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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9호 미디어꼼꼼보기] 우리가 지지 않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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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9호 / 2009년 3월 17일

 

 

우리가 지지 않아야 할 이유



김윤진 (ACT! 편집위원)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그러니까, 사실 난 영화관을 나오면서부터 후회를 했다. 내가 왜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고 했을까. 눈물을 화장지로 쿡쿡 찍어내며 영화를 봤던 나였다. 고개를 저었다. 글을 쓴다는 게 가끔은 어떤 삶에 대한 기만일 수가 있다. 송신도 할머니는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쓰려던 기자에게 ‘네가 제대로나 쓸 수 있겠냐'고 호통을 쳤다. 전쟁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아직 어린, 무엇보다 남성인 네가 얼마나 알겠느냐고 물어보면 뭐라 답할까. 그래도 글을 쓰는 건, 이 다큐멘터리와 할머니가 결국 이야기하는 그 한마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그녀의 외침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지지 않아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용감했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에 기대어, 나는 이 글을 쓴다.




어떤 정의(正義)


칼리아예프는 ‘인민의 적'인 대공이 타고 있던 마차에 끝내 폭탄을 던지지 못했다. 어쩌면 혁명의 순간이 자신의 코끝에서 사라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마차에는 대공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대공 옆에는 그의 조카들도 타고 있었던 것이다. 칼리아예프는, 자신의 눈에 아이들만 보였다고 말했다. 그 순간 그에게는 분노의 대상도, 혁명의 이상도, 자신이 갖고 있던 폭탄을 던질 근거가 될 수 없었다.
냉철한 혁명가 스테판이 말한다. 우리의 희생과 승리로 폭정에서 해방된 러시아를 건설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인간이 지배자와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런 어린애 둘 정도 죽는 게 얼마나 문제가 되겠냐고. 하지만 도라는 그의 말에 반박한다. 만약에 우리가 던진 폭탄에 어린애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단 한순간이라도 허용한다면, 그 때야말로 혁명조직의 권위도 영향력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알베르 카뮈가 쓴 <정의의 사람들>에 나온 내용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의로운 전쟁이 있을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전쟁이 도라의 반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무력 침공했다. 죽은 사람의 수는 네 자리를 훌쩍 넘어섰다. 그 중 40%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부상자도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어디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의 수로만 전쟁의 상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전쟁은 죽음 이외에도 짙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종종 그 상흔은 아물지 않은 채 누군가의 평생을 따라다니기도 한다. 송신도 할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의 잉태와 살아있는 죽음


이 영화를 보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두 씬이 있었다. 그 두 씬은 공교롭게도 할머니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삶과 죽음에 관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먼저 하나. ‘재일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모임)'에서 1991년, 송신도 할머니를 처음으로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어느 때. 그녀가 위안부가 되어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하던 어느 씬.
열여섯의 송신도는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신혼 첫날밤에 가출한다. 그녀는 정신대가 뭔지도 몰랐지만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소리에, 일본군을 따라갔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된 계기다. 하지만, 일본군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 간 그녀에게 끔찍한 생활이 시작됐다.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서 수치와 모멸감만으로 살아가야했다. 그녀는 부끄러웠다고 했다. 처음 피가 났을 때는 어쩔 줄 몰랐다고 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그녀는 자신이 왜 그렇게 존재하는지 모른 채 일본군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그런 일도 있었다. 자궁 속에서 7개월 된 아이가 죽은 것이다. 그곳은 바로 옆에서 총탄이 쏟아지고, 죽는다는 게 사는 것만큼 예사였던 전쟁터의 한복판이었다. 어찌할 수가 없기에 그녀는 자기 안에서 죽어버린 그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꺼내야했다고 말했다. 당연히 죽을 것처럼 아팠다고 했다. 하지만 아픈 게 어디 몸뿐이었을까. 아이도 자신이 직접 묻어야 했다. 죽음을 잉태했던 그녀는 아마 평생 동안 전쟁 같은 기억을 안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머지 다른 하나. 송신도 할머니는 지원모임과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강연활동을 했다. 그 중 어느 한 강연회의 씬.
어느 누구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고, 거칠지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줄 아는 그녀다. 한데 그녀가 강연장에 들어오는 것마저 망설이고 조심하던 때가 있었다. (영화에 대한 내 기억이 맞는다면)1994년, 어느 여고생들 앞에서 있었던 강연회의 일이다.
그녀는 강연회가 열린 교실에 들어와 의자에 앉아서도 얼마 동안은 말이 없었다. 이전에도 숱하게 했던 다른 강연회와 다를 바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꺼낼까 하다가도, 잘 꺼내지 못했다. 대신 울먹이고 있었다. 자신이 전쟁과 폭력의 참혹함에 대해 전존재로 부딪혀야 했던 그날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때 그녀도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여고생들과 비슷한 나이의 소녀였다. 그녀는 어린 학생들에게 열여섯의 자신을 겹쳐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한참 뒤에 말했다. 어린 너희들을 위해서라도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더 이상 전쟁으로 열여섯들의 빛나는 순간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죽음을 잉태해야 했고, 살아있어도 죽음 같았을 생의 아이러니가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삶 속에, 필름의 두 씬 속에,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삶에 아이러니를 가져다 준 건 결국 전쟁이었다.




노란 꽃이 피었던 슬픈 일요일들


송신도 할머니가 말했다. 그 땐, 언제나 일요일이 되면 노란 꽃이 피는 것 같았다고. 당시 일본군의 군복 색은 노란색이었다. 휴일인 일요일이 되면 위안부를 찾는 일본군이 많아졌다. 수많은 노란색들이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 노란 꽃이 피던 일요일. 탈색되지도 않는 기억은 그렇게 그대로 오래 그녀에게 남았다.


어쩌면 그녀의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즐거움도, 그 시절의 흔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게 많지 않을까. 전쟁과 위안부의 생활로 삶의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어쩌면 그게 당연할지 모르겠다. 거대한 트라우마는 삶의 곳곳을 비틀고 침투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녀에게는 일본에서 만나 평생 함께 살았던 조선인 남자가 있었다.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까지 존경하던 그녀다. 그가 먼저 죽은 뒤에도 분향을 피우며 잊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살면서 한 번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슬프게도 그건 그녀에게 남은 전쟁의 흔적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 그녀는 기쁘면 기쁜 대로 노래를 불렀다. 그 때 그 때 개사한 형식도 있었지만, 언제나 멜로디는 일본의 군가의 그것이었다. 지원모임 기념행사나 기자회견 등에서도, 한국의 일본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도, 그녀는 예전 노래-군가를 불렀다. 기쁨에도, 슬픔에도, 자조에도, 개인의 기억들이 되어 지층처럼 굳게 쌓여버린 역사들이 조금씩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가 용감한 건, 그런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세상에 꺼내놓았단 사실에 있었다. 이미 굳어져버린 지층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그것에 대해 그녀는 말했다. 도저히 분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고.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상처를 준 일본, 그리고 전쟁을 용서할 수 없다고. 그녀와 지원모임이 일본 정부를 향해 요구했던 것은 전쟁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아니었다. 물질적인 보상도 아니었다. 다만,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 그게 전부였다.
노란 꽃들이 짙었던 어느 일요일들에서 벗어나기. 그건 비단 송신도 할머니의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일본 내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어두웠던 과거를 밝히려던 평화주의자들-지원모임의 문제이기도 했다. 또 그건, 역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떤 전쟁도 거부하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어떤 정의(正義)'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동안의 법적 투쟁 과정을 지날 수 있었던 동력 또한, 근본적으로 전쟁에 대한 반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 10여 년은 수많은 개인들의 삶 전체를 뒤흔들었던 전쟁의 과오를 묻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일본 지방법원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었다. 고등법원과 최고법원은 당시 일본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시효가 지난 사건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거나 사죄할 의무가 없다.”는 동일한 답을 던졌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것 하나뿐이었는데도.
최고법원의 확정 판결 이후 기자회견에서 송신도 할머니는 말한다. 함께 해준 여러분에게 고맙다고. 국가는 사과를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재판에서는 졌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여느 때처럼 크고 당당한 목소리다. 잠시 눈물을 쓰윽 훔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군가를 개사한 노래를 즉석에서 부른다. 바보 같은 국가와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전쟁에 대한 노래. 전쟁을 지나왔던 이로서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진정성을 담을 수 있는 반대의 목소리를 가장 유쾌한 버전으로 풀어낸다. 그리고 그건 송신도 할머니와 지원모임이 10년 동안 내왔던 목소리기도 했다.


나.의.마.음.은.지.지.않.았.다.는 그녀의 말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계속 맴돌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죽음과 침묵을 깨고 나왔던 그녀의 일갈에 관한 10년의 기록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아이러니를 지나온 누군가들의, 반전을 노래하는 영화다. 그건 동시에 우리에게 ‘어떤 정의'를 생각하게 만든다.
가끔씩 그 정의를 지켜내지 못해 좌절하기도 하는 우리다. 하지만 좌절한 채 거기에서 멈춰버리면 정말 거기에서부터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던 송신도 그녀의 말은, 우리가 계속해서 지지 않고 싸워가야 할 이유이자 실제적인 대답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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