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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2호 현장] 인권영화제, 그들만의 심의를 심의하다. -제 12회 인권영화제 거리로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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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2호 / 2008년 6월 19일

 

 

인권영화제, 그들만의 심의를 심의하다.
-제 12회 인권영화제 거리로 나가다- 



마토(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 내가 바로 인권영화제!


이젠 전혀 낯설지 않은 인권운동사랑방(이하 사랑방)에서의 밤샘작업이 또 다시 시작된다. 2008년 5월 한 달 간, 포스터, 티셔츠, 해설책자를 만드는 홍보팀에서부터 뉴스레터 ‘울림'을 만드는 사람들, 상영작을 시사하거나 그 밖에 여러 기술적인 준비를 하는 이들로 사랑방 한 켠의 인권영화제 사무실에는 24시간 내내 인기척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영화제 개막 사흘째인 오늘은, 아슬아슬 늦게 도착한 번역 원고를 검토해서 상영본에 자막으로 입히는 인고의 작업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거리 상영을 결심하면서부터 제 12회 인권영화제는 일복이 터지겠구나 싶었는데, 그 이후로도 시시때때로 예고 없이 급변하는 환경과 곳곳에 도사린 사고들. 한마디로 일들이 매일매일 마라톤을 한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낮에는 학교 수업을 듣고, 저녁마다 영화제 준비를 위해 사랑방에 들어서는 나에게 ‘밤에만 나타나는 아이', 혹은 사랑방 사람들 출근하는 아침이면 쌩하니 나가서 ‘아침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붙었다. 올해로 네 해째 인권영화제 자원 활동을 하고 있다. 첫 해에는 멋도 모르고 그저 신기한 마음에 따라 다녔던 것 같은데, 이제 제법 인권영화제의 전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보인다. 학내에서 웬만한 문화 프로그램 기획하는 것 정도는 흐름을 술술 꿸 정도니, 점점 이 바닥에서 내 뼈도 굵어지고 있는 것일까?



인권도 영화도,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잘 알거나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것도 아니었던 내가 매년 인권영화제와 함께 부쩍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인권영화제에서 자원 활동의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자원 활동가들은 개막 몇 달 전부터 모집되어 인권영화제의 정신과 지향하는 바를 함께 나누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고, 의사 결정 단계에도 참여한다. 단지 현장 진행 도우미가 아니라, 매회 영화제를 다른 색깔로 염색하고 문양을 수놓는 인권영화제 그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함께하는 자원 활동가 뿐만이 아니라, 번역, 더빙, 장애인 접근권 확보를 위한 기자재 대여 등 보이지 않지만 인권영화제의 곳곳에서 자기 자리를 채우는 자원 활동가들까지 합하면 매해 100명 정도가 함께 한다. 기업의 후원, 주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없이도 매년 꾸준히 인권영화제가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자원 활동가들의 바쁘게 뛰어다니고 밤을 지새웠기 때문이다.


인권영화제의 시작, 그 후 13년


인권영화제는 12년 전 첫 개최부터 '사전심의'는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사전심의'를 거치지 않고 영화를 상영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이는 인권영화제 스스로 불법영화제를 자처하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원년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영화제들이 생겨나고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영상, 인권유린의 생생한 증언을 위한 인권영화들의 상영 공간은 여전히 부족했다.


1996년 10월 제1회 인권영화제 준비 과정은, 상영장 대여 불가 압력으로 인해 개최 자체가 하나의 인권 탄압 보고서였다고 한다. 또한 이듬해 제 2회 인권영화제 때도 상영장 봉쇄, 압수수색, 불심검문, 강제 연행, 경찰의 협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언제 경찰 병력에 의해 기자재를 압수당할지 모르는 초긴장 상황에서 상영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계속 되는 상영장 섭외 방해 탄압, 상영장 내 전원공급 차단과, 끝내는 서준식 집행위원장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구속까지 초기 인권영화제가 걸어온 길은 거칠고 험난했다. 그러나 인권영화제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처럼 축제를 벌이면서 동시에 전투를 해왔다. 그렇기에 같은 연장선상의 곧은 결정으로 12회 인권영화제도 등급심의 면제 추천 제도를 거부하고 영비법 개정 투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리상영, 그들만의 심의를 심의한다!


인권영화제가 거리 상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법은 바로 현행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이다. 사전 검열을 거부해왔던 인권영화제는 이 영비법이 허용하는 작은 틈새에 만족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현재 심의제도 자체가 표현의 자유에 어긋남을 알리고, 영비법 개정 운동을 하고자 한다. 현행 영비법에 따라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영화는 상영등급을 분류 받아야 한다(29조 1항).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아니므로 법해석에 따라 등급분류를 받을 의무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상영등급을 분류 받지 아니한 영화를 상영하여서는 아니 된다(29조 3항)라고 규정하고 있고, 이를 위반하면 벌칙을 가하도록 정하고 있다(94조). 결국 무료로 상영하여도, 영상등급을 분류 받지 않은 인권영화제는 대관을 허용하는 영화 상영관을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독립영화 또는 예술영화 전용관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런 현실은 ‘국가'가 인권영화제 개막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영관의 ‘영업 정지'나 ‘등록 취소'라는 행정처분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사전 검열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영비법은 등급 심의를 받지 않는 영화에 관해 일부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29조 1항). 대가를 받지 않고 상영하는 단편‧소형 영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추천을 받은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 문화관광부 장관이 등급분류가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영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조항은 실질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문화적 권리 향유를 위한 문화 공공성을 보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일부 예외 조항으로 문화 창작자와 수용자가 틈새에서 소통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자유롭게 만나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큰길을 열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인권영화제는 안정적인 실내 상영장을 나와서 거리로 향했다.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이 없음을 세상에 알리고, 항의하기 위해 거리에 스크린을 걸었다. 제도 안에서의 싸움이 아닌, 제도 밖에서 그 제도를 직접 만들어가는 긴 싸움을 하고자 했다. 거리에서 직접 관객과 만나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인권영화제의 의미를 공명시킬 것이다. 이에 인권영화제는 문화적 권리로서의 표현의 자유 확대를 위해 영비법을 개정할 수 있도록 여러 문화 예술 단체, 인권 및 시민사회단체, 개인들과 함께 공동행동을 하려고 한다. 이에 동의하는 여러 단체와 개인이 ‘표현의 자유와 확대를 위한 영비법 개정 공동행동'을 구성하였다. 인권영화제는 이를 통해 수년간 심의 정책의 개선을 위해 싸워온 문화운동가, 영화인, 문화 민 주 주의의 안에서 자유를 찾는 일반 시민들과 만나 법 개정과 표현의 자유 확대를 위한 큰 흐름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거리 상영과 병행하여, 제12회 인권영화제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개심의'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영상물 등급심의 제도에 대한 대안을 시도해본다. 세계 인권 선언 제19조의 상징성을 따라 ‘표현의 자유 19조 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체적으로 자율적인 심의를 해 보았다. 이를 위해 언론,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5월 13일(화)부터 5월 19일(월)까지 공개심의위원을 모집하였다. ‘19조 위원회‘라는 명칭에 따라 19명 심의위원을 구성하기로 하고, 시민심의위원 10명을 모집, 전문가심의위원 9명을 추천받았다. 시민심의위원은 직업, 연령대별로 고르게 구성되었으며, 청소녀/청소년도 각 한명씩 포함하였다. 전문가심의위원은 영화, 문화, 인권 등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이다. 
이렇게 구성된 ‘표현의 자유 19조 위원회'는 첫 모임에서, 모든 영화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등급분류를 받도록 할 것이 아니라, 등급분류를 받지 않을 권리도 보장하여야 한다‘라고 의견을 모았다. 그 가운데 '19조 위원회‘의 공개 심의는 단순히 연령등급을 제시하는 한계를 넘어,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진정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 제공, 내용 기술을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해 보기로 하였다.



인권영화제는 등급심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규모와 특성에 상관없이 국내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가 국가의 등급 도장을 받아야 하는 일괄적인 제도의 위험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거대한 영상산업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관객들을 위해서는, 문화생산물에 대한 충분한 사전 정보를 기술하여 수용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성과 관계없는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 실험적으로 제작되는 창작물, 특정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상물에 대해서는 등급분류를 면제해야 한다. 영화를 보여주고 싶은 이들과 그 영화를 보고 싶은 이들이 자유롭게 만나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세상, 이러한 세상을 위해 인권영화제는 거리의 축제를 벌이면서 그들만의 심의를 심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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