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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0호 미디어꼼꼼보기] 살기위해 죽는 것과 존재방식에 대한 두 이야기 - 씨 인사이드 / 잠수종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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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0호 / 2008년 4월 17일

 

 

살기위해 죽는 것과 존재방식에 대한 두 이야기
- 씨 인사이드 / 잠수종과 나비 


김태황 (문화디자인 Plan-B)
 
20년 넘게 습관처럼 영화관을 찾다가 문득 어느 날. ‘혹시 내가 1년간 봐야하는 적정량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 관람편수를 채우기 위해 내 몸이 저절로 영화관으로 향하고 있다면 좀 무서워지는 군' 이런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만큼 “영화보기” 행위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특히 영화관이라는 환경을 매우 좋아하여, 영화와 관련된 문화비용으로 지출되는 금액이 만만치 않더라. 그런데 내가 남모르게 지키는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물론 그 원칙이 깨질 때도 있다). 관객이 많은 날은 택하지 않는다는 것과 영화감상에 방해를 주지 않도록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동안 신작리뷰를 업으로 삼고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1년 정도 일하다 그만 두었다. 이유는 정말 간단했다. 시사회장에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북적이는 곳에서 영화를 보고 오면 항상 머리가 아프고 영화이외의 다른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스크린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 배우들이 오거나, 프레스키트 또는 홍보상품을 포함하여 뭔가 특별한 선물들이 내 손에 쥐어졌다. 그러면 어김없이 마케팅의 산물인 “멋있어 보이는 something”에 더 이끌리더란 말이다. 그런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심지가 굳지 못하다는 의미이겠지만, 자기 관찰을 통해서 그런 얄팍함을 깨달았기에 영화 보는 행위자체에 더 열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관을 찾아가고, 비용을 지불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영화를 보는 방법이다.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본다면 리뷰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읽는 것이 도움이 될 테고, 영화에 더 많은 애정이 생긴다면 비슷한 환경에서 영화를 두 세 번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리라.


몇 달 전 두 편의 영화를 거의 연작처럼 보게 되었다. 한편은 스페인에서 온 “씨 인사이드Mar Adentro”였고, 다른 한편은 프랑스에서 온 “잠수종과 나비 Le Scaphandre Et Papillon”다. 한편은 스크린에서 내릴 때에 보았고, 다른 한편은 개봉 3일후에 보았다. 두 영화는 모두 한 번 더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두 영화엔 닮은 구석이 있다. 우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둘째로는 이야기의 주요인물이 전신마비라는 점. 셋째 세상과의 소통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것이 다르다. “씨 인사이드”의 인물은 죽음을 사는 방법 중 하나로 선택하고 싶어 하지만, “잠수종과 나비”의 인물은 생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죽는다.




씨 인사이드는 떼시스(Tesis. 1996)나 오픈 유어 아이즈(Abre Los Ojos. 1997), 디 아더스(The Others. 2001)같은 음산 또는 기괴함을 세련된 이야기로 풀어가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다. 뭐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영화를 선택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는 전작의 궤적이 거의 묻어 있지 않아서 좀 의아해 할 만하겠다. (이래서 사전정보 없이 영화 보는 것이 훨씬 즐거운 문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리얼리티처럼 드라마틱한 환타지는 없다던가...? 참 웃기는 말이지만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라몬은 25년 넘게 침대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다. 어떻게 전신마비가 되었는가가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다만 그의 현재. 즉,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싶을 때 소리쳐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그 삶의 모습 자체가 중요하다. 속담이지만 신랄한 표현인 ‘긴 병에 효자 없다'란 말이 있다. 가족은 그를 언제까지 어느 만큼까지 옆에서 도와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병자나 간병인이나 암담해 진다. 그때 자기의지를 내 몸으로 실행하지 못하는 한계상황과 처지에서 히스테릭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공격하고 큰소리쳐서 존재감을 만든다. 그렇게 방어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책하다...자기합리를 만들다가...인간관계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그러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부질없어 질 때 상상을 시작한다. 영화 속에선 라몬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다소 진부해 보이는 상상을 담고 있다. 그 이미지가 현실에 발을 딛고 뚜벅거리며 걷게 하는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영화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인이다. 한 명은 여차 저차 한 경로를 통해 그를 알게 되어 삶을 응원하는 로사이며, 다른 한명은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어 서서히 자기인식과 기억을 잃어가는 여인 줄리아다. 줄리아는 라몬에게 생의 반영체다. 치명적인 질환으로 고생하는 것에 대한 동질감 따위가 아니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진행형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서 비롯된 감정적 교류로 읽힌다. 영화의 결말은 라몬이 안락사를 결정하고, 그의 안락사를 인간권리라고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단체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한편의 짧은 비디오 클립 속에 자기모습을 담으면서 죽음이라는 “잘 사는 방법”을 선택한다.


또 한편의 영화 잠수종의 나비.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깊은 호흡이 내쉬어지더라. 영화의 내용에 한숨을 쉰 것도 아니고 감동적이어서 호흡조절을 한 것도 아니다. 솔직히 잠수종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림을 보고서야 잠수종(diving bell)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으니까 말이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20일 되었다는 어떤 동료에게 추천을 받으면서 제목에 대해 다시 물었지만 “scaphandre”를 우리말로 뭐라 번역해야 할지 난감해 하더라. 그 만큼 낯선 단어임에 분명하다- 생각해 보니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약간의 폐소공포는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침대 밑을 청소하려고 들어갔다가 어깨에 쥐가 나면 곧게 일어서지 못해서 생기는 통제범위를 벗어난 몸에 대한 신체구속형 공포. 엘리베이터가 순간 멈췄을 때 호흡이 무거워짐을 느끼거나, 갇힌 공간에서 상황이 주는 진공상태 같은 것 말이다. 잠수종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압력을 이기기기 위해 제작된 거대한 갑옷에는 신체가 말 그대로 “감금”되어 있고,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연결된 기다란 파이프에는 공기펌프가 연결되어 있다. 영화에서 잠수종이 이미지로 등장하면 실제 인물이었던 보비의 상황이 극단적으로 묘사된다. 잠수종 안에서 보비의 모습은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외부에서 공급해 주는 공기가 없으면 30분도 생존이 어렵다. 게다가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헬멧의 투명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눈동자를 굴리며 구경할 뿐이다. 패션잡지 ELLE의 편집장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식의 감금에 놓여졌을 때 그 막연한 공포감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영화의 결론은 한쪽 눈동자로 의사소통하여 책을 한권 쓰고 생을 마감한다.


라몬과 보비가 자기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선택한 소통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말과 글의 차이다. 말은 태도를 만들지만 글은 사고의 범주를 만든다. 말은 물리적이라면 글은 화학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또한 말은 비선형성에 가깝지만 글은 선형적이다. 말은 어감과 목소리를 담고 있는 라이브이기 때문일 테고, 글은 생각을 얽어서 문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인식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적 가치와 존재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면서도 행복할 권리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인간은 어떻게 행복을 추구하는가. 60억의 인구가 60억 가지의 존재방식을 가지고 살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대신 다른 삶으로 전환하려는 절실함이 생겼을 때 인간은 사회성원에서 타자에 대한 아주 적극적인 모방을 시도하게 된다. 존경하는 사람은 위인전 속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 내가 지향하고 있는 삶을 나보다 먼저 살아간 가까운 사람일 때가 많다. 그것이 어떤 패턴화된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버전의 삶에 대한 절실한 필요가 만들어낸 모방이란 뜻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행복이라는 추상과 관념은 정의내리기 힘들지만,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조금 달리 사용하면 어떨까. 예를 들어 “친구와 삼 개월의 여행이 주는 행복”이나 “내 아이가 첫 번째 돌아눕기에 성공했을 때의 행복”이라고 하면 관념이 구체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참 행복하게 자랐다고 본다. 집이 있었고, 나를 케어해줄 어머니가 있었고, 형제가 있었으며,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고 계셨으니 말이다. 그게 그 당시 행복의 조건이었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최소한 내일 먹을 것이 없어서 벌벌 떨지 않는 사람들을 다들 부러워했으니까. 그런 조건으로 현재의 나를 설명하자면 난 최고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 생각해 보니 지금 가진 옷은 잘 관리하고 손질해 입으면 평생 입을 수 있을 만큼을 가지고 있더라. 지금 가진 돈만 가지고도 이 한 몸 평생을 먹고살 음식은 구매하겠더라. 그렇다면 나는 행복에 겨워야 하는가? 행복하다는 감정은 결국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는 언어유희가 아니라, 실재하고 있는 점성-viscosity-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 아주 기분 나쁘고 끈적하게 붙어 있는 욕망 같은 것에 가깝다. 씨 인사이드의 라몬에게 행복이란 사랑하는 가족에게 원망이 남지 않는 것이었고, 25년이 넘는 시간동안 몸 안에 구속된 자유의지를 하루라도 더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이 라몬의 행복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삶을 지속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과 지루한 말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라몬의 행복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보비의 행복은 패션잡지의 편집장으로 쿨하게 사는 현대인이었던 자기 생활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하고 소통을 위해 서로가 집중해주는 삶이 열렸다는 데 있다. 모두가 자기의 휠체어에 가까이 다가와서 그와 소통하기 위해 눈을 맞추고 인사하고 애정을 확인시켜준다. 가족들과 떠난 잠깐의 소풍에서 지금까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던 내 아이의 존재가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보비의 행복이다. 이런 이유가 보비로 하여금 자기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회적 소통을 시도하게 만든다.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다름으로 인정하다”라는 것은 꽤나 추상적인 언어다. 그건 행동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실천이 있을 때 의미가 확보된다. 악인이 악행을 하는 게 아니라, 악행한 사람을 악인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말은 번들거리게 포장할 수 있어도 행동은 그 자체로 이미 의미체계를 형성한다. 씨 인사이드의 라몬이 안락사를 주장하면서...자기 삶에 대한 동정을 바라면서...사회운동을 하면서 죽는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잠수종과 나비에 등장하는 보비는 삶을 찬양하면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면서 삶을 진행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그 자체로 인간존재의 다름을 확인시켜 준다. 우린 어떻게 행동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 두 편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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