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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2호 읽을거리] 스스로 말하게 하라 : 공동체조직화를 위한 오래된, 그러나 변치 않는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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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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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2호 / 2009년 6월 29일

 

 

『스스로 말하게 하라』
: 공동체조직화를 위한 오래된, 그러나 변치 않는 방법론 




박채은 (ACT! 편집위원회)
 
처음 카메라를 들던 날, 나는 미디어는 권력의 탄압에 맞서 진실을 밝히는 무기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겼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카메라 드는 일을 관두었고(찍는 건 내 전공이 아닌 듯 했다. ^^;), 대신 내가 찍고자 했던 그 사람들이 직접 미디어를 만들도록 돕는 것, 그리고 그런 활동들이 가능해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정책 활동을 한동안 해왔다. 그 사이 미디어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조금씩 변화했다. 모순된 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 그것만이 대안미디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되찾고, 스스로 문제제기하고 사회를 바꾸기 위한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에도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아직 명쾌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관련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공동체 현장을 접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민중들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공동체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찾아간 주민운동 워크샵에서 나는 『스스로 말하게 하라』라는 아주 오래된 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 공동체에 대해서도, 민중교육에 대해서도, 조직화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이 책의 저자인 허병섭 선생은 가난한 자들의 삶터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얻은 경험들을 토대로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돕는 방법론으로서 민중교육(p.20)”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스스로 말하게 하라』: 20년만의 복간,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들


이 책은 1987년 초에 발간되었으나, 절판되었다가 2009년 4월에 복간되었다. 22년 만이다. 책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빈민운동을 하던 지식인들, 조직가들, 교육자들이 민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민중들 스스로 말하게 하기 위해서 지식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생한 공동체 현장의 목소리와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있다.


“누구도 민중이 민중운동의 주체임을 부인할 사람이 없다. 누가 민중으로 하여금 주체가 되게 할 것이며 어떻게 가능한가가 문제다. 지식인은 민중의 민중성을 돕는 그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당면한 민중운동의 과제는 민중으로 하여금 민중운동의 주체적 역량을 함양하도록 지식인이 어떻게 봉사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해 이 글들이 쓰였다.”(p.15)


70년대 초부터 빈민,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들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허병섭 선생 또한 목사로서 빈민선교를 위해 빈민 공동체들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빈민들과 함께 살며 공동체를 만들고 민중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민중교육을 실천하였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중신학의 태동과 빈민선교, 노동선교의 역사, 그리고 교회의 현실참여 과정에 대한 이론적, 역사적 논의와 더불어 이 과정에서 발전한 민중교육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당시 빈민 조직화 운동은 민중 현장에서 살고 경험하면서 생긴 신학적 통찰과 종교적 사명 속에서 교회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이어졌다.


“선교활동은 종래의 자선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지역사회 주민 스스로가 자기들의 문제를 의식하고 스스로 힘을 모아 조직화된 세력에 의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환경을 개선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현대 교회의 과제와 사명으로 받아들였다.”(p.35)


2부 민중교육을 위한 기초연구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은 <민중사실에 관한 연구>다. ‘민중사실'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은 민중의 감정, 언어, 의식, 관심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민중교육을 위해서는 민중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데, 허병섭 선생은 민중 사실들을 찾아내는 작업들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의 민중상을 그리고자 노동자들의 수기, 문집, 대화 기록, 노래 등을 분석하였다. 과학적이고, 치밀한 분석을 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 빈민들의 태도와 의식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분류하고 해석을 붙였다. 이 민중사실들에서 보여지는 70-80년대 청계천 빈민촌, 월곡동 달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고단하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그들의 삶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와 너무도 닮아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삶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다. 상황이나 시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민중교육방법론이 그것이다.




스스로 말하게 하기 위하여 : 방법론


이 책은 민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기 위한 아주 잘 짜여진 매뉴얼을 제시하지 않는다. ‘A의 상황에서는 X로 행동하라'거나 A->B->C->D 와 같은 선형적 발전 공식도 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지, 어떤 정형화된 틀에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환경과 조건에 다양하게 반응하고 사건의 진행 방향도 일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조직하고 민중들의 의식화를 위한 노력의 방향은 있다.


* 민중과 함께 산다는 것, 민중의 언어를 배우라!


- “민중의 생활 가까이 있어야 한다. 조용하고 한적해서 글쓰기 좋은 외딴 곳이 아니라 민중의 호흡과 소음이 들리는 그 삶의 현장에 방을 얻어서 살아야 한다.”(p.44)


- “현장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과 이상, 환상을 포기하고 현장의 가치관과 그 현실을 배운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빈민이 생활하는 생활수단을 따라 그들과 꼭 같은 생업을 찾아야 한다. 장사를 하거나 일일노동을 하여 그들의 삶을 몸으로 체험해야 한다.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그들의 감정에 몰입되기도 하고 그들의 생활철학과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p.53)


허병섭 선생 스스로 고백하듯이, 빈민지역에 방을 얻어 생활하고 사람들과 사귀었지만 머릿 속에 꽉 박혀 있는 먹물 근성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한다. 빈민들의 생활사(부부싸움, 술주정, 불결한 위생) 모든 현상에 대해 이론적 해석을 내리고 분석을 하는 먹물병, 이러다 보니 빈민들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없었고, 신나게 그들의 대화 속으로 빠져들 수 없었다. 먹물적 근성을 버리기 위한 해답은 결국 민중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으로 바뀌었다. 민중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살피고, 어린이, 청소년, 어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문제들을 파악하였다. 빈민 현장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몸으로 그들과 함께 섞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 공동체 조직화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 “교육의 과제를 수행한다고 했을 때 흔히 지식인이 민중을 향해 선각자적 지도성을 발휘하여 기발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교육은 이미 민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필자의 방에서 4명이 앉아서 바둑을 한 판씩 두고는 소주를 마시고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얼큰히 취하면 꾸밈없이 서로 비판하고 충고할 뿐만 아니라 따지기도 하고, 뼈 있는 경고를 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툭툭 털고 큰 웃음을 나누면서 헤어진다. 그러나 옳고 그릇됨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우리를 무시하거나 천대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다는 다짐을 하면서 안녕을 빌면서 심야의 골목길을 나선다. 필자가 이들과 함께 있었지만 한마디의 해설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야기의 독점을 막고 이야기의 흐름을 연결시켜 줄 뿐이다. 이런 일은 주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여러 곳에서 발생한다.”(p.288~289)


- “지식인이 현장에 살고 주민들을 신뢰하고 존경하고 섬기며 배우려는 자세로 있으면 주민들이 그 지식인을 찾아온다. 상담을 하러온다. 지식인이 민중 현장에서 신뢰를 획득하게 되면 자연발생적으로 여러 개의 소집단을 만나게 된다. 각 소집단의 주민 지도자의 능동적 참여를 전제로 민중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의 머릿속에 저금해 둔 지식을 배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 대화하는 법, 논리적 사고를 돕는 법, 자기 의견을 말하는 방법 등을 중심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프로그램 혹은 전수되는 지식도 주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 하는 범위 내에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교육이 일어나고 그 과정이 심화 발전되는 과정 속에서 주민은 조직화되기도 하며 힘을 얻게 되고 그 조직된 힘으로 새로운 과제와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이 곧 주민운동의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p.290)


『스스로 말하게 하라』에서 여러 차례 강조되는 것은 모든 가난한 사람(도시빈민, 노동자, 농민 등)들이 그들의 말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면 민중 스스로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이 과정을 매개하는 민중교육은 “삶에 직결된 문제, 구체적인 현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삶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살아 있는 교육(p.105)”이어야 한다. 3부와 4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빈민교육과 노동자와 교육에 대한 사례와 교육내용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성서에서 배우고 신앙을 실천하려는 입장에 서 있는 기독교 성직자의 활동기록, 교육보고서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분석되고 제시된 이론들이 다소 낯설더라고 선생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무게가 결코 가벼워지지 않을 것이다. 허병섭 선생이 이해를 구하듯이, 낭만적이라거나 비과학적이라거나, 경험주의자라거나 기타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해서는 언제든 토론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현재 투병 중에 계셔서 활동과 토론을 더 이어갈 수 없음이 안타깝다. 선생의 빠른 쾌유를 빈다.




부록 - 공동체 조직화를 위한 또 하나의 방법론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천적 입문서』


허병섭 선생보다 앞서 공동제 조직운동을 전개했던 미국의 빈민조직운동가 사울 알린스키의 책을 소개한다. 이 책 역시 1971년 발간된 책인데, 2008년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다. 이 책은 행동하는 사람들의 지침서로서, 사회운동, 주민운동, 공동체운동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매뉴얼이다. 알린스키는 서문에서 “많은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관련해서는 환상에 가득 차있다. 혁명을 위한 규칙은 없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규칙은 있다. 상황이나 시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몇 가지 중심 개념들이 존재한다. 현실적인 급진주의자가 되는 것과 말로만 하는 급진주의자가 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앞서 허병섭 선생이 파울로 프레이리의 의식화 이론에 기반을 둔 교육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알린스키는 ‘공동체 조직화'를 중요하다고 보았다. 알린스키는 지역사회 조직가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한편, 가난한 지역사회를 조직하는데 전념했다. “조직이란 힘없는 사람들의 힘을 키워주는 것, 자포자기해 버린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삶의 의욕을 선동하고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힘과 그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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