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웃어, 유머에

전체 기사보기/Me,Dear

by acteditor 2022. 1. 6. 19:21

본문

"나는 농담의 주체가 더 다양해지기를 바란다. 거대한 웃음 소리에 압도되어 소수가 몰래 불쾌함을 씹어야 하는 농담이나 모두가 승인할 수 있는 농담보다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좀처럼 불편함을 마주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비로소 불편해 할 농담을 바란다. <너에게 가는 길> 상영관에서 일어난 것처럼 고맥락의, 소규모의, 규명되지 않는 이상한 웃음을 바란다. 그리고 그 웃음이 만들어낸 균열 사이를 작은 무리들이 매워 그 무리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신호가 되길 바란다."

 

[ACT! 128Me, Dear 2022.01.14.]

 

웃어, 유머에

서강범 (ACT! 편집위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변규리 감독의 <너에게 가는 길>을 보았다. 상영 내내 극장 안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많이 들렸고 나 역시 영화가 끝나고 마스크가 축축해졌지만 예상치 못한 웃음도 있었다. 그 웃음 중 대부분은 영화의 스타인 나비님과 비비안님의 인간적인 매력과 유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외에도 기묘한 방식으로 웃음이 났던 장면이 있었다. 인천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시위자의 모습이 나오는 부분이었는데,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문장을 쉰 목소리로 반복해서 토해내는 한 남자가 화면이 비춰졌다. 말 사이에 간격이 없었기 때문에 그 문장은 의미를 담은 발화라기보다는 주술처럼 들렸고, 몹시 격양된 시위자의 모습은 마치 그 주술로 소환된 혐오의 정령같았다. 이질적이고 공포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극장에 있는 관객들은 왠지 웃음을 터뜨렸다. <너에게 가는 길>의 정식 개봉 후 한 상영관에서도 동일한 장면에서 관객들이 비슷한 반응을 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난 이 일화가 유머가 성립하는 중요한 조건을 보여주는 정교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이미지

 

  평소에 주변 사람을 웃기는데 이상하리만큼 많은 공력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유머와 농담의 조건이 늘 궁금했다. 그리고 모든 생산이 그러하듯 뭔가를 만드는 주체는 균일한 완성도를 보장하기 위해 공정을 패턴화, 체계화하고 싶기 마련이다. 망한 농담으로 장례식장 같은 침묵을 빚어냈던 몇 차례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적어도 찬물을 끼얹지 않는 정도의 농담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과정을 공유하고 싶지만 다소 저항감이 드는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로 젊음’, ‘청춘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젊음, 청춘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이렇게나 농담에 진심이라는 걸 밝히는 건 재치와 아주 동떨어진 일이라 민망하다. 둘째로는 나의 지난한 고민의 흔적을 모두 공유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고 역시 민망하다. 하지만 그 모든 민망함과 좀스러움을 뒤로 하고 무엇보다도, 유머의 매커니즘은 무척이나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유효한 만능 양념장 같은 것은 없어서 더더욱 명쾌한 조건을 공유하기 어렵다. 좋은 농담의 반대가 재미없는 농담이 아니라 실패한 농담이라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처참하게 실패한 농담을 하지 않는 법, 즉 유머가 성립하는 최저조건이 무엇인지 내린 결론 정도는 공유할 수 있겠다.

 

  흔히들 안전하기만 한 농담은 재미없다고 하지만, 실패한 농담은 유쾌하지 못함을 넘어서 그 공간의 여러 전제들을 의심하게 하고 오염시킨다. 결국 농담은 어떤 전제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농담은 어느 정도 내부자 농담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가는 길>의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을 수 있었던 것 또한 내부자 농담이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했다. 유머가 소비되는 특정한 공간은 아주 중요하다. 그 장면을 보고 웃었던 관객들 중에 영화관 바깥에서 혼자 저런 시위자를 직접 마주한다면 그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상영하는 상영관, 그리고 그 공간에 기꺼이 와서 영화를 보는, 특정한 문제의식과 전제를 공유한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공간이라는 맥락은 웃을 수 있는 최저 기준을 보장해준다. 그건 안전함’, ‘소속감같은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해학은 이례적인 것을 이례적이지 않은 것처럼 대하거나, 이례적이지 않은 것을 이례적인 것처럼 대할 때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전복적인 속성 때문인지, 농담은 동시에 일반적인 인식에 대한 조롱이나 냉소일 때가 많다. 그런 아이러니한 유머감각은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이 변했다는 균열의 징후다. <너에게 가는 길>의 상영관 안의 관객들이 웃은 것은, 너무 단단해서 깨질 것 같지 않았던 것이 사실은 별것이 아니었다는, 균열을 인식한 사람들끼리의 내부자 농담이자 냉소였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행동거지를 단속하는 가부장이나 흑인을 2등 시민 이하로 취급하는 백인은 조롱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차별적인 인식이 문제라는 합의가 없었다는 것은 곧 그런 인식이 침범받거나 공격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이제 저 대상들은 마치 한국음식의 마늘과 고춧가루처럼 현대 코미디의 오랜 재료 중 하나가 되었다. 농담은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이나 권력에 균열이 일어났음을 나타내거나 균열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파괴력을 지녔다. (하지만 주의하자. 현실의 권력 위계를 착각한 농담은 그저 인간관계만을 파괴할 수 있다.)

 

 

▲'웃어, 유머에' 곡이 수록된 이랑의 앨범 <신의 놀이> 커버

 

 

  모든 농담이 모두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거나 정치적으로 결백하지 않은 농담이 아예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머는 운동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람의 유머감각은 반동과 정동으로 딱 떨어지지 않고 어딘가 이상하고 음습한 것이 당연하다. 다만 농담을 하는 사람은 넓게는 자신이 발 딛고 사는 곳이 어떤 세상인지, 좁게는 농담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파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농담이 어떤 인식에 균열을 내는 공격일지, 평소에도 부당하게 범주화되거나 쉽게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그 공격이 향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는 있다.

 

  유머는 상투적이지 않은 통찰을 드러내거나, 절묘한 방식으로 정교하거나 둘 중 하나는 만족해야 성립한다. 농담은 그런 통찰과 순발력을 알아달라며 주변의 동의를 구하는, 다소 정치적이며 자기과시적인 행위다. 그러니 농담이 실패한다면 나의 심오한 유머감각을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억울함을 내려놓고, 웃음이 작동하는 기반을 아직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인정한 후 인간 의사소통의 정교함에 감탄하면 그만이다. 농담의 실패에 책임을 지는 것은 조각난 자기과시의 유리파편을 줍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당연히도 발화자의 몫이다. 본인이 줍지 않으면 누군가 다칠 수 있다.

 

  대단한 비밀을 공개하는 것처럼 시작해서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류의 비장한 문장을 나열했지만 이 글은 사실 고작 재치를 증명하려고 추해지지 말자는 자기반성이다. 그 자기반성에 조금의 바람을 더하자면, 나는 농담의 주체가 더 다양해지기를 바란다. 거대한 웃음 소리에 압도되어 소수가 몰래 불쾌함을 씹어야 하는 농담이나 모두가 승인할 수 있는 농담보다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좀처럼 불편함을 마주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비로소 불편해 할 농담을 바란다. <너에게 가는 길> 상영관에서 일어난 것처럼 고맥락의, 소규모의, 규명되지 않는 이상한 웃음을 바란다. 그리고 그 웃음이 만들어낸 균열 사이를 작은 무리들이 매워 그 무리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신호가 되길 바란다. 이건 운동의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농담 애호가로서의 바람이다. 우린 더 자주, 더 정교하게 웃을 권리가 있다.

 


 

글쓴이. 서강범

미디액트 창작지원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잘 웃고 잘 믿습니다.

서사를 좋아합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