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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7호 미디어꼼꼼보기] 진짜 이유 - 켄 로치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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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7호 / 2008년 12월 8일

 

 

진짜 이유
- 켄 로치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 


손 장 훈 (ACT! 편집위원)
 
변명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 황인숙, [삶] 중에서


황인숙의 시 <삶>에는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삶을 지속하는 이유가 주체의 능동적 노력으로 성취해야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무엇'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이유‘를 만들어낸다. 변명이다.




이유의 변화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자유로운 세계]의 주인공 앤지(키어스턴 워레잉)도 그러하다. 그는 이전의 회사에서 해고당하자 무허가 이주노동자 인력사무소를 차린다. 자신이 해왔던 일의 경력을 살리면서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던 중 한 업체의 사장이 은밀한 거래를 제안한다. 정식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게을리 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불법 이주노동자들에게 위조 여권을 만들어 일을 시키는 것이 어떠하겠는냐는 것이다. 갈등하던 그가 결국 불법 이주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보낸다. 결심의 계기는 이란 출신의 불법 이주자인 마흐무드의 어려운 삶을 목격한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호의'였다.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에서는 사적인 호의가 쉽게 다른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 그는 4만 파운드의 돈을 떼이게 되자 변한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자신이 데려올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숙소를 위해서 마흐무드가 살던 곳을 이민국에 신고하기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동업자 로즈(줄리엣 엘리스)에게 ‘사무소 이전 비용을 마련해야 하고, 아들 제이미가 가난하지 않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유'가 바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이유는 변명이었다. 그가 처해 있는 불안정한 노동환경이 화폐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그 자리를 벗어나보려 했던 것이 사업을 시작하고, 지속하는 이유였다.





화폐에 대한 욕망


그가 가진 욕망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돈'을 가짐으로써 확보된다. 30년 동안 직장에서 잘릴 위험 없이 안정적으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아버지 세대와는 다르게 앤지는 삼십 대 초반까지 서른 개가 넘는 직장을 다녔다. 불안정한 노동으로 미래의 가능성이 좌절당하고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노동자들에게 화폐에 대한 욕망은 더욱 간절하다.
영국은 1970년대 말 대처 수상의 취임 이후, 이른바 ‘영국병'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정책을 펼친다. 대처리즘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한 기업 이윤의 극대화와 복지재정의 축소를 통한 재정 적자 줄이기가 그것이다. 그 결과 안정적인 수입과 생존의 사회적 안전판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사회에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적이다. 앤지의 욕망은 결국 ‘구조'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나쁜 사람


물론 현실에서는 앤지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모두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불법 이주 노동자를 채용하고, 그들의 임금을 체불하며,
 이민국에 신고하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된 것은 그의 도덕성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페인의 역사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는 “인간에게 본성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역사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듯이 단지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켄 로치 감독은 앤지라는 인물을 통해서 ‘역사'를 보여주려 한다. 그에게 응축되어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와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이다.




자유로운 세계


영화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운 세계'이다. 자유가 주어져 개인이 주체적인 힘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살 수 있는 세계라는 언명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내몰린 현실이 있다. 결국 황인숙의 시 [삶]의 ‘외상값'과 같은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주어진' 이유를 속으로 간직한 채 끊임없이 변명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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