언서이자 가장 주목받는 20대 비평가라는 소개글은 등단 이후 그가 단 2년 만에 문화예술 비평에서 다룬 대상들의 범위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데이비드 린치론으로 시작해 서브컬쳐와 대중문화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큐레이팅. 윤아랑은 그가 자주 쓰는 수사와 닮아있다. 영화, 소설, 예능, 드라마, 만화라는 게걸스러운 대상들을 게걸스럽게 담아내기. 그리고 그들을 굴리는 게걸스러운 시스템. 윤아랑이 움직임을 개시하는 건 거기서부터다.
「네임드 유저의 수기」,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 그리고 표제가 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서 윤아랑은 영화 커뮤니티 네임드 유저에서 영화 평론가로 제도에 입성한 이력을 활용해 제도의 안과 밖(이라고 이야기되는 제도 안의 상이한 위치들)을 다룬다. 그러나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가 시도하는 것은 제도 안-밖의 동시적 상태, 다시 말해 비대칭적인 제도 안의 감각과 밖의 감각을 최대한 동기화시킨 상태에서의 사태 파악이다. 이것은 일견 불가해 보이는데 자신이 속한 상이한 비율들의 감각을 조율하는 건 그 안에서 그와 함께 조율되는 자신을 인지하면서 끊임없이 조정되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합당한 전략으로 경험의 흐름이 서술된다. 왓챠 활동에서의 좌절, 온라인에 의견을 열심히 게재했던 노력, 등단을 위한 계산된 투고 등을 증언하고 그것들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음을 고백하며 그가 입장에 공감하는 작가도 함께 언급된다.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에 인용된 「심한 말」에서 박서련 소설가는 상을 타고 나서 비로소 실력과 문학의 방향 대신 제도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제도를 통해 제도에 대해 발화할 용기를 얻는다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서 등장한 장강명 소설가도 채널예스에서 2021년 12월까지 연재한 「장강명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의 마지막 칼럼에 비슷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문학상 공모전 도장 깨기에 대한 질문에 그건 유명해지기 위해서였다고, 유명해져야 독자들이 읽기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이들은 다음의 문장으로 수렴된다. ‘독립적이기 위해 빌어먹는 게 아니라 빌어먹기 위해 독립적이어야 하는 것.’(*주1) 윤아랑이 보기에 이 딜레마라고 말하기도 뭣한 (또는 딜레마라는 무책임한 뉘앙스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폭력이 바로 제도다. “기존의 권력, 제도 바깥의 순수한 위치 점유는 불가능합니다.”(*주2) 어느 쪽에서 발화하든 기만이거나 순진함이 되는 죄악이 편재한 구정물. 그것은 경험 없이 경험에 대한 내레이션만이 끊임없이 중첩되는 전시장과도 같고, 거기서 제도 비판은 메아리치며 공회전한다. 이 난장을 톺아내려는 경험의 흐름에 대한 증언은 다분히 비주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문화 예술의 제도에 맞서는 건 (…) 또 다른 산업의 제도겠죠.”(*주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에 구정물을 묻히고 객관성을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최대한 조율해보기. 윤아랑은 이를 위해 어느 정도 비주관적이며 비객관적인 매체를 자임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주관성과 객관성을 모두 튕겨내는 장치로. 이렇게 나는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왔다.
카메라가 주요하게 언급되는 비평은 2부의 「수상쩍은 발명품의 매력—다니자키 준이치로론」과 3부의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이다. 다니자키론에서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다니자키의 페티시즘과 마조히즘에 연결되고,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에서는 장르 간의 관계를 지목하는 매개로 ARRI Alexa LF라는 촬영용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한다. 전자에서 카메라는 사고의 정합성을 교란하는 ‘비사유 이미지’의 기계 장치, 후자에서는 장르의 무의식, 영화의 자리를 대체하고자 하는 드라마의 르상티망마저 포착해내는 물적 토대다. 이처럼 그 역할이 판이해 보이는 와중에도 카메라가 공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양자의 경계에서 한쪽의 비율을 투과시키는 삼투막 기능이다. 요컨대 소설에는 영화의 기법이, 드라마에는 영화의 위상이 투과된다. 분단과 국가폭력을 다룬 「「모가디슈」와 분단의 짐」에서 ‘삼투’라는 테마는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모가디슈」에서 자동차라는 (비)장소를 통해 영화적 담론으로 성립되는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차창 밖을 보는 것,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차 안과 밖. 밖의 상황에 따라 자동차는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해 외부로 시선을 던질 수 있는 곳이 되기도, 외부와 아주 얇은 경계만을 두고 외부의 압력에 쉬이 노출되는 곳이 되기도 한다. 즉 안과 밖을 구분하는 유동적인 (비)장소로서의 자동차. 이런 유동성을 자동차에 부여하면서 류승완이 보려던 것은 안과 밖의 간극과 삼투, 곧 다종 다기한 방식으로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밖(혹은 밖으로 밀려 나가는 안)일 것이다. 이때 삼투되는 건 비단 태준기를 죽인 총알만은 아니다.(*주4)
윤아랑은 「모가디슈」에서 남북한 캐릭터들에게 과시적으로 삼투되는 국가 폭력을 본다. 그리고 「즐겁게 일그러지는 영혼—「가짜사나이」와 「대탈출」 사이의 진정성」과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다면」에서는 TV 예능에 투과되는 실재를, 「너무 접촉하거나 너무 떨어지거나, 혹은……—「킹덤: 아신전」을 위한 각주」에서는 스핀오프 상품에 투과되는 웹소설의 코드를, 「만화라는 이상한 관계—「인문학적 감수성」에서 시작하는 사고실험」에서는 만화에 투과되는 현실 동위적 존재들, 나아가 현실화하는 허구(예술작품)를 본다. 어떻게 그 모든 걸 보지? 아무리 비평가래도 그는 너무 많이 보는 사람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양이 아니라 그가 다루는 범주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지만, 너무 많은 볼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피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는 시제에는 쉬이 감당하지 못할 긴장과 무게감이 감도는데, 그건 이 시제가 우리의 ‘지금’을 대체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여기에서 ‘지금’은 ‘찰나’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지 않다.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만이 허락될 시간이 찰나라면, 우리가 어쩌다 보니 살아가고 있는, 과거와 미래의 흔적을 비롯한 온갖 조건이 혼탁하게 혼재된 시간이 지금이다. 찰나에 대해 생각하려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낀 바를 되풀이해야겠지만, 지금에 대해 생각하려면 어쩌다 이런 상태의 지금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되풀이해야 한다. 몇 겹으로 된 ‘자연스러움’을 몇 겹으로 문제시하기.(*주5)
‘게걸스러운 대상들을 게걸스럽게 담아내기’는 ‘몇 겹으로 된 ‘자연스러움’을 몇 겹으로 문제시하기’를 바꿔 적은 것이다. 윤아랑의 게걸스러움은 만화의 인터페이스처럼 동시다발로 쏟아지는 임의적 컨텐츠들을 맞아 ‘지금’을 사유하기 위한 응수로 보인다. 메타적으로 조망하는 자리를 거부하고 주체의 자리를 지키(*주6)(「정당화하는 관점」)려면 사람이 소화할 수 없을 만치 덩치를 불려 나가는 볼거리들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듯. 처음에 나는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이라는 제목을 보곤 소화기 내장 기관에서 보내는 신호를 떠올렸다. 화장실을 곁눈질하는 약간의 걱정과 염려가 뒤따르는.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의 ‘자신이 발을 담그고 있는 똥통, 세상이라는 똥통을 직시하고 긍정해야 합니다’라는 권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주체의 자유이기도 한 동시에 주체의 불안이기도 하다. 무사히 소화할 수 없는 것, 또는 소화하다 토해낼 것. 사르트르의 ‘구토’로 대표되는 실존적인 (비)존재 경험. 그러나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의 윤아랑은 당장 끊임없이 출몰하는 다종 다기한 볼거리들 속에서 (비)존재 경험의 분열 또한 직시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할 사람으로 보인다. 괄호의 안과 밖, 그 동시 상태에서. 이것을 이렇게 말해도 될까? 그는 ‘구토’의 사르트르이면서 동시에 사르트르를 배신한 장 주네다. 물론 이것은 과장이지만 관계없는 과장은 아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돌봐야한다. 그럼 비평가 하나를 키우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윤아랑은 그들을 하나하나 언급한다. 그중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이 있다. "비평을 쓰려는 이들이 속한 곳은 어떤 형식들과 어떤 사회적인 것들이 한데 공존해 때로는 서로 얽히고 때로는 한없이 멀어지는, 복합적이고 복잡한 우발성의 장이다.”(*주7) 그런 의미에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의 「감사의 말」은 책을 맺기에 완벽한 텍스트다. 서문의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끝없이 긍정을 말하고 싶다.”라는 긍정으로부터 예비된 명단들. 나도 이 글의 마무리를 준비하며 복잡한 여러 감정으로 참아왔던 이야기를 남긴다. 『당선, 합격, 계급』의 장강명 소설가는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무료 전자 서평집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출간했고 『한국 소설이 좋아서 2』를 구상하는 중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그는 배우자와 함께 독서플랫폼 ‘그믐’을 오픈했다. 마지막으로 바꿔 말해보자. 마을이 있으려면 아이들이 필요하다. 비평계가 있으려면 누구의 돌봄이 필요한가? □
*주
1) 윤아랑,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민음사, 53p
2) 앞의 책, 46p
3) 앞의 책, 47p
4) 앞의 책, 172p, 강조는 필자
5) 앞의 책, 235p
6) 앞의 책, 163p
7) 앞의 책, 263p
다큐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 하나도 사소하지 않은 우리들의 말하기 방식 (윤가현 감독) (0) | 2022.07.07 |
---|---|
말 없이 말하는 얼굴들 - 영화 <군다> (0) | 2022.07.07 |
나빠지지 않기 -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리뷰 (0) | 2022.06.07 |
연대의 장소를 찾아서 - <세월> 리뷰 (0) | 2022.06.07 |
다큐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 이 불안마저 마주할 때 - 다큐멘터리 <개청춘> 리뷰 (장민경 감독) (0) | 2022.06.0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