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65호 읽을거리] 표절해서 잘 먹고 잘 살기

이전호(78호 이전) 아카이브/읽을꺼리

by acteditor 2016. 1. 21. 16:56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5호 / 2009년 9월 30일



표절해서 잘 먹고 잘 살기
혁명을 표절하라 - 세상을 바꾸는 18가지 즐거운 상상  
 
최 인 희 (인터넷언론 참세상 기자)

 

 

 

경제는 어렵고 물가는 오르고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해고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부자들은 세금을 감면 받지만 없는 이들은 의료와 복지 혜택조차 줄었고 사교육비 걱정, 먹을거리 걱정에 근심이 깊다.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 쓴 소리라도 보태고 싶지만 신문과 방송은 권력자 편이 될 테고, 그들이 들여다 볼 인터넷도 두렵기만 하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뭔가 될 것 같았던' 촛불시위 정국을 지나 역공을 맞은 움츠러든 마음에 볕들 날이 없다.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한다는 정당이나 거대 노동조합들은 뜬 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것 같고, 가끔 집회에 나가보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같은 공허함을 떨칠 수가 없다. 이번 달 생활비를 걱정하며 방구석에서 이명박을 씹던 나날들, 우리는 생각한다. 도대체 좋은 시절은 언제 오는 거야!

 

 

여기 ‘트래피즈 컬렉티브'라는 소그룹이 엮은 ‘일상 혁명 지침서'인 [혁명을 표절하라]가 있다. 트래피즈 컬렉티브는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고민하는 앨리스, 킴, 폴의 조직이다. 이들이 책에서 제시한 지속 가능한 삶, 의사 결정, 건강, 교육, 먹을거리, 문화행동주의, 자율 공간, 언론, 직접행동의 아홉 가지 주제는 ‘일상' 속에서 가능한 실제적 방법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소위 ‘좌파'들의 ‘수직적 성향'을 거부한다. ‘권력 장악'이라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지도부나 전위를 내세우는 방식의 정당과 정치도 조롱한다. 이 활발한 아나키스트들은 “당신은 왜 화가 나는가?”라고 물으며, 개방적이고 지속 가능하며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의 중심은 ‘우리 스스로 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책의 원제는 ‘Do it yourself'다.) 그리고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었던 다른 운동들을 소개하며 ‘표절하라'고 내놓은 삶의 갖가지 방식들은 두루뭉술한 ‘방향'이 아니라 ‘진짜' 가이드다.

 
 
세상은 넓고 별의별 운동이 다 있다

 


 

스타벅스와 디즈니를 대상으로 직접행동을 하는 단체 ‘레버렌드 빌리'와 ‘쇼핑 중지 교회'는 정기적으로 스타벅스 커피점이나 디즈니 가게에서 찬송가와 설교를 한다. 이들은 디즈니랜드에서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를 습격하거나 스타벅스에서 ‘가게 들어올리기'를 한다. 한때 나무였던 냅킨, 한때 석유였던 비닐봉지를 들어올리고 ‘의식'을 거행한다. 20여 명의 사람들이 “스타벅스의 형제 자매여”를 외치며 의자를 머리 위로 들고 “나는 이제 다시 나무다!”라고 말하는 ‘뻔뻔한' 행위는 스타벅스에 의외의 영향을 미쳤다.

 

 

인도에 유해 화학가스 27톤을 방출해 2만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다우 케미컬스'(전 유니온 카바이드)가 사장으로 변장한 장난꾸러기들인 ‘예스맨'의 가짜 연설에 의해 주가 폭락 등 실질적 타격을 입은 일화는 다큐멘터리로 잘 알려져 있다.

 

 

‘비밀 반정부 광대 반란군 순회공연'에 참여한 제니퍼 버손은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서 광대 분장을 했다가 “이건 웃음거리로 삼을 일이 아니야, 우린 심각하다고!”라는 충고(?)를 듣고는 의문을 품는다. 우리의 운동이 실패하게 되면 그게 부분적으로 내 잘못이란 말인가? 이 모든 문화행동주의자들, 광대, 드럼 연주자, 분홍색과 은색으로 치장한 발레리나,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치명적인 국가 전쟁 기계에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인가?

 

 

제니퍼가 생각한 ‘문화행동주의'는 ‘우리의 의미망, 가치 체계, 신념, 예술과 문학 등 모든 것이 창조되고 확산되는 방식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한 직접 행동이자 캠페인 활동'이다. 따라서 문화행동은 ‘사물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방식을 의문시하고 대안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방식'이다.

 

 

봉기이자 축제였던 지난 촛불시위에서 우리는 비슷한 시도를 경험했다. ‘각하'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다구리를 당할지언정 아스팔트 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대포와 소화기 가루가 날려도 어설픈 연주 실력으로 합주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매일 촌철살인의 피켓 구호가 등장했고 지도부 없이도 서울 곳곳 어디로든 행진했다. 연설, 투쟁가요, 결의문 낭독, 선무방송과 행진 식의 집회에 익숙했던 ‘운동권'들은 뒷골이 띵했다. 이 책에 나오는 서구 활동가들처럼 단 두 명이서 나이키 같은 거대 기업을 엿 먹이는 일은 아직 먼 것도 같지만, 이제 물꼬를 튼 ‘즐거운 반란'의 경험은 한숨만 나오던 ‘혁명의 엄숙함'을 조금은 깰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문화 행동주의'와 더불어 ‘텔레비전을 넘어 소통하는 방법'과 ‘활기찬 캠페인 조직하기'도 주목된다. 맨체스터의 미디어활동가 믹 퍼즈는 공동체 뉴스레터 만들기와 패러디 신문 만드는 법에 대해 자세히 말한다. 발행 주기와 부수, 값싼 복사하기, 명예훼손 대응하기까지 설명하고 있으니 보통 세심한 게 아니다. 참여 영상을 만들기 위한 놀이법도 매뉴얼 수준이다.

 

 

킴과 폴은 활기찬 캠페인을 위해 무려 100가지의 저항 방법을 소개했다. 여기엔 연좌시위나 점거도 있지만 ‘저항의 스트립쇼', ‘유령 놀이', ‘월세 납부 늦추기', ‘동물 풀어주기', ‘파이(쇠파이프가 아니다) 던지기' 같은 다소 황당한 아이템도 있다. 대놓고 이러저러하게 장난을 치라고 말하는 이 책이 사실은 ‘혁명 지침서'를 가장한 유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지만, 이들이 정색하고 내세운 신념인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선언 때문에 그 제안들을 곱씹고 또 상상한다.

 


운동을 운동하기 - 배워서 남 주자

 

 

저녁마다 회의를 하지만 뭐 하나 결정되는 것도 없고 의만 상하기 일쑤인 사람들은 4장 ‘합의를 통한 의사 결정 방식'을 눈여겨 볼 것. 합의를 통한 의사 결정, 말은 쉽다. 그러나 우리네 회의란 영국 활동가 교육 모임 ‘변화를 위한 씨앗'이 제시하는 조건처럼 ‘창조적인 해법이 등장할 수 있는 과정'이자 ‘동등한 인격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예의바른 대화'인 적이 많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친절하게 도표를 그려가며 ‘훌륭한 합의의 조건', ‘합의 과정에서 반대를 처리하는 방식', ‘합의 과정 촉진 방법'을 제시한다. 가령 경험과 자신감이 많고 목소리가 큰 톰이 발언권을 독점하면서 회의를 지배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러 사람들이 많은 의견을 제출하고 있지만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자꾸만 논점에서 벗어날 때는? 어찌 보면 당연한 해법이 나열돼 있지만 위와 같은 고생(?)을 해본 우리는 사례와 해법이 열거돼 있는 것 자체만으로 반가울 터다. 여기서의 합의는 참여와 동등한 권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이 꼬인다고 낙심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는 방식으로 어려운 결론에 이르게 되면 합의 방식의 진정한 잠재력을 인식할 수 있다”는 위로가 와 닿는다.

 

 

창의적인 운동을 하려면 또 우리는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 영국 ‘트래피즈 대중 교육 공동체'의 사례는 많은 아이디어를 준다. ‘워크샵을 기획하는 단계'는 실전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을 만큼 돋보인다. 놀이와 집단 학습, 스파이더그램, 역할 놀이, 도보 여행, 사회 변화 펍 퀴즈, 저항 달력 같은 구체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응용할 만하다. ‘대중 교육'이 변화를 위한 운동 구축의 핵심이라는 설명을 듣자하니, 텃밭을 가꾸고 기타를 치는 데 만족한다는 이미지였던 아나키즘에의 편견이 엷어질 것만 같다.

 


따라할 수 있는 혁명 실용 가이드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의 백미는 ‘진짜' 할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이다. 이 책 2장의 제목은 ‘전기를 자급하는 방법'이다. ‘에너지 위기에 적응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 생태 가옥 짓는 법을 가르쳐 준다. 단열 장치에서 마당에 설치하는 태양열 샤워기, 빗물받이 시설, 퇴비형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조립 방법이 그림으로 설명돼 있다.

 

 

기업의 통제와 환경오염에 맞서 식량 주권을 획득하기 위한 ‘직접 만들어 먹기'도 예외가 아니다. 저자 앨리스와 킴은 영국 브리스톨에서 주민들이 직접 지역의 식품과 건강을 관리한 ‘하트클리프 건강과 환경 행동 그룹', 낡은 병원을 개간해 약초를 재배하고 식량을 공급한 바르셀로나의 ‘캔 마스 듀', 쿠바 아바나의 도시형 텃밭, 브라이톤의 ‘몰스콤 숲 텃밭 공동체' 등을 소개하면서 땅을 찾아 경작할 것을 권한다. 심지어 버려진 땅 개간법과 작물 재배 방법, 퇴비 만들기, 해충 관리법도 그림과 함께 나와 있어, 이 장만 보면 ‘혁명 지침서'가 아니라 ‘텃밭 경작 실용서'로 착각할 정도다.

 

 

이런 ‘실용지식'이 ‘자율 공간 만들기'에까지 이르면 조마조마하다. 이들이 말하는 ‘자율 공간'이란 대개 점거한 ‘빈 집'이다. ‘무단 점거 방법'으로 지나치게 세련돼 보이지 않는 장소를 물색하라, 수도 가스 전기가 들어오는지 점검하라, 경찰이나 공무원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대목에선 ‘이런 점거가 과연 가능한가?'하는 의구심이 들고 만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탈인간화에 저항해 가능성과 실험의 장소로 점거를 선택하는 운동은 유럽과 브라질, 미국에서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빈 집 점거'에서 경찰 대응법, 자물쇠 바꾸는 법, 누가 드나드는 곳인지 확인하기 위해 출입문에 투명테이프 붙이기 등에 주목하기보단, 언급된 사례들처럼 빈 집을 어떻게 활용해 지역의 자율 공간으로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편이 낫다.

 


‘즐거운 혁명'이고 싶다

 

 

정말 혁명이 가능할까 고민하며 읽기 시작한 사람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시종일관 명랑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보며 스멀스멀 불만과 심술이 터져나오는 사람은 나뿐일까? 책 말미 옮긴이 황성원의 글에서 “사실 좀 우스운 구석도 있었다. 혹은 위험하다 싶은 구석도 있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이들의 발랄 명랑함이 ‘잘사는 나라' 출신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 괜한 트집을 잡고 싶기도 했다”는 부분에서 무릎을 쳤다. 내 말이 그 말이라고요.

 

 

저자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당장 시작하라고 하지만 내가 태양열 주택을 지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처럼 버려진 땅이 몇 만 평 있어서 감자를 경작할 처지도 못된다. 빈 집을 점거하라고? 전과자가 될 자신도 그다지 없다. 물론 이들이 제시한 해법을 그렇게까지 사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소시민은 늘 의문이다. 내가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전기를 아껴 쓰고, 환경 파괴 기업의 상품을 불매하면 세상은 바뀔까? 정작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착취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시장에 상품을 쏟아내는 자본의 위력이 너무 거대해 나의 하찮은 저항은 표시도 안 나지 않겠냐 말이다. 좀 더 심하게 심술을 부려보자면 이렇게 묻고 싶기도 하다. “앨리스, 자동차를 만들다 해고된 노동자에게 텃밭을 가꾸면 세상이 변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 “폴, 집이 철거되고 가족이 경찰에게 살해당한 사람에게 놀이와 게임을 권할 건가요?”라고. 이런 극단적인 질문을 던지는 나와 당신은 그래서 안쓰럽고 우울하다.

 

 

하지만 누구 말마따나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뭔가 아주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마음 속 무언가를 움직인다. 이 발랄한 아나키스트들이 주목한 세계란 전 세계 20퍼센트가 80퍼센트의 자원을 사용하는 현실, 다국적기업들이 이윤을 위해 사람들과 땅을 꾸준히 착취하는 상황, 약자를 괴롭히는 지배자들과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 공공 서비스가 사유화되고 정치인들이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초고층 고급 주택들이 공공의 공간을 차지하고, 집값이 치솟아서 많은 사람들이 부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암 질병 스트레스 정신병 우울증의 증가를 맞고 있는 전 지구적 위기다.

 

 

 

 

 이 더러운 현실에서 한 발짝 극복한 듯한 이들의 ‘혁명 해법'은 결국 선진국 먼 나라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옮긴이의 말대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지엽적인 부분에 연연하다 보면 쓸데없는 논쟁에 소중한 자원과 시간만 낭비하게 될 뿐”이라는 충고와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법제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옮긴이의 말로 개운치 못한 뒷맛을 지우련다.

 

 

비록 내가 이 책에서 당장 실험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우리 집 베란다 화분에 자주 출몰하는 민달팽이 퇴치법밖에 없더라도 뭐든 해보지 않으면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책의 혁명을 표절하든 리메이크하든 샘플링하든, 그 의지와 자세는 전적으로 나와 당신의 몫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