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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2호 미디어꼼꼼보기] 신민철의 생활분투기, 『봉천 9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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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2호 / 2008년 6월 19일

 

 

신민철의 생활분투기, 『봉천 9동』 



반다 (장애여성공감)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정보에 워낙 어둡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전에 영화 팸플릿이나 기사 등을 보지 않고 영화를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기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지적장애인?”, “아니, 그냥 언어장애가 있는 것 같은데...”
“장애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가는 것 같은데...”, “장애라는 정체화가 중요하다는 의제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극장에서 수다스럽게도 옆 자리에 앉은 동료와 짬짬이 속닥거리면서 영화를 보았다.
그러가다 민철이 극장 앞에서 얄팍한 지갑을 보면서 “여긴 장애인 할인 안 되나요?” 라는 
말을 할 때, 의문이 풀리고 다른 설정이 있음을 감지했다.





장애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자기 정체화 하고 당당하게 밝히는 것의 정치성도 있지만, 또 한편 자신의 일상에서 장애라는 정체성을 그다지 크게 정체화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일상의 그 무엇으로 드러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식'의 차이로 쉽게 환원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일상에서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어떤 정체성은 어떤 사회에서 극도로 부각되며 그 이외의 정체성을 휘발시켜 버린다. 이를테면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와 같은 정체성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극도의 정체성을 부여 받으며 각 개별 장애인이나 각 개별 이주노동자들이 가진 다른 정체성을 지운다. 그 효과성은 긍, 부정의 의미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강하게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해 집단화함으로서 그 정체성으로 명명된 집단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일상적 삶의 연속에 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특이한 사람들로 그들을 대상화하기 쉬운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영화 「봉천 9동」(조규준 감독, 2008, 44분, 극영화)의 미덕중에 하나는 지적장애라는 정체성을 일상 속 하나의 정체성으로 그려가고 있는 것 가운데 있다. 소위 결혼 적령기라는 나이의 정체성, 장애인이라는 정체성, 남성이라는 정체성, 직장인이라는 정체성, 누군가의 친구라는 정체성 들이 영화의 주인공 신민철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로 등장하면서 상황에 따라 그 정체성들이 크게 작게 부각되며 작용한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지적장애인'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은 감독과 제작진이 치밀하게 직조해서 창조한 캐릭터가 ‘신민철' 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제작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이었고, 그래서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완성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구성된 신민철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였을 것이다.


다르다와 똑같다, 이율배반?


이 사회의 규격화된 성취․생산을 할 수 없는 주체로서의 장애인. 그중에서도 지적장애인, 지적장애인들이 공장의 반복 생산라인에 서서 단순 조립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종합예술이라 칭해지는 극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공익광고에서 아무리 ‘장애인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떠드는 것보다, 「봉천 9동」에 따라 다니는 ‘지적장애인들이 만든 한국최초의 극영화' 라는 저 말이 지적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그 의미화와 이미지를 훌쩍 넘어서고 있음을 느낀다. 
이 원고를 쓰기위해 영화 「봉천 9동」을 검색해 봤더니 여전히 ‘장애를 딛고', ‘장애를 극복'하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나름 ‘찬사'가 수 없는 문장들에 등장했다. 봉천9동 주인공 신민철님과 조규준 감독을 비롯한 제작팀들이 지향했던 것은 장애 극복이었을까?
아마도 나의 상상으로는 조규준 감독님이나 다른 제작팀들에게 저런 이야기를 던진다면, ‘나 복지 카드 가지고 있는 사람 맞아요, 그리고 저희가 친구들과 영화 만들었어요.' 그 정도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라고 짐작해본다.



장애를 ‘딛고, 극복'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비장애인으로 표준화 된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음이 입증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긍정적으로 인정되는 장애인이라는 정체성. 배우와 감독을 포함한 제작팀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들로 찬사를 늘어놓은 모습을 보는 건 안타깝다. 
작년 12월에 나온 「봉천 9동」 제작팀의 보도 자료를 보니, ‘한국 영화에서는 지적장애인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를 하고, 카메라를 조작하고, 편집까지 작업한 영화는 이영화가 최초가 않을까...(중략)... 이 영화는 비장애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지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고민과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지적장애인들도 좋은 사람과의 멋진 연애를 꿈꾸고, 데이트 비용을 고민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 술도 한잔 씩 한다. 이 평범한 일상들이 지적장애인에게도 연속선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특별하게 다가오는지. 그 특별함의 정도를 가늠해보면, 우리 사회가 지적장애인이라는 집단을 얼마나 타자화 해왔는지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아 봐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지적장애인에 대한 이미지화와 타자화를 말하기 위해선 지적장애 안에서의 무수한 차이들을 말하고 싶어지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고 여기서 일단 접는다.



어쨌거나 어떤 기준을 설정하여 그에 따라 장애/비장애 집단을 구분지어 놓고, 차별의 정치성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비장애라는 기준에 인간승리의 노력으로 부합하였다고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주는 모습. 그리고 연애하고, 얄팍한 지갑을 고민하는 일상의 욕망과 고민이 ‘당신들'에게도 있다는 게 놀랍다는 발견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직은 이 사회의 모습인 것 같다.


섬세한 소통으로 관계 맺기


영화 「봉천 9동」 상영이 끝나고 극장을 나올 때 어떤 관객들이 지적장애인들이 정말 저 영화를 자체적으로 다 제작했을까, 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장애인들의 개입과 노력이 있었을까를 논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몇 달 전 작업을 마친 지적장애여성의 성폭력 경험에 대한 스피크 아웃 영상을 만들던 때가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뿌연 안개 낀 풀숲을 한걸음 한걸음 디뎌 가는 듯했던 작업과정. 겨우 5분 남짓한 영상을 만들면서 내가 그녀의 언어를 훼손하는 건 아닐까, 내가 날것의 그 이야기를 매끄럽게 구성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갈등과 고민을 얼마나 했었는지. 그녀가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여러 질문과 끝없는 자기 검열의 과정들. 
그 과정들을 떠올리고 나니 「봉천 9동」의 제작 과정에 더욱 궁금해 졌다. 내가 상담과 자조모임을 통해 만나 온 지적장애인 대부분의 경우 아주 사소한 것에도 허락과 동의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만큼 늘 ‘하지 말아라와 해도 된다' 의 통제 안에서 살아온 삶의 역사를 반증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내가 만나온 지적장애인들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지적장애인에 대한 주변인들의 일상적 훈육과 통제 이외에 여성이기 때문에 보다 더 순종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적장애남성이라고 해도 적극적으로 자기표현이 존중받고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은 경험이 많지 않다면 수동적 성향과 통제에 익숙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쉬울 것이라 짐작한다.
그런 상황 안에서 ‘지적장애인 자체제작'을 시도하고 진행하면서 무수한 상황과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 같다. 영화 「봉천 9동」제작 과정에서 제작팀은 사회복지사 ‘선생님'이나 다른 미디어교육 ‘선생님'들의 말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역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삶을 나눠 온 것으로 알고 있는 봉천동 나눔의 집에 있는 장애인 센터 「함께 사는 세상」과 한국의 변방과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봉천 9동」이 제작팀과 함께 하면서 그 안에서 얼마나 조심스러운 혹은 섬세한 관계 맺기가 시도되었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회복지사나 미디어교육 강사들이 제작에 얼마나 개입했느냐, 안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관계 맺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비롯한 「함께 사는 세상」, 「봉천 9동」 분들이 제작팀에게 많은 지지와 격려를 보냄으로서 제작팀이 거침없이 아이디어도 내 보고 애드리브도 시도해 볼 수 있도록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도 만들고, 그 안에서의 갈등이나 의견조율에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 놓거나, 돌발 상황들에 대처해 나가는 노력을 함께 해나가지 않았을까.


우리는 모두 서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다만 사회복지사 선생님이나 미디어 교육 선생님들은 일방통행의 영향력이 발현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의 의구심이나 궁금증을 조금 덜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지적장애인들의 현실이나 작업의 조건들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봉천 9동」 제작 과정에 함께 했던 이들 혹은 조력자들 간에 일방적 소통이 아닌 섬세한 소통을 가졌던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영화 「봉천 9동」 제작 과정에 있었을 수많은 고민들과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는다면 영화 러닝 타임인 사십 분으론 턱없이 모자를 것 같다. 아마 사나흘에 걸쳐서 읽어야 할 만큼의 분량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 고민들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딴죽 거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제작팀에게 하고 싶은 말.
제작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고 나면 이 글을 읽는 이들로부터 까칠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듣게 될지 모르지만, 지적장애인이 만든 영화라는 이유로 지지와 찬사 이외에 어떤 비판도 할 수 없거나 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는 조심스럽게 넘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막연한 찬사 보다는 적극적 말 걸기가 때로는 더 재밌기도 하고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 「봉천 9동」 제작팀 여러분, 영화를 보면서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들 덕분에 몇 번이나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웠던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민철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미숙이라는 인물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여성들과 너무 비슷했습니다. 남자가 돈이 없는 게 어디 있냐 하고, 데이트 할 때 마다 남자에게 이것저것 사 달라 하고, 데이트 비용은 모두 남자가 내는 게 당연하다는 듯 한 태도의 영화 속 미숙이라는 인물은 아쉽습니다. 뭐, 늘 올바르고 멋진 인물만이 영화 속에 등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죠. 다만 민철 이라는 인물에 비해 개성 없는 미숙이라는 인물이 아쉽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장애여성운동하는 저희들과 만나서 텔레비전과 영화에 나오는 지적장애인 혹은 장애여성의 이미지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 보면 좋겠습니다. 그 기회가 닿는다면 영화 「봉천 9동」 에서처럼 유쾌한 말들로 천천히 이야기 나눠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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