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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1호 미디어꼼꼼보기] 또 다른 쉼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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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1호 / 2008년 5월 16일

 

 

또 다른 쉼표, 「길」. 



넝쿨 (대추리 도두리 지킴이)
 
봄, 4월.
내가 대추리에 처음 들어가 본 것은 2006년 4월이었다. 당시에는 직파 이후 자라난 풀들을 잡기 위해 한창 농약을 주던 때였다. 학교에서 농활을 간다는 얘기를 듣고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마냥 친구들을 따라서 대추리에 들어갔다. 너른 들판에서 농약을 뿌리며 주민들을 처음 만났고, 들판 구석에 피어난 민들레도 처음 만났다. 들판과 마을 곳곳에서 휘날리는 노란 깃발들과 선선한 할아버지의 웃음이 정겹다고 느꼈을 즈음, 대추리로 짐을 싸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시작점을 찍었던 그 달에 쉼표 비슷한 것을 찍으며 대추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후 얼마간, 아니 꽤 오랜 시간동안 대추리를 생각하며 괴로워하곤 했다.



기억, 흐릿하게 남아있는.. 
처음 대추리에 들어가서 살기로 했을 때의 고민은 ‘나는 도대체 왜 이곳에 왔을까'였다.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보고 설명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딱 어울리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물어보면 그저, ‘사람 때문에' 라고,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말들로 대답 아닌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살아가면서 너무나 분명한 의미를 갖는 답이 되었다. 매일 노인정에서 밥을 나눠먹고 해거름이면 촛불행사장으로 걸어가 사람들을 만났고, 때때로 동네 사람들이 나무 그늘 밑에 모여 부침개를 부쳐 먹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이런 작고 소소한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어느 순간 나에게 대추리란, 대추리의 사람들이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되어있었고, 내가 대추리에 있는 중요한 이유가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스치며 하는 단 몇 마디의 말에도 삶의 무게가 묻어져 나오는 사람들, 무너지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강인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 나에게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 지킴이들은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내 스스로 그 공간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는지, 그 공간에서 나오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기억의 편린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잘 남아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어떤 사건들이 서사를 이루지 못하고 한 장의 사진처럼 그렇게 박혀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추리를 나오면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소중한 삶의 기억들이 그저 추억처럼 번지고 잊히는 과정이 아닌지 되새겨보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모든 것을 온전히 기억한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삶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는 것은 나에게는 꽤나 특별한 일이다. 그곳이 미군기지 확장반대의 싸움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미군의 패권과 전략적 유연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위치로써의 상징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참 좋겠으나, 내게 그곳의 삶이 소중한 이유는 저런 어마무지하게 거대하고 먼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삶과 기억의 재구성 
대추리와 관련된 영화는 꽤 많이 있다. 내가 대추리로 들어가기로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줬던 「대추리 전쟁」(정일건/ 2006)부터,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이수정 ‘트랙터가 부르는 평화의 노래'편/2006), 「우리가 대추리로 가는 이유」(김지혜/ 2006), 「굳세어라! 황새울」(나까이 신스케/2006), 「황새울 방송국 들소리 이야기」(들소리,2007) 그리고 최신작 「길」(김준호/2008)까지, 대추리의 기억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대추리와 관련된 영화들은 두 줄기를 갖는다. 하나는 투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 급박함을 알리고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들(트랙터가 부르는 평화의 노래, 대추리 전쟁, 우리가 대추리로 가는 이유, 굳세어라 황새울)이고, 또 하나는 주민들이 모두 이사를 나가시고 싸움이 일단락 된 이후 그곳에서의 삶을 돌아보는 영화들(황새울 방송국 들소리, 길)이다. 위의 영화들은 다큐멘터리라는 특성상 영화의 이야기가 당연히 대추리 투쟁과 맞물려 돌아가지만 영화마다 각각의 색깔과 느낌은 다르다. 또한 영화가 안고 있는 색깔 자체를 빼더라도 이런 영화들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들은 새로운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최근에 다시 본 「대추리 전쟁」은 재작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의 판타지를 부쉈고, 그 힘은 내가 대추리로 들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본 「대추리 전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과 한숨들이 영화 속에 나오는 ‘누군가' 의 이야기가 아닌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되면서 한층 더 커다란 한숨으로 다가온다. 아, 우리는 이렇게 견뎌왔구나 하고…. 
대추리를 나오고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완성된 「길」이라는 작품이 현재의 나에게 던져주는 질문과 위로는 참 크다. 앞서 말한 나의 두려움과 질문들에 하나의 답을 주는 영화가 바로「길」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감독은 대추리에서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할아버지를 만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방효태 할아버지에게 삶을 배우고 삶의 방식과 저항의 의미를 다시 곱씹는다. 5월 4일의 씻을 수 없는 아픈 기억과 상처로 뒤범벅된 날을 뒤로하고도, 할아버지는 계속 농사를 짓고 촛불을 들며 일상을 이어간다. 그리고 국방부가 ‘촌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의 방편으로 차단한 길이 아닌 새로운 ‘할아버지의 길'을 만들어 간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걸어가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랬었지, 맞아 맞아, 하는 감탄사를 쏟아내며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흩어져가는 기억들과 느낌들을 하나의 선 위에 점들로 위치지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새울 들녘으로 퍼지는 붉은 노을과 점심때면 노인정에서 모락모락 풍기던 따뜻한 밥 냄새, 겨우내 촛불행사를 하면서 난로에 구워먹었던 고구마나 오징어 같은 감각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은 영화를 보면서 다시 배치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가장 극단적으로, 매 순간 삶의 경이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에 계속 감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지키고 싶은 어떤 삶이 있었고 아마도 그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무엇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거대담론이나 ‘타자'의 이야기를 담는 감독이 아니라 ‘우리' 의 이야기를 말 하고 그런 숨들을 전달하는 감독의 시선이 고맙다.



기억은 기억으로, 상처는 상처로, 치유는...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고 난 뒤 지킴이들도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떠난 이후 나를 계속 괴롭히던 것들은 ‘지키고 싶었고, 지켜야 했기에 들어갔던 사람'으로써(그래서 이름도 지킴이였던) ‘지키지 못했다'라는 죄책감이었다. 땅을 파헤치고, 철조망을 치는 공권력 앞에, 집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무너지게 했던 거대한 공포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고 초라한 나에 대한 질타는 대추리의 기억을 스스로에게 상처와 아픔으로 새기도록 강요했다. 그 상처 위에 「길」의 할아버지는 조용히 다가와 소주 한 병을 건네준다.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이었냐고... 
결국 나의 질문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는 왜 그곳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의 기억이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힘의 논리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 개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파괴하려고 했던 권력에게 맞서 싸우고자 했던 사람들의 다부진 눈빛과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단단한 발끝을 영화를 통해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을 하나하나 밟으면 아마 나는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쉼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아직 대추리에 대해서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주민들은 아직도 송화리의 빌라단지에서 팍팍한 한숨을 쉬며 살고 계신다. 그리고, 그래서 여전히 ‘대추리' 하면 어떤 어려움들이 내 앞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길」을 보면서 내 안에 또 다른 씨알 같은 것이 남겨져 있는 것을 본다. 내게 남겨진 씨앗은 대추리를 박제된 기억으로 남겨 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저항의 방식과 의미를 계속 되새김질 하면서 매 순간 살아있는 저항으로 만들어 갈 때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대추리를 만났던 모든 사람들, 혹은 대추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삶의 소중함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이런 씨앗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계속 마침표를 찍지 않고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래서 모두 살아 숨 쉬고 춤추며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오길 바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울게 되더라도,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웃을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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