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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22호 나, 미디어활동가] '찰나의 거장 브레송' 사진전 관람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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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22호 / 2005년 6월 30일

'찰나의 거장 브레송' 사진전 관람후기
 
허 경 ( 영상활동가, 민중언론 참세상 영상팀 )
 
1. 사진전
 
찰나의 거장 브레송 사진전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Henri Cartier-Bresson 사진전에 갔었다. 200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남겼던 많은 작품들이 전시된 이 사진전은 그의 생애와 고민의 흐름들을 관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애와 반자본주의적 정서를 근저에 깔고 예술과 저널리즘, 현실과 초현실이 충돌하는 듯 상호보완하며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는 사진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니 사진전의 컨셉이 뭐냐?"
이에 대한 답은 평생 만들어 가는 것이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영상활동가로서 내게 던져진 결정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것을 정리하여 '이 원고'로 유용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까지.

2. 예술이냐? 혁명이냐?
 
'평.생.운.동. 
존재 자체가 고통으로 다가오고 오직 세상과 사람들 속에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되면서 평생운동이라는 말은 항상 나에게 화두였다. 저항하는 것을 통해 내 존재의 많은 부분을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의 고민은 평생 동안 저항하며 살기위해 내게 적당한 무기를 선택하는 일에 닿게 된 것이다. 시를 생각했었고 전업활동가를 생각했었고 변호사자격증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20대의 9할을 보낸 후에야 겨우 영상을 선택하게 되었다.'
3년 전 쯤 미디액트에 제작지원을 신청하면서 함께 제출해야 했던 자기소개서의 시작이다. 저러한 고민으로 영상을 시작하게 된 나에게 내외에서 계속되는 질문이 있었으니 다소 일반화, 추상화하면 식상하지만 "예술이냐? 혁명이냐?".
생산되는 대부분 것은 '이윤'이 고려되어야 하는 이곳에서 '예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나에게 '혁명'은 '예술'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고 난 '예술'을 하고 싶기 때문에 '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현재 그 둘은 서로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예술이냐?혁명이냐?는 질문에 '나의 '예술적 행위'는 '혁명'을 위한 무엇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고 답하고 있다.
단지, 1초에 30장씩 찍어대는 '내 움직이는 사진'에서는 브레송의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양자의 조화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 큰 슬픔이고 숙제이다.

 
3. 영상운동이냐? 노동운동이냐?
 
존경하는 한 선배 다큐멘터리 감독이 나에게 물었다. "난 당신이 영상운동을 하려는 건지 노동운동을 하려는 건 지 헷갈려."
이 질문은 앞의 것과는 다른 것인데, 질문의 배경과 의도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너의 혁명을 위한 예술적 행위의 활동영역이 어디냐?'정도로 표현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대답으로 '비정규직완전철폐를위한영상프로젝트'를 소개하기 위해 썼던 글의 일부를 발췌하면,
'영상을 통해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 영상미디어운동의 목적 중 하나라고 한다면 발언의 파급력을 위해 주체의 조건을 탄탄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일 것이다. 즉, 현재 영상미디어운동의 물적기반을 어떻게 배치하고 운용할 것인가에 대한 전술이 있어야 하고 물적기반의 확충을 위한 전략을 구상하는 것도 영상미디어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부여된 역할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 없었다. 처음 '근골격계직업병'에 대한 교육용 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미디액트의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난 이것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는데- 미디액트의 정책적 활동과 문제의식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독립적 영상제작자들의 제작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정책과 이데올로기를 만들고자했던 노력이 없었다면 당시 내 작업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표류했을 지도 모른다.
난 매우 구체적인 제작과정에서 정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한독협 다큐분과 정책팀 활동으로 이어졌으며 고민의 폭이 확장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또하나, 정책은 실천적 적용과 서로 피드백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직접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은 항상 정책활동가들과 토론하고 소통해야 하며 어떤 때는 가장 뛰어난 정책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활력을 잃는다. 물론 이 역시 브레송의 사진같아야 할진대...
"하나의 움직임 속에는 그 동작의 과정에서 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 사진은 바로 이 평형의 순간을 포착해 고정시키는 것이다" 
-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서문에서 -

4.개인활동 -> 참세상 -> ?
 
난 현재 '민중언론 참세상'의 영상팀이다. 명함에 '영상기자'라고 인쇄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감독'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동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얼마 전에는 나보고 'VJ'라고도 했으며 이 글, 꼭지의 제목은 '나 영상활동가'다. 개인적으론 동지가 가장 듣기 좋지만 영상활동가가 가장 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워낙에 생동적인 현실운동과 함께 호흡하는 영상미디어운동을 고민한다면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독협 다큐분과 개인회원으로 이러저러한 작업들을 해오다 작년 이맘때쯤 참세상(당시 미디어참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국 독립다큐멘터리들은 제작과정에서 대상과의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꽤 긴 제작기간에 걸쳐 완성된다. 나 역시 그러한 제작방식에 대해 고민했었고 지금도 그러한 작업을 할 계획도 있다.
하지만 2년 여의 개인활동을 거친 후 이후 활동계획을 만들어야 했던 시기가 왔을 때 내경험과 취향 및 상황, 그리고 주위의 요구들을 바탕으로 결정한 공간이 진보네트워크센터의 미디어국인 미디어참세상이었다. 여전히 대안적인 영상들이 노출될 수 있는 곳은 인터넷공간이었고 급박하게 변화하는 현실운동과의 긴장을 놓지 않으며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진보네트워크센터의 미디어국이 아닌, 이제 진보적 인터넷언론으로서 '민중언론참세상'의 영상팀인 이상 전체 (영상)미디어운동의 일부로서 진보적 인터넷언론의 역할과 자기구획 정리 및 전망을 도출하는 작업도 병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은 참세상 이후에 전개될 내 활동들에 대해서도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미디어참세상에 들어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판단의 기준들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느낀 영상미디어운동의 결정적 결핍은 '주체 역량으로서 영상활동가부족', '제영역 및 주체간의 소통부족'이었다. 그래서 '영상활동가의 재조직화 및 재생산'과 '(영상)미디어운동네트워크'를 위한 활동의 영역 또는 공간이 '개인활동->참세상->?'의 물음표 자리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5.
 
관람후기로 대체된 '나 영상활동가'라는 주제의 원고를 마무리하며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변명하려 한다. 구매능력 있는 이들만이 원하는 상품으로서 예술이 취급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서만 예술적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무장한 신자유주의는 국경을 초월하는 착취와 야만적 전쟁을 일상화하고 이에 저항하는 민중의 투쟁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석간신문의 사진기자로도 활동했던 브레송의 사진들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거장 브레송 사진전 영상미디어운동이 급변하는 제 조건과 제 영역의 배치를 고민하며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여러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는 순간인 브레송의 '찰나'는 영상미디어운동의 진영에서도 발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의 활동 속에서도 발견되었으면 하는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이글을 관람후기로 대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찰나의 거장 브레송'의 사진만큼 예술적인 세상을 기다리며 수많은 '찰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개인적 희망을 고백하며 이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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