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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47호 길라잡이] 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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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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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47호 / 2007년 11월 29일

 

[47호 길라잡이] 감기
 
1.
회의를 끝내고 종로 1가 버스정류장에 섰다. 보도블럭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지친 종로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모두들 차가운 입김을 하나씩 물고 있었다. 계절이 가는데도 무덤덤하게 얇게 껴입고 나온 나는 그때서야 날이 추워졌음을 실감한다. 그렇게 버스정류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추위에 떨다가, 27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2. 
결국 감기에 걸렸다. 코를 풀고 버린 화장지가 벌써 휴지통 절반을 채웠다.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옷을 꺼내어 주섬주섬 입고는 다시 글을 쓴다. 둔한 건지 아니면 어리석은 건지, 계절이 바뀌는 매번 감기에 걸리고서야 후회를 한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감기군을 앞에 두고서 곰곰이 생각한다. 감기군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어떻게 돌려보낼지.

3.
훌쩍거리며 휴지를 집어 들고는 다시 곰곰이 생각한다. 이번 원고 기획의 어디에서부터 균열이 있었던가.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논의하며 준비했던 [이론의 여지: UCC]를 결국 이번에 싣지 못하고 내년 기획으로 넘겨야 했다. 그 밖에도 몇 개의 기획과 원고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뤄지거나 수정되고 대체되었다(기획의도대로 이번 호에 실을 수 있게 된 원고의 필자들에게는 이런 이유로 더 감사드린다). 
누구나 그렇듯, 감기에 걸리고 싶던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건강한 ACT!를 발행하고 싶은 편집위원들의 바람은 언제나 같다. 하지만 감기에 걸렸다. 기획들은 미끄러지고 원고들은 미뤄지고, 편집위원들은 고행을 시작했다. 난감해졌다. 어떤 편집위원은 고행 중에 쓰러졌고, 또 어떤 편집위원은 대선미디어연대 간담회의 15페이지 녹취를 발행 시기에 맞추기 위해 입술이 부르트도록 풀어야 했다. 그리고 감기 걸린 나는 휴지로 쓰레기통을 채우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다들 나름대로 열반 없는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노력의 결과 언론개혁 시민단체와 주류미디어, 미디어운동활동가 진영 사이의 논의를 모을 수 있었던 대선미디어 간담회를 담을 수 있었고 현장의 장애인미디어운동을 비롯한 몇 개의 꼭지에는 꼭 실어야 했던 내용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민첩하게 반응하고 조금 더 현명하게 관찰하며 대응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무언가 편집위에서 놓치고 있거나, 혹은 편집위가 예전보다 덜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ACT!에 찾아온 감기군과 대면하며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감기군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어떻게 돌려보낼지.

4. 
며칠 전, 코스콤 비정규직 투쟁에서의 미디어 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ACT! 편집위원들은 여의도에 갔다. 많이 추워진 날씨에도 사람들은 코스콤 건물 앞에서 문화제를 하고 있었다. 길 위에 멈춰 있던 집회참가자들은 지치지 않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지만, 도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들을 향해 감기 같은 냉랭한 시선을 던졌다.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참 다양한 감기가 있다. 
많이 추워졌다. 코스콤 비정규직 투쟁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부디 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길, 그리고 감기나 고행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길 바란다. 더불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이 감기로 인해 휴지통에 휴지를 수북이 쌓지 않아도 되는 겨울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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