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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5호 미디어꼼꼼보기] 베이징에 걸린 홍등 - 중국과 장예모, 그 필모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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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5호 / 2008년 9월 30일

 

 

베이징에 걸린 홍등
- 중국과 장예모, 그 필모그라피


김윤진 (ACT! 편집위원회)
 
1. 프롤로그


“이것은 나의 조부모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어떠한 사람도 더 이상 그 얘기를 믿지 않는다.”


까만 화면 위로 내레이션만 흘렀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얘기를 믿지 않는다고, 영화 속 남자의 목소리는 말했다. 장예모 감독의 1988년 장편데뷔작 [붉은 수수밭(Red Sorghum)]의 첫 부분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은 중국의 슬픈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난과 약탈과 제국주의 침략을 겪어야만 했던 중국의 붉은 근대사. 장예모는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어 자신의 첫 이야기로 삼았던 감독이다. 그래, 그는 붉은 아픔으로 응어리진 채 사라지고 있던 기억을 감추지 않고 꺼내었던 감독이었다.


그랬던 장예모가 그로부터 20년 후, 중국이 100여 년을 기다렸다는 베이징올림픽의 총감독으로 현재 자신의 필모그라피 끝자리를 채웠다.




2. 홍등의 역학관계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장예모의 1991년 작품 [홍등(紅燈, Raise the Red Lantern)]을 끄집어 내보자. 1920년 대, 가난하여 대학을 마치지 못한 송련(공리)은 부유한 진어른 댁의 네 번째 첩으로 시집을 간다. 그 집에는 남편이 매일 부인들 중 한 명을 선택해 잠자리를 들고, 선택당한 부인의 처소에는 홍등을 밝히는 가풍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었다. ‘홍등(紅燈)'은 단순히 선택받은 처소를 ‘아름답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건 남편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것의 상징이며, 곧 집안 내 권력의 상징이다. 영화 안에서 ‘홍등'은 권력게임 속 구체적인 욕망의 표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매일 홍등이 걸리는 그 곳은 규율과 가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며, 그 외의 다른 욕망들은 거세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본질적으로 집안의 중심인 진어른의 권력에 근거하는 홍등의 역학관계이기 때문에 진어른, 혹은 그로 대표되는 가문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은 배제되거나 없어져야 하는 무엇이 된다. 그리하여 진어른이나 전통에 반(反)하는 욕망이 영화 안에 들끓는 순간, 

누군가는 자물쇠가 채워진 방에 갇혀 죽임을 당하고, 누군가는 뜰에서 처참히 죽어가며, 또 다른 누군가는 서서히 미쳐간다. 사막 같은 풍요로움 속에서.


하지만 카메라는 영화의 러닝타임 123분 내내 단 한 번도 진어른의 얼굴을 프레임 안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얼굴은 매일 자신이 거할 처소를 선택함으로써 홍등의 역할관계를 조절하고 그것을 통제하지만, 그는 언제나 카메라 바깥이나 혹은 화면 멀리에 숨어 있다. 아니, 장예모는 일부러 그를 잡지 않았다. 게다가 카메라는 시종일관 그 암투의 배경이 되는, 성(城)처럼 거대한 집을 건조하게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 스스로 홍등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홍등의 관계'가 불러오는 비극을 장예모는 멀리 떨어진 채 바라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비릿한 비극의 장을 삭막한 풍경 속에 가둬둠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한 시선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장예모의 시선이기도 했다.




3. 스물아홉 번째 홍등


2008년의 8월 8일의 베이징은 홍등이 걸린 아름다운 처소의 풍경을 닮아 있었다. 중국의 고전과 현대의 디지털 기술을 만남은 화려한 스펙터클을 연출했으며, 무엇보다도 화약을 발명한 나라로서 중국이 보여준 불꽃 퍼포먼스는 놀라웠다. 베이징의 검은 색 밤하늘은 네 시간이 넘는 동안 붉은 빛으로 물들었고 그건 각국의 미디어를 통해 세계로 생중계 되었다.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식은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홍등처럼 ‘아름다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2001년 7월, 러시아에서 다음 올림픽 개최 도시로 베이징이 ‘선택'되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스포츠 축제가 갖는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국가는 없다. 우리나라의 1988년과 2002년도 그러했고, 그건 중국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올림픽 유치 국가로 ‘선택'되기 위한 경쟁은, [세계인을 위한 화합]이나 [평화의 제전] 같은 아름다운 이름을 걸고 하는 권력게임의 일종이다. 중국은 100년을 기다린 뒤, 개혁-개방 이후 30년이 되는 2008년, 드디어 아름다운 ‘홍등'을 달 수 있는 기회를 2001년에 얻었다.
스물아홉 번째 올림픽 성화가 오게 되면서 베이징과 중국의 모습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도시는 아름다워야 했고 중국은 매력적으로 보여야 했다.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다른 목소리와 욕망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베이징의 전통 서민 지역 후통(胡同)거리가 대부분 철거되었고 그만큼의 서민들은 수백 년 베이징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다. 거리가 사라진 그곳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베이징 주경기장이 만들어졌다. 티베트의 자유를 부르는 2008년 3월의 목소리도 베이징올림픽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사라져야 했다. 그 때 베이징은 여전히 올림픽 준비에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홍등-성화는 세계를 돌아 베이징으로 오는 중이었고 성화가 베이징에 피어오르는 날 중국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꽃다운 나라, ‘중화(中華)'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목소리가 있으면 곤란했다.


그렇게 해서 열린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개막식은 문자와 화약과 인쇄술과 종이 등을 중국의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으로 세계에 소개했다. 개막식 공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됐지만, 이미 많은 오랜 역사를 살았던 ‘후통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진 뒤였다.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몸에 빛을 달고 
비둘기-평화로 중국의 현재를 나타냈으며, 거대한 지구 위에서 [너와 나]라는 주제가로 세계의 미래를 노래했다. 소수민족들이 각각의 의상을 입고서 춤을 추었고, 다양한 인종과 피부색과 민족들의 웃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미 티베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은 뒤였다. 붉게 터져 오르는 하늘은 베이징의 하늘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혹 누군가는 2008년의 베이징이 아름답다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아름다운 홍등 하나가 위태로운 욕망관계를 감추면서 드러내는 표상이 되었듯,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쏘아올린 화려한 불꽃들과 그 끝에서 피어오른 성화가, 올림픽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간 많은 것들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올림픽 개막식을 장예모 감독이 연출했다는 사실이다. [붉은 수수밭]을 통해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슬픈 중국근대사를 이야기했고 [홍등]으로 아름다움 이면의 슬픈 현실을 볼 줄 알았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중국의 현재를 지반으로 하여 베이징에 직접 자신이 만든 홍등을 만들어 걸었다.
장예모가 직접 건 아름다운 홍등 바깥에는 다르다고 말하는 목소리와 저항하는 욕망들이 버려졌고 처형되었다. 베이징올림픽으로 철거된 수많은 중국 전통의 후통(胡同)거리와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그렇고, 티베트에서 흘린 피가 그러하며, 다른 수많은 소수민족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라진 것들을 뒤로 한 채, 모두 ‘하나'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붉게 타오르는 홍등이 가져올 아름다운 밤을.




3. 거인들의 발자국


사실 장예모 감독이 올림픽 개막식의 총연출을 맡은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홍등]에서 진어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불편한 시선을 가질 줄 알았던 그는, 2002년 작 [영웅(英雄, Hero)]에서는 조금 달라진다. 절대권력이자 진나라의 왕인 영정(이후 진시황이 된다)을 죽이기 위해 자객들이 백보 앞, 십보 앞으로 그에게 접근할수록 조금씩 영정의 얼굴은 드러난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신 앞에 선 자객에게 노골적으로 말한다. ‘천하(天下)'를 위해, ‘하나'의 중국을 위해 그만 암살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희생해주라고. 자신의 천하를 이해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그 때의 카메라는 영정의 얼굴을 클로즈업 해줄 만큼 친절하지만, 그 친절함을 파고들다 보면 영화 [영웅]에서 말하는 ‘대의'와 ‘영웅'에 대한 섬뜩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던 장예모는 결국 사라지는 것을 뒤로 한 채 거인의 발자국을 찍고 말았다. 제 29회 올림픽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하고 환영 행사가 끝난 뒤, 베이징 곳곳에서 순서대로 발자국 모양의 폭죽을 터뜨렸다. 그 발자국 모양의 폭죽들은 하나하나 베이징 시내를 가로 질러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발자국이 올림픽 주경기장 위에 만들어지는 순간, 거대한 불꽃이 세상을 붉게 만들었다. 한 때는 거인의 나라였던 중국이,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수그리고 있던 중국이, 이제 다시 거인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올림픽이 그랬듯, 중국에게 베이징 올림픽은 처음부터 ‘스포츠를 통해 국가 간 우애를 나누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꿈의 제전'이 아니었다. 현란한 연출과 압도적인 인해전술을 통해 중국 수천 년 역사가 이뤄놓은 문명을 말하고 중국의 현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세계의 미디어 위에 지문처럼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국가적인 쇼비지니스에서 두 시간 동안의 화려한 PPT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인물이 장예모였다. [붉은 수수밭]에서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슬픈 과거를 얘기하고 [홍등]에서 우울한 근대사의 단층을 보여주었던 그였지만, ‘대의'와 ‘영웅'이라는 말로 ‘천하'라는 허구를 이미지화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장예모는 그저 예쁜 홍등 하나를 만들어 달았다. 홍등의 역학관계 안에서 장예모는 중국 대륙이 갖는 욕망의 아이콘 중 하나일 뿐이다. 그가 베이징 어느 곳에 홍등을 만들고 준비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자물쇠 달린 방에서의 처형과 배제가 이뤄진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30년 개혁-개방의 시대가 낳은 극단적 자본주의의 단면, 혹은 만연한 극단의 전체사회주의의 야누스적 얼굴이 그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곳에서 다른 욕망은 필요가 없다. 그런 뒤에 거인들의 발자국은 성큼성큼 걸어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수백 개의 광염 속에서, 베이징올림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4. 에필로그 아닌 모놀로그


처음부터, 그래 [붉은 수수밭]부터, 한 때는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자존심 상했던 슬픈 역사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장예모의 필모그라피는 태초부터 그런 혐의를 잉태하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중얼거리는 독백, 모놀로그는 붉은 수수밭의 마지막 장면으로 옮겨간다.
여전히 진행형인 장예모라는 아이콘의 개인사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발자국의 동선 위에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전히 활동 중인 장예모와 계속 역사를 쓰고 있는 중국은 자신의 에필로그를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장예모와 중국이 딛고 있는 지반의 연장선 너머로 [붉은 수수밭]의 마지막 풍경이 보이는 건 왜일까. 
붉은 고량주를 화약으로, 결혼식 축하음악을 진혼곡으로 바꾸면서 벌였던 투쟁이 끝난 직후, 눈이 흐려지며 모든 것이 붉게만 보이던 붉은 수수밭의 풍경. ‘홍등'의 아름다움을 쫓아 다양한 목소리를 배제하고 소수를 꺾어버릴 때, 스스로가 ‘하나'라는 이름으로 제국이라는 영웅-거인의 모습을 닮아갈 때, ‘붉은 수수밭'의 풍경은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중얼거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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