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61호 현장] 퍼블릭액세스, 지역 말고 또 어디 쓸 때가 있나?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1호 / 2009년 5월 20일

 

 

퍼블릭액세스, 지역 말고 또 어디 쓸 때가 있나?
 
권용협(평상필름, 부산MBC 퍼블릭액세스 운영협의회 간사)
 
지난 호에서 이경희 씨가 쓴 글을 보면서 이 글을 좀 더 솔직하게 쓸 수도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래, 그렇게 하련다.


‘부산의 실험을 이렇게 공유할 정도로 의미가 있나? 아니면 적어도 이 글이, 읽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을 수 있나? 본인이 미디어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퍼블릭액세스가 가지는 의미는 어디쯤일까?'


한때는 이런 의문들이 필요 없던 때가 있었다. 중앙 집중화된 정치구조에 종속된 문화구조, 지역에서 이것 좀 깨 보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무기로 들 수 있었을까? 그것이 미디어가 아닐까라고, 미디어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해 준 그 최초의 사람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작년 혹은 재작년에 강연회, 토론회, 워크숍, 술자리 등에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퍼블릭액세스의 슬로건-넓게는 미디어운동의 슬로건-은 ‘지역성'이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왜 그렇게 당연한 말을 저렇게 어렵게 그래프를 그려가면서 할까'든지, ‘그게 아니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어서 저렇게 열심히 얘기하는 걸까'하는 마음이었다. 반대의견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혹 질문이라도 하면 나라도 가서 따지겠다는 맘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이 반문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시 지역에서 일상을 보내면서는 잊어버렸다. 너무 당연하니까 별로 중요한 슬로건이 아니었다. 중요한 슬로건이 아니니까 잊어버리는 게 당연했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왜 이런 당연한 말조차 중앙에서 활동하는 사람한테서 들어야 하는지. 또 그게 도그마처럼 실천되기를 바라는 그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지역'으로 지역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삐뚤어지고 싶은 맘까지 들었다.


이렇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미디어운동을 하면서 타 지역의 활동가들을 만나고 의견을 듣고 논의를 같이 했지만, 오로지 고민은 부산에만 국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그래서 서울을 하나의 지역으로 본다는 말에 얼토당토하지 않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도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 ‘지역 속으로!'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크게 진정성이 느껴지진 않았다.


서울은 지도위에나 지역이지, 실제로는 그냥 중앙이다. 이것은 제도권 내에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사업집행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촛불봉기가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그나마 착한(?) 중앙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지역에서 느끼는 정도나 방향수립에서의 의견 수렴을 위해서 고민하고,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여하고 있다. 또 지역에서는 지역대로 종속구조를 극복하려고 중앙에서 주도하는 연대말고, 자발적인 지역 간 연대나, 중앙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자치-하려는 시도나 모색의 노력들이 있었다.


부산에서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던 때. 이런 노력의 결실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3년 반이 흘렀다. 몹시 피곤하다. 지역과 중앙이라는 구도를 전제로 두고, 모색하는 극복의 노력들과 그 결과조차 피로감으로 흐릿하게 보인다.


부산 사람들이 바라보는 부산, 부산에 살면서 느끼는 기쁨, 고백, 얘기하고 싶은 것들에 꽤나 큰 반향을 부를 수 있는 소통 도구가 주어진다면... 퍼블릭액세스가 권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단지 우리끼리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중앙이라는 매개체를 거쳐서 얘기를 해야 하는 미련한 짓에 파열음이라도 낼 수 있겠다는 희망만으로도 영화창작을 잠시 접고 뛰어들어야만 한다는 동기 부여로는 충분했다. 부산MBC 퍼블릭액세스 운영협의회 간사자리는 그런 마음으로 맡았다.


피로도가 높아지기 전, 그러니까 모든 것이 새롭고 희망이 보이고, 좀 과장하면, 지역 안에서 가능성과 관심으로 술렁거리던 때, 부산MBC를 통한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은 프라임타임은 아니었지만, 라디오 청취율이 높은 금요일 퇴근시간이었고, TV는 느즈막이 브런치를 하면서 온가족이 시청할 수 있는 일요일 오전 시간이었다.


지역민, 특히 사회적 의제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작의 주체여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 사람들이 제작할 수 있는 제작지원시스템을 구축하려고 지원단을 꾸리고, 지역시민사회, 노조, 활동가들이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일들을 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편으로는 방송국이 애초에 바랬던 퍼블릭액세스 상을 조금씩 수정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영상에 대해 보수적인 접근을 고수하는 지역 단체들에게 제작의 주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들을 갖게 하거나 마음을 돌리게 할 전범을 만드느라 먼저 뛰어들 수 있는 단체를 물색하고 접근하고 또 교육을 하고 지원단과 다리를 놓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상제작 역량이 필요한 제작지원팀의 역량을 기르기 위한 워크숍이나 제작지원활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반 강제적 세뇌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는 부산MBC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을 중요한 의제 전달 수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어쩔 때는 두 달 치 라디오 의제가 밀려서 시의성을 놓쳐 신청했던 단체로부터 욕을 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부산MBC 퍼블릭액세스 운영협의회 때마다 연성소재를 좀 섞어야 하지 않냐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지금도 회의 때마다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리고 본방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다시듣기를 하는 횟수도 상당했다. 몇 백까지 카운터 되는 의제들은 어김없이 전화 의견도 오곤 했다.


TV액세스 프로그램에서는 반향이 더 강했다. 늘 외근이 많은 터라 휴대전화로 착신을 하다보니 그야말로 브런치를 먹으면서 눈꼽만 겨우 떼고 방송을 볼 때, 끝나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리기도 했다. 그럴 때는 “그 따위 편향적 주장을 방송으로 보내도 되는 거냐.”는 항의마저 아름다운 새소리로 들렸다. 해당 관청에서 공무원이 부드럽게 항의하는 경우는 양반이고, 이해대립이 큰 의제에 대해서는 공기업이 영상제작을 해서 퍼블릭액세스인 척-억지로 완성도를 낮춘 전문제작자의 작품으로- 보내오는 경우도 있었다. 방송국으로 압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애꿎은 담당PD의 하소연도 들어야 했다.


선정심사라는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고, 신청한 영상물을 시간관계상, 아니면 운영협의회의 합의결과로 인해 수정을 요구하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방송국의 인식변화를 동반하면서, 활동가들의 발굴 육성 수단으로, 지역의제의 소통창구로써 역할을 잡아가면서 편성시간의 확대라는 중차대한 목표에 접근해 갔다. 한편으로는 굳이 부산이라는 거대도시 단위의 사회적 의제가 아니더라도 더 작은 지역의 일상과 연결된 이야기, 즉 소규모 공동체 구성과 유지, 소통을 위한 매개역할로 액세스의 전략을 확대해 나갔다. 우리 동네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공동체는 자부심이 상승했고, 내부 전략에 더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풀뿌리공동체 건설 붐이 한창인 지금, 액세스는 풀뿌리공동체의 매체, 혹은 상호간의 매개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제작지원팀 내에서 이것을 정확하게 문장의 형태로 합의하지는 않았다. 풀뿌리공동체에 복무한다는 상의 수위에 대해 의견이 다양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공동체들은 벌써 VJ특공대류의 접근으로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해서, 영상의 접근에 더욱 보수적일 때도 있었다.) 어느 곳이라도 성과가 나오면, 그랬다는 소식을 접하면 시각은 달라지니까, 그래 어디라도 접근해서 시작하자. 그리고 조금씩 성과들이 보였다.


여러 동네가 알리고 싶은 소식을 내부에도 또 외부에도 전하고 피드백할 수 있는 구조를 디자인해야 한다. 요구가 커지면서 그것이 시청취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그러면 방송국에서 편성시간 확대에 대해 좀 더 전향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것이고, 퍼블릭액세스가 부산에서 상승곡선에 올라타고 순항하는 기분 좋은 디자인은 일의 피로감을 지우는 나만의 박카스가 되었다.


그때쯤에 정권이 바뀌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연속으로 시정명령을 받고, 이행보고서를 내야한다는 시점에서 그동안 전향적인 방송국의 인식은 별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결국 편성축소와 변방 시간대로의 조정에 운영협의회가 합의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처럼 라디오가 토요일 출근시간대에 주당 10분, TV가 매월 마지막 월요일 오후 3시에 50분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자 지역의 의제생산 그룹에서는 부산MBC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이 의제 전달 수단으로써 의미가 좀 적어졌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랬다. 시청율이나 참여도라는 측면에서 기대하는 바가 상당부분 훼손되어 버렸다. 라디오 다시 듣기는 이제 매회 조회숫자 10을 오락가락하고 있다. 제작지원팀은 제작지원을 의뢰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만나기 힘들어졌다. 방송국은 외부지원금도 없이 꾸려오던 프로그램으로 인해 내부로부터 회의의 목소리가 커졌다. 불과 수개월 전, 존폐를 두고 고심한 적도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직접적으로 폐지라는 용어를 거론했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나가고 있을 때조차 우리가 원하던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태로 우리는 왜 이 짓을 계속하고 있을까?


피로감은 일이 많아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일이 이 지경이 되어서 시들해진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기분 좋게 상상했던 모습에서 멀어지고, 퍼블릭액세스가 지역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어떻게 다시 구현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앞으로 고달파질 여정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퍼블릭액세스에 대한 다양한 정의만큼이나 현장에서 퍼블릭액세스 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목표도 다양하겠지? 활동의 축은 또 어떨까? 혹여 어디서는 매번 무섭게 다가오는 방영일에 쫓겨서 작품 시간 맞추는 일로 스스로를 소모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산MBC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에서 라디오는 그나마 참여가 용이하다는 이유로 의제가 끊어지지는 않고 있고, TV는 그렇게나 담당PD가 원하던 연성소재로 만들어서 신청하는 작품들이 크게 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더러는 미디어센터의 존재를 원인으로 들기도 한다. 최소한 퍼블릭액세스 활동가가 방송국 PD보조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타 지역보다는 좀 나은건가.


제작지원팀은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최소한 이것만은 다루어야 한다고 해서, 사회적 의제를 직접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팀원은 느리지만 숫자가 조금씩 늘고 있다. 가지고 있는 자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풍부하다. 지금은 또 다른 디자인이 필요하다. 어쩌면 디자인은 활동의 전 과정에서 늘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어떤 전략으로 퍼블릭액세스를 고민해서 해답을 제시할지에 별 관심 없다. 부산의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재구성될 가능성을 줄지 아닐지도 관심 밖이다. 우리 동네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도구를 획득하고 일상에서 정치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길 바란다.


또한 2009년 촛불이 다시 지펴지기를 바란다. “청계광장 소라기둥에서 모입시다”라는 불가능한 제안이 아니라, “서면 태화쇼핑 앞에서 모입시다” 였으면 한다. 지금은 ‘청계광장에서 모여야 할 때다 아니다'가 아니라 ‘서면으로 모여야 할 때다 아니다'로 뜨거워지길 바란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모였다더라. 우리가 가만있어서 되겠나?”가 아니라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 부산지역공청회를 보고도 가만있을 수 있나?”, “반송에 대형마트가 들어온다 카드라, 우리 다 죽일라카나?”, “낙동강 정비한다고 김해 지역에서 양해각서를 벌써 작성 했단다. 그 밭떼기가 지들끼가?”, “우리동네 마을잔치 함 참가해 보이소. 딴데서 왔다고 괄세하고 그라지는 않십니더. 괜찮다 싶으면 가서 그 동네서도 함 해보구요.” 뭐 이런 이야기들로 꾸려지는 것이 지역의 의사소통이 아닐까?


미디어운동의 전체 전략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성”은 퍼블릭액세스의 철저한, 변함없는 기본 전략이어야 한다. 퍼블릭액세스는 수단이다. 퍼블릭액세스가 잘 되고 있는(?) 지역을 벤치마킹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이다. 그 지역에서 지역성을 구현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소통도구를 찾거나 만들면 된다. 그 중에 방송을 통한 퍼블릭액세스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거고, 퍼블릭액세스를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우면 과감하게 집어던지고 다른 것을 해야한다. “퍼블릭액세스? 한때, 이런 일을 하려고 사용했던 도구가 있었지.”가 될지도 모르지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고, 퍼블릭액세스는 아직 결과가 다 나온 실험이 아니다. 피곤하지만 또 붙잡고 있는 이유이다.


그럼 전국 방송이었던 RTV는? 이경희씨와 달리 RTV에 대해서는 안타까움 이상 들지 않았던 것은 아마 퍼블릭액세스는 철저하게 지역단위의 의사소통도구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전국을 하나로 묶는 TV퍼블릭액세스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IPTV 가입자 수가 케이블처럼 급격하게 확대되고 나면 플랫폼부터 다시 전략을 짜야 할 테니, 이 문제는 넘어가고, 애초에 지역에서 소통수단으로 인식할 수 없었던 RTV였고, RTV가 가져다 준 것이 부산의 퍼블릭액세스 운동을 하려는 제작지원팀의 결속력과 자기인식에 준 도움과 헌신적인 액션V 활동가들에게 받은 감동 정도라면 다른 방식으로 그 역할을 이동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적어도 퍼블릭액세스의 역할로만 국한해서 RTV를 평가한다면, 없어도 부산에서는 별 아쉬울 것이 없다. 퍼블릭액세스는 방송매체의 파급력이 그나마 유지되는 지금 상태에서 지역의 중요한 소통도구 중에 하나일 뿐이니까. 네이버(Naver) 넘어가면 다음(Daum)에 가고 거기도 아니면 유투브(Youtube)에 가면 된다.


‘지역 속으로!'를 외쳤던 중앙 사람들은 이제 중앙의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중앙의 사명이다. ‘중앙의 정책에 일사분란하게 동의하고 실천하는 지역'의 역할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역에서 요구하는 것을 일사분란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는 중앙'의 역할에 더 신경써야 한다. 퍼블릭액세스 전략은 중앙에서 고민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ACT의 이번 기획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면 좋겠고 그 성과가 또 그렇게 정리되기를 바란다.□




부산MBC 퍼블릭액세스 http://cafe.naver.com/busanpa.cafe
방영물을 모아놓은 블로그 http://siminmedia.tistory.com/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