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본인이 의심이 많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근처 의심쟁이 친구들을 믿고 무턱대고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또, 반대로 자신이 정말 소년만화의 주인공만큼 확신이 넘치는 순간만 살아 왔다면 이제 한번 의심쟁이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자. 그런 방식으로 우린 가끔 영웅이 되고 자주 조력자가 된다. 의심하는 너와 나를 믿고, 확신하는 너와 나를 의심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두렵고 중요한 순간에는 그냥 아무 근거없이 믿어버리는 것."
[ACT! 130호 Me, Dear 2022.06.11.]
자기확신과 의심
서강범 (ACT! 편집위원)
USB 단자를 포트에 단번에 꽂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적이 잘 없다. 분명 옳은 방향을 고를 확률은 50퍼센트일텐데, 옳은 방향으로 시도를 해도 결국 실패를 경유해서야 성공에 도달하는 일이 훨씬 많은 건 왜일까. 얼마 전에는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을 하다가 진리로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는 게임 캐릭터의 대사가 눈에 들어왔다. 현생 인류가 멸망하고 새로 문명이 싹튼 세상에 사는 사람이 한 말이니 더 신뢰가 갔다. 하지만 걸음 가는대로 길이 된다면 그 길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했을 때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명제는 확실하지 않느냐'고 농을 던졌던 기억이 있다. 귀엽게 꿀밤을 맞기까지 했었다면 마치 명랑만화 속 한 장면처럼 상투적인 순간이었다.
USB를 한번에 꽂지 못하는 것이나, 서로 관계 없어 보이는 일화를 늘어놓으며 글을 시작하는 것 모두 자기확신이 부족한 사람이 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상투적인 결정과는 달리, 세상에는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는 이례적인 선택들이 있다. 보기 드문 것을 만들어낸 창작자에 대한 감탄이든, 현실을 당당히 외면하는 정치인을 볼 때의 경멸이든 우리의 반응과 관계없이 그 결정들은 강력한 자기확신을 동반한다.
그럼 확신은 왜 이례적이고 믿음은 희소한 자원일까. 그건 우리는 의심과 걱정을 타고 난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악의 미래를 걱정하고, 내린 선택을 후회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편의에 따라 발명되었으나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시간은 돌도끼나 다름없다. 자신이 만든 돌도끼에 베일 수 있듯 시간과 후회는 우리를 자주 다치게 하며, 지구상 인간만큼 자신을 괴롭히는 종은 많지 않다. 더군다나 요즘은 단언할 것이 사라진 복잡한 시대기 때문에 자기확신에는 최면에 가까운 유혹이 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안 죽고 남도 안 죽이면서 살 수 있을지, 굶어 죽지 않으면서 자아실현 할 수 있을지, 어제의 나를 혐오하지 않으면서 내일을 살 수 있을지 등 생의 모든 것에 딸려 오는 필연적인 불안에 다 체념하고 싶어질 때, 자기확신은 깜깜한 앞길을 비춰주는 횃불이 되어준다. 처음부터 자기확신을 체화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외부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그건 경험일수도, 율법일수도, 눈치일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곳에 둔 불이 주변의 것을 잿더미로 만들 듯, 그 강력한 믿음의 기반을 늘 외주주는 것은 조금 위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는 그 불을 혼자서 피우고 혼자서 꺼야 한다. 외주 준 믿음이 위험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모든 독재자와 학살자들은 외부에서부터 배양된 자기 확신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한 자들이었다. 폭군이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USB를 한번에 꽂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란 생각보다 아슬아슬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이 글에서 자기확신은 인간 행동의 지속적인 동기라는 쓰이고 있으니, 자기확신을 희망이라 번역하기로 하자.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하기로는 지옥의 입구에 '이곳에 들어서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한다. 희망의 부재가 곧 지옥이라면 희망은 어디서 올까.
지속가능한 자기확신이 외부에서 비롯되지 않듯이, 희망 또한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건 희망의 속성 때문이다. 희망(希望)의 한자를 풀어보면 바랄 희(希), 바랄 망(望) 두 글자로 구성돼있으니 두 번의 '바라다'라는 정보값 외에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바라고 바라는 것이 희망이라면, 외부의 근거지 없이 그냥 바라면 생겨나는 것이 희망이라는 뜻이겠다. 그러므로 희망을 갖고 싶다면 그냥 바라면 된다. 희망만을 동력으로 나아가는 태도는 서사 속 영웅의 태도기도 하다.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을 보면 때로는 역겨울 정도로 순진하고 목표지향적이다. 그리고 모든 영웅들은 조력자가 있듯이, 이 맹목적 자기확신을 지탱하는 것은 동료들이다. 일본 노래 가사 중 가장 흔한 구절 중 하나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하는데, 소년만화 대사에도 이 말은 적용되며, 실제로도 세상에 혼자인 사람은 없어야 하니 사실 이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다만 우리가 소년만화 주인공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앞서 말했듯 의심하기 위해 시간까지 발명한, 유약한 호모사피엔스이기 때문에 생득적으로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리고 의심이 많은 사람들 근처에는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본인이 의심이 많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근처 의심쟁이 친구들을 믿고 무턱대고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또, 반대로 자신이 정말 소년만화의 주인공만큼 확신이 넘치는 순간만 살아 왔다면 이제 한번 의심쟁이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자. 그런 방식으로 우린 가끔 영웅이 되고 자주 조력자가 된다. 의심하는 너와 나를 믿고, 확신하는 너와 나를 의심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두렵고 중요한 순간에는 그냥 아무 근거없이 믿어버리는 것.
글을 마치기 전 이 글의 수신자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음을 밝힌다. 난 이 글이 한 나라의 GDP 정도의 자산을 가진 기업가, 성공적인 IT 스타트업 창업자,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정치인, 종교 지도자, 구독자 만명 이상의 유튜버, 래퍼, 그리고 현재의 법과 규칙만이 정당한 윤리라고 생각하는 부류에게는 닿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확신을 이미 충분히 내면화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이 글에서 가져갈 말은 ‘이제는 의심을 해보라’는 말 밖에 없다.
동기부여 연설가들이나 할 만한 이 하나마나한 순환논리는 사실 지난 몇 주간 친구들과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런 말을 하고 다니니 사이비 종교의 교주같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다녔던 이유는, 그들이 이 말의 적합한 수신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주 원리로서 확신과 의심의 총량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에는 과하게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이 방기하고 있는 의심과 불안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도 있다. 이 글의 수신자는 바로 그들이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 글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율법이나 행동지침이 아니다. 이 글은 천박하고 납작한 세상에서 정교하고 다정한 정신을 유지하느라 소진되어 가는, 의심쟁이들에게 하는 제안이자 응원이다. 희망하자는 말을 하는 이유는 지금이 희망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글쓴이. 서강범
미디액트 창작지원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잘 웃고 잘 믿습니다.
서사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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