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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3호 읽을거리] ‘참여문화’로서의 대중문화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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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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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3호 / 2009년 7월 28일

 

 

‘참여문화’로서의 대중문화 바라보기
-『팬, 블로거, 게이머 : 참여 문화에 대한 탐색』 - 






한민유림 (꿈꾸는 청년백수)
 
‘남성적'인 SF장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여성적' 로맨스로 재탄생했을까?
많은 여성 팬들은 왜 동성애 판타지에 빠져드는 것일까?
동성애자들은 왜 「스타 트렉」에 열광하고 또 절망했을까?
디지털 미디어 혁명이 만들어낸 팬 문화의 세계시민주의와 집단지성, 새로운 지식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콜럼바인 총기 난사사건 이후 미국은 어떻게 게임문화를 희생양으로 삼았을까?
시대착오적인 ‘마녀사냥' 대신 세대 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없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모두 이 책, 『팬, 블로거, 게이머: 참여문화에 대한 탐색』(2006)에 들어있다. 이 책은 활발한 참여를 특징으로 하는 대중문화의 세 주체들- 팬, 블로거, 게이머에 초점을 맞추어 대중문화에 덧씌워진 오명을 벗기고 ‘참여문화'로서의 대중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들도 흥미롭지만, 사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걸출한 학자가 주로 매우 경박하다고 여겨지는 오락거리를 탐구하는데 일생을 바치고 있다'는 평을 듣는 저자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자신일 것이다. 첫 장을 펼치면 우리는 ‘어느 아카-팬(*주1)의 고백'이라는 서문에서부터 저자의 고백을 듣게 된다. ‘나는 대중문화의 팬이다'라고. 젠킨스는 그의 첫 번째 저서 『텍스트 밀렵꾼: TV 팬과 참여문화』(1992)에서 학자들 중 최초로 자신이 대중문화의 팬임을 ‘커밍아웃'했고, 이는 학계뿐 아니라 팬덤에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다. 학계로부터는 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었다는 비난이, 팬덤으로부터는 ‘팬들의 대변인'으로 추앙받거나 ‘학자 따위 필요 없다'는 반감이 쏟아졌다. 젠킨스가 가지고 있는 ‘팬이자 학자'라는 이중의 정체성은 그의 전공인 미디어 연구에서 독특한 혹은 전혀 새로운 위치와 관점, 그리고 실천을 만들어주었다. 위에 제기된 이 책이 해결해줄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직접 책을 통해 확인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중문화와 참여'라는 주제에 ‘젠킨스'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짧게나마 소개해보려 한다. 이 책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바로 저자 ‘젠킨스'이기 때문이다.




팬덤에 대한 미디어 연구, 그리고 아카팬


먼저, 미국에서 미디어 연구가 어떻게 발전되어왔는지 살펴보자. 젠킨스에 따르면 팬덤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세 시기로 나뉜다. 초기에 미디어 수용자 연구를 수행한 민족지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구 대상과는 다른 세상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도,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구자들은 자신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을 연구 과정이나 결과에서 최대한 배제하였고, 미디어 수용자들의 능동적 역할을 인식하면서도 팬들은 아직 정치적 활동을 수행할 정도로 수준이 높지는 않다고 여겼다. 이러한 민족지학자들과 ‘아카-팬' 사이에 과도기로서 젠킨스를 포함하는 두 번째 세대가 있다. 이 세대의 연구자들은 본인이 팬이기도 한 ‘내부자' 지식에 근거하여 팬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전환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능동/수동'과 ‘저항/동조'라는 축을 따라 팬 담론을 공식화했다. 팬들이 보여주는 능동적인 모습이나 저항을 기술하는 것이 이들이 팬덤에 덧씌워진 오명을 벗기는 방법이었다. 보수적인 학문틀을 고수하는 1세대 연구자들과 갈등하면서 이들은 팬으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팬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해갔다. 이렇게 팬이자 학자인 이들의 자기고백이 점차 증가하면서 ‘아카-팬' 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팬과 학자라는 두 정체성을 결합하는 데 더 이상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자기방어'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아카-팬'으로 하여금 팬덤의 내부적 모순이나 본질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아카-팬'으로서 젠킨스의 연구활동에 어떠한 특이점이 있을까? 이 책을 근거로 두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저술활동에 팬들의 직접적 참여 2) 팬 커뮤니티와 대중문화 산업에 젠킨스의 직접적 참여. 젠킨스의 저술활동에 대한 팬들의 참여는 『텍스트 밀렵꾼』때부터 시작되었다. 젠킨스는 집필과정에 문답적인 담화를 도입하여 팬들에게 초고를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최종원고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3장 “게이 섹스에 끌리는 평범한 여자들”은 젠킨스가 참여하고 있는 어느 슬래쉬 픽션(*주2) 커뮤니티에서 회원들이 나눈 논쟁을 젠킨스와 동료 학자가 정리하고 편집한 글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젠킨스는 실제 삶과 동떨어진 순수한 이론이 아니라 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드러내는 한편 팬들이 그들만의 문화 활동에서 스스로 이론들을 정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팬 커뮤니티에 대한 젠킨스의 적극적 참여는 그가 학자이기 훨씬 전부터 이미 팬이었다는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는 학자로서 자신이 하는 발언이 다른 팬들과는 달리 권위를 갖는다는 점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팬 커뮤니티와 소통하고자 한다. 젠킨스의 소통 혹은 참여는 대중문화 산업으로도 향한다. 그는 무역 행사에서 연설한다거나 게임회사와 워크숍을 하는 등의 활동에 열심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중문화의 질을 향상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방관적 입장에서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견지하는 입장과 참여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관련 내용은 이 책의 3부에 해당한다). 콜롬바인 총기 난사 사건(*주3) 이후 사회 여론은 청소년들에게 폭력성을 주입하는 주범으로서 컴퓨터 게임을 지목한다. 실제로 정부 당국에 의해 컴퓨터 게임을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생기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미디어 산업에 결정적인 규제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젠킨스에 따르면 문제는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는 것이 미국 문화에서 청소년 폭력의 진짜 원인과 싸우는데 써야 할 시간과 자원의 낭비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게임을 금지한다고 해서 가정 폭력을 멈출 수는 없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또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피할 길도 없으며, 경제적 불평등이나 인종 간 갈등을 해소할 수도 없다. 한 컴퓨터 게임의 폭력성을 문제 삼은 법정에서 젠킨스는 참고인 자격으로 컴퓨터 게임을 옹호하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컴퓨터 게임이 폭력성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젠킨스는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젠킨스는 이 폭력성에 남다르게 접근한다. “우리가 폭력적인 오락을 뿌리 뽑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앞뒤가 맞지 않다. 인류 역사상 모든 스토리텔링 매체는 폭력적인 주제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었고, 인간은 그런 이야기를 통해 인간적 가치와 공격성에 대한 복잡한 진리를 헤아리고자 늘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의 폭력성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폭력의 의미를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게임의 도발에 반응하면서도, 그 성찰의 과정은 시작도 하기 전에 차단해버리는 것과 같다고 젠킨스는 말한다. 게임의 폭력성을 염려하는 미디어 개혁론자들이 게이머들을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여기는 것과 달리 정작 게임 이미지를 놀라울 만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미디어 개혁론자들이다. 그들은 게이머들이 중요시하는 게임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전하는 정서적 의미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젠킨스는 최근의 많은 게임이 인간의 공격성이나 상실감, 고통 등에 대한 윤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복잡하고 심오한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미디어와 수용자가 지닌 최상의 잠재력을 신뢰하는 젠킨스는 게임 회사들과의 워크숍을 통해 게임 텍스트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직접 개입하는 한편, 교육단체들과 함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기존의 상업적 비디오 게임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과 교육 미디어 프로그램을 결합함으로써 게임을 통한 성찰과 토론에 필요한 틀과 언어를 확장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일상으로 파고든 문화연구


책의 말미에서 젠킨스는 아들과의 대화를 소개한다. 아들이 어렸을 적부터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온 젠킨스는 수년간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관점을 검증하고,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그 판단력을 믿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에게 문화연구란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서로에게 중요한 관점을 소통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책을 통해 학자와 팬 간의 의사소통을 돕고 싶었다는 젠킨스는 문화 연구가 학술적 담론을 초월하여 보다 일상적 환경 속에 깊숙이 파고들 때에 문화 연구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 개혁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젠킨스의 저술 및 활동을 통해 그가 말하는 ‘일상으로 파고든 문화 연구'의 모습을 어느 정도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그가 책 곳곳에 심어놓은 팁 중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바로 ‘언어'에 대한 감각이다. 젠킨스는 팬들 스스로 만들어내고 발전시킨 이론과 용어를 학술적 어휘로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는 한편 학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라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과도기적 연구자 세대로서 젠킨스는 이전 세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해야했기 때문에 항상 양극적 긴장감을 지니고 있어야했다. 젠킨스가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은 “학술적 담화에서도 받아들여질 만한 이론적 용어로 감정이나 정서를 기술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이다. 팬이 되는 것과 학자가 되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서적인 것에 대한 관점이다. 학자들은 흔히 ‘정서적 오류(affective fallacy)'란 철저히 피하도록 훈련받았지만, 팬들은 문학 시간에 범하지 말라고 배웠을 모든 종류의 오류를 마음껏 범하고 있다. 젠킨스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야 하는 학자들이 좀 더 자신과 타인의 감정(emotion)에 충실해야한다고 충고한다. 추상화된 ‘의미'와 씨름하는 학자들에게 ‘정서'나 ‘감정'과 분리되지 않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팬들의 언어는 낯선 것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낯섦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 젠킨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긍정의 어법이 아닐까.




빠순이, 촛불집회, 낯선 것들과의 마주침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았을 때, 나는 내가 처음 아이돌 팬덤과 조우하였던 2006년의 여름이 떠올랐다. 그 전까지 나는 ‘아이돌'과 ‘빠순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아이돌 팬덤에 발을 들여놓자 만난 것은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인생이 바뀔 정도의 놀라움이었다. 나는 바로 그 ‘빠순이'로 다시 태어났고(혹은 내 안의 ‘빠순DNA'를 발견했고), 아이돌 팬덤과 팬픽(*주4) 문화에 대한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새롭게 팬덤과 조우하였다. 바로 2008년의 촛불집회 속에서. ‘촛불 소녀'로, 혹은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 속에 팬덤이 있었다. 팬덤을 비롯해 인터넷에 기반을 둔 다양한 커뮤니티들이 한국 사회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참여문화'라 명명되는 일련의 현상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가 재부상- 2002년 월드컵과 대선 이래 -하였다. 미국의 참여문화를 다룬 이 책은 이러한 한국적 맥락 속에서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지난 6월 30일자 위클리경향은 “온라인 커뮤니티 ‘저항의 본거지'”라는 제목으로 촛불집회와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제의 동력이 되고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작년 촛불집회 때 거리에 등장한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들- ‘소울드레서', ‘82cook', ‘SLRclub' 등등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모임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물론 커뮤니티 회원 당사자들도 자신들의 힘에 놀랐겠지마는 각종 미디어와 학계, 운동계에서 보인 놀라움은 ‘낯선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분석들이 쏟아지고 있다.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주5)이란 말이 어느덧 익숙한 사회용어가 되고, 온라인 커뮤니티가 일상에 기초한 공동체로서 새로운 정치적 훈련의 장이 되고 있다는 평가 또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런 기술(記述)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우리가 서로 대화하기를 원한다면, 무엇인가를 함께 하고 싶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의 ‘상식'- 온라인 커뮤니티 관계자들은 “진보나 보수와 같은 정치적 이념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합리성 문제”라고 말한다(위클리경향) -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커뮤니티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진다는 정치적 훈련이란 무엇인지 그런 자세한 풍경이 궁금하지 않은가?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젠킨스와 같은 자세가 아닐까 싶다. ‘내부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이것을 어떤 마주침, 다른 세계와의 조우로서 접근해야한다. 아마도 이 마주침은 그동안 ‘대중'이라고 명명되었던 수많은 다양한 그리고 이질적인 집단들과의 마주침일 것이다. 이름 붙이기는 타자와의 조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그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 그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세계의 겹침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하나의 세계에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내가 ‘촛불들'에 ‘중산층'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저어하는 이유이다. 나에게 아이돌 팬덤과의 조우는 낯선 세계를 만날 때는 기존의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소위 ‘빠순심(心)'이 사춘기의 이성애적 욕망과는 다른 다층적 욕망이라는 사실도, ‘빠순이'들이 바로 그 ‘빠순심'에서 출발하여 자신들의 일상에서부터 정치적 사안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마침내 ‘촛불'을 들기에 이르는 과정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론적으로 언어화되지 않은 일상 속에 있는 잠재력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촛불집회를 만든 원동력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듯이, 그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이 명확히 잡히지 않고 있듯이 말이다. □


책 저자 : 헨리 젠킨스
MIT 인문학부 교수이자 미디어 비교연구 프로그램의 창립자.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는 10여 권의 책을 저술ㆍ편집했다. 대표 저서로는《텍스트 밀렵자들: 텔레비전 팬들과 참여 문화》,《바비 인형에서 죽음의 전투까지: 젠더와 컴퓨터 게임》,《어린이 문화 선집》,《대중문화의 정치학과 쾌락》 등이 있다.







* 주

1. ‘아카-팬(Aca-Fen)'이란 academic과 fen의 합성어라고 한다. 즉, ‘팬이면서 학자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Fen은 fan의 복수형으로 팬들 사이에서 쓰인다고 한다.
2. 슬래쉬 픽션은 팬 픽션의 하위 장르로 기존의 영화나 방송 드라마, 소설 등에서 차용한 남성 캐릭터들을 동성애자로 설정한 소설을 일컫는다. 1970년 후반에 등장한 「스타 트렉」의 ‘커크/스팍 픽션'이 그 기원으로 슬래쉬란 명칭은 ‘커크/스팍'의 문장부호 ‘/(슬래쉬)'에서 유래하였다.
3.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주 리틀턴 시에 위치한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평소 ‘트렌치코트 마피아'라 자칭하던 두 남학생이 인터넷으로 구입한 총기로 900여발의 총알을 난사하여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이 죽고, 24명이 부상당했으며, 두 범인은 현장에서 자살한 사건. 범인들이 평소 좋아했다는 컴퓨터 게임과 ‘마릴린 맨슨'의 음악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비난을 받았다.
4. 팬픽이란 ‘팬픽션(Fan-ficiton)'의 한국식 어법으로 간단히 말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 캐릭터 등을 주인공으로 팬들이 직접 쓴 소설'을 말한다.
5. 젠킨스에 따르면 레비는 공유된 지식(커뮤니티의 모든 회원들이 아는 지식)과 집단지성(커뮤니티 모든 회원들에게 열려 있는 지식)을 구분하였다(관련 내용 책 206~207쪽). 집단지성은 개별적인 회원들을 기억력의 한계에서 자유롭게 만들고, 커뮤니티가 보다 광범위한 전문가 집단으로 기능 할 수 있기 때문에 커뮤니티의 지식 생산력을 더욱 확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지성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인터넷인데, 레비는 인터넷과 웹이 다대다(many-to-many) 커뮤니케이션을 급속도로 가능케 하면서 어떻게 지식의 ‘탈영역화(deterritorialization)'를 이루어냈는지, 그리고 지식의 탈영역화가 어떻게 정책결정 과정에서 수용자들의 참여를 더욱 확대하고 새로운 형태의 시민권과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줄지를 탐구하였다. 레비에 따르면 새로운 지식공동체는 공동의 지식 경영과 정서적 투자를 통해 정의된 자발적이고 일시적인 전략적 제휴가 될 것이다. 지식공동체의 일원은 그들의 관심이나 필요가 달라짐에 따라 한 커뮤니티에서 다른 커뮤니티로 이동할 것이며, 동시에 여러 공동체에 속할 수도 있으나 여전히 지식의 공동 생산과 호혜적 교환을 통해 단단히 결속된다. 레비의 ‘집단지성'을 이해할 수 있는 손쉬운 사례로 해외의 텍스트를 번역해서 공유하는 팬들이나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는 경우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 때에는 인터넷 토론방 아고라를 중심으로 네티즌들이 각자의 의견과 지식을 유통시키면서 ‘집단지성'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젠킨스 또한 이 개념을 중요하게 받아들였는데, 현재의 온라인 팬 커뮤니티가 레비의 ‘집단지성'을 가장 완전히 실현한 현상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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