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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22호 나,미디어활동가] 나는 노동자와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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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22호 / 2005년 6월 30일

나는 노동자와 함께 하고 싶다
 
김 미 례 ( 독립다큐멘터리 감독, 
<노동자다 아니다> 등 연출 )
 
지금은 <노가다>다큐멘터리 편집중이다. 그야말로 노가다이다. 아니, 노가다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어찌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아무리 힘들다고 한들, 건설현장의 노가다에 견줄 수 있겠는가? 강제된 노동에서 착취의 굴레로 굴러온 건설산업시스템. 그런 세월을 내 아버지가, 그리고 이 땅의 노가다들이 살아왔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명치시대에, 한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 1900년대 초에 건설산업이 도입되면서 건설노동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장노동자들과 달리 건설노동은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강제되어야 했고, 그래서 가장 낮은 계급의 국민이 하는 일이 되거나, 죄수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함바에 가둬두면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또한 전쟁중에 식민지 땅에서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데려와 죽음같은 노예노동을 시킨 역사가 있다. 일본은 패전하고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건설노동자들을 지배하고 관리하던 노무구조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출처:민중언론 참세상 디카한국에서는 IMF를 겪으면서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화되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즈음 아버지의 임금체불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적이 있다. 건설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들어갔지만, 나는 건설현장에서 노가다의 무시와 차별이 무엇인지, 게다가 그 열악한 환경에서 드러운 욕먹어가며 눈치봐가며, 안전시설이라곤 개판인 현장에서 일한 임금조차도 제대로 못받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기필코 노가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IMF시절부터 시작된 촬영이 이제 6년 째다. 많은 건설노조조직가, 건설노동자들을 만났다. 어느날부터인가 나는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큐멘터리제작자이기 보다는 동지로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확인이 되는 순간마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에게 질문한다. 영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함께 웃고 울 수있는 것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신뢰하고 모든 이야기를 한다. 나는 편집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들으며 그들의 바램이 나의 바램이 되고, 그들의 분노가 나의 분노가 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너무 대상들에게 빠져버린다고 충고도 듣지만, 난 내가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의 삶 속에 내가 있었고, 그 차별과 무시 속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다면 내가 할 수있는한 난 지원하고 싶다. 이제는 <노가다> 다큐멘터리 작업과 활동의 구분도 없다.
출처:민중언론 참세상  
출처:민중언론 참세상 얼마 전 울산플랜트건설노조 투쟁이 있었다. 울산에서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마포에 있는 건설현장 타워크레인에 단체협상을 요구하며 3명의 노동자가 올라갔다. 일주일 간격으로 20여명의 상경투쟁단들이 그들을 지키러 상경했고, 타워크레인농성자들이 내려다 볼 수 있는 그 자리를 밤낮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투쟁했던 다른 노동자들의 기록영상물이나, 많은 독립영화들을 보여줄 좋은 기회였다. 그들을 지원하던 한 동지가 어두워진 저녁이면 차량에 흰 천을 걸고 한 두시간씩 영상물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반응은 의외로 무척 좋았다. 낮에는 진보적인 주간지, 월간지들을 밑줄을 그으며 보고 있었다. 처음 상경했을때 경계를 하던 눈빛들이 일주일 후에는 따듯하고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바뀌었을때,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작은 카메라로 거친 영상물로 세상을 바꿀 수있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확인했다.
나는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 자본과 정권이 수없이 노동자를 죽이는 이 세상을 바꾸는데 작은 힘이나마 함께 하고 싶다. 독립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혹은 비디오액티비즘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미디어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워져도 좋다. 나는 내 카메라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묵묵히 신뢰의 눈길로 바라보거나, 혹은 장애물들과 힘차게 함께 싸워주고 지켜주던 이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과의 암묵적인 신의를 지키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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