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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6호 읽을거리] 게임이 불타는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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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1. 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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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6호 / 2009년 10월 29일

 

게임이 불타는 온도
 
최세진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저자)

 

 

 

 

컴퓨터 게임이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한 세대를 넘었다. 70년대와 80년대 엄마의 돼지 저금통에서 젓가락으로 몰래 빼낸 동전들을 고이 들고 어두운 뒷골목의 오락실에 달려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인베이더나 갤러그를 즐기던, 문제의 꼬맹이들이 이제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것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국민학교' 때 시내에 처음 생겨 하나 뿐인 오락실에서 까만 화면에 하얀 막대 두 개가 오락가락하는 탁구 게임 ‘퐁'부터 게임을 경험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퐁'은 실제로 최초의 컴퓨터 게임이었다. 즉, 나는 게임의 역사를 처음부터 제대로 경험한 것이다.) 이후 ‘인베이더'와 ‘방구차'를 거쳐, 중학교 때는 ‘갤러그'에 푹 빠졌다가 ‘제비우스'의 화려함에 놀라는 사이 용돈의 대부분을 오락실에 적립했고, 대학에 갈 때쯤에는 책을 펼 때마다 글자 하나하나가 ‘테트리스'가 되어 흘러내리는 경험을 했었다. 군대에서는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던 중에 ‘삼국지'로 천하통일을 꿈꾸다가 영창에 갈 뻔 했던 일이 있었다. 제대한 후에는 4메가 램과 300메가짜리 하드 디스크가 있던 최고급 486 컴퓨터를 이용해 ‘심시티'로 도시를 운영하느라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당시에는 게임 삼국지 때문에 소설 삼국지를 읽었다는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군부독재에 맞서 그 치열했다는 운동권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소련에서 개발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과하게 포장된 소문과 더불어 ‘테트리스'가 운동권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필자와 비슷한 세대 중에 이렇게 게임으로 인생의 줄기를 써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과히 많지 않겠지만,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닐 것이다. 이미 게임은 TV와 맞먹는 매체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009년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은 여가 활동을 위해 보내는 시간 중 TV(24.5%), 영화(23.2%)와 비슷한 수준으로 게임(20.4%)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009년 대한민국 게임백서)

 

 

하지만 게임은 아직도 ‘컴컴한 오락실에서 애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원죄에 눌려 변방에서 유치찬란함이라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치욕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에 대한 분석과 비평은 수도 없이 쏟아져도, 이미 TV나 영화와 맞먹는 수준으로 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게임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거의 볼 수 없다. 게임에 대해 진지하게 떠들어대는 건 결코 자신들의 문화비평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게임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재미의 등급, 그래픽의 수준, 현실감 등등에 대한 평점뿐이다. 게임을 사회적 미디어로 분석하거나 게임을 통한 사회적 소통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니, 게임을 ‘미디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 일생을 바꾼 책',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본 사람은 많았어도, ‘내 일생을 바꾼 게임'을 물어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국내에서 현재까지 게임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자본의 산업적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다. 게임은 이미 그 규모로 볼 때 최근 잘 나가고 있는 한국의 영화 산업을 훌쩍 뛰어넘는다. 국내 산업 규모로만 봐도 게임은 이미 지난 2007년에 영화 산업보다 1.6배나 컸으며, 수출액은 영화 산업의 30배에 달했고, 지금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산업 분야이다.(2007년 대한민국 게임 백서) 그렇기 때문에 게임 경기만 중계하는 케이블 TV가 먹고 살고, 자본은 수십억을 들이며 프로 게이머 팀을 육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게임의 서사에 담긴 메시지나, 게임의 형식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막장 드라마 한 편 보다도 못한 것일까? 자그마치 450만장이나 팔리고, 특이하게 국내에서만 10년 이상 인기를 끌어오며 그 팬들이 만화, 소설, 패러디 등 수 없이 많은 2차 생산물을 쏟아놓았던 스타크래프트는 ‘그냥 게임'일 뿐일까? 아직까지도 게임을 ‘진지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진지한' 소통의 도구로 고려하지 않는 상황은 ‘편견' 외에는 다른 설명을 찾을 수 없다.

 

 

 

 이제라도 게임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게임을 미디어로 새롭게 접근해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흥미로운 책을 몇 권 소개하려 한다.

 

 

먼저 지금까지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봤거나, 여전히 게임을 뭔가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보상자의 역습』(이하 『역습』)이라는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역습』의 원제는 『Everything Bad is Good for You』인데 “유해하다는 모든 것들은 당신에게 유익하다”는 뜻이다. 『역습』은 TV나 컴퓨터 게임, 인터넷 같은 대중매체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라고 강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집에서 하루 종일 TV나 보고 있다고, 혹은 공부는 안 하고 게임이나 하고 있다는 꾸중에 지친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단비 같은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가슴 아프게도, 그 단비를 맞으려면 게임이나 TV를 잠시 중단하고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 스티븐 존슨은 『역습』에서 게임과 드라마의 서사 분석, 등장인물들의 관계 분석을 통해 대중매체의 내용이 결코 단순무식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이고, 아이들이 대중 매체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발달과 행동 발달에 더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통계를 통해 보여준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게임과 TV에 대한 교육계와 학부모들의 비난에 대해 ‘만약에 TV나 게임이 먼저 광범위하게 이용되던 세상에 책이라는 매체가 늦게 등장한다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하는 가정 하에 쓰인 짧은 글이다. 
 
 


 
저자는 새로운 문화현상을 이야기할 때 기존의 문화와 비교하며 새로운 문화의 상대적인 결함과 불완전함에만 주목하는 편견이 문제라는 마샬 맥루한의 지적을 언급하며, 게임과 TV, 인터넷 같은 새로운 대중문화에 대한 비난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보수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풍부한 자료와 함께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역습』으로 게임에 대한 편견을 조금 씻었다면 이제 조금 더 높이 올라가보자. 이번에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이하 『비디오 게임』)을 읽을 차례다. 『비디오 게임』의 곤살로 프라스까(Gonzalo Frasca)는 정치와 게임을 하나로 묶으려는 모임을 결성하여 Newsgaming.com이라는 사이트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게임 개발자이자 연구자이다. 이 책은 게임에 대한 분석과 비평을 담은 여러 편의 논문과 에세이를 싣고 있다.

 

 

『비디오 게임』에도 앞서 『역습』이 책 한 권을 통틀어서 역설하고 있는, 게임의 해악성에 대한 반론과 아주 흡사한 내용이 잠깐 나오는데, 그 부분도 꽤 재미있다. (어쩌면 게임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보려는 사람들의 공통된 콤플렉스 때문에 이런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게임이 폭력적이고 해롭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게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가? 까짓거 10만 명이 게임 때문에 죽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책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수는 얼마일까? 『공산당 선언』이나 성경, 히틀러의 『나의 투쟁』 때문에 죽은 사람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게임에 비하면 책은 대량살상무기나 다름없다.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려면 게임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먼저 도서관을 불태워버리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자. 『비디오 게임』에는 게임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이 담긴 논문이 책의 앞부분에 담겨 있다. 그래서 오로지 추천 글만 읽고 온라인으로 주문한 책을 앞부분부터 열어본 사람라면, 몇 페이지 나가지 못 하고 흥미의 감도가 뚝 떨어지면서, 책을 소개한 인간을 송곳니로 찍어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고비만 무사히 잘 넘긴다면, 그 과정에서 ‘놀이'와 ‘게임'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들도 만날 수 있고, 그 뒤에 펼쳐진 저자 곤살로 프라스까만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배울 게 많은 보람찬 독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책을 읽었던 분이라면 『억압받은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뭔가 익숙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진보적인 교육 운동의 교과서 역할을 하며, 한 때 국내에서 『민중 교육론』으로도 알려져 있던 책 『페다고지』의 원래 제목이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론』이다. (‘페다고지(pedagogy)'란 ‘교육론'이라는 뜻이다.)

 

 

『비디오 게임』은 제목만 따온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페다고지』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프레이리는 『페다고지』를 통해, 민중들에게 계급의식이라는 지식을 ‘주입'하거나 행동을 ‘지도'하는 것은 오히려 민중을 수동적이고 끊임없이 지도만 받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며, 과거의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 미래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역설했다. “지식은 전달되거나 주입되는 게 아니라 주체가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레이리는 ‘토론과 대화'를 통해 민중이 사회에 대해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지식을 구성하도록)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민중을 위한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프레이리의 교육론은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의 『억압받은 자들을 위한 연극론』으로 이어지며 다양한 변주를 시작한다. 아우구스또 보알은 『페다고지』의 이론을 바탕으로 민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연극론을 펼치는데, 기존에 민중을 계몽하는 식의 좌파적인 연극을 버리고 연극에 관객이 직접 참여하고 구성하도록 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준비된 극단은 상황만 전개할 뿐이고, 극의 진행과 완성은 관객의 몫이다. 관객은 직접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고, 자기의 생각에 따라 연극을 진행했다.

 

 

이런 이론적, 실천적 배경 하에서 곤살로 프라스까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을 통해 독특한 게임론을 펼친다. 기존의 게임학에서는 주로 '게임의 서사‘, 즉 줄거리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반면, 곤살로 프라스까는 '게임의 규칙'을 게임이 재현하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요소로 본다.

 

 

곤살로 프라스까는 게임을 할 때 주인공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행위를 해야 보상 받느냐, 어떨 때 처벌받는가, 어떤 행위를 게임은 좋은 행위로 권장하는가'를 결정하는 게임의 규칙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게임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보다는 사람을 죽였을 때 게임이 보상을 해주는가(포인트를 주거나 아이템을 주거나 등등)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곤살로는 ‘심즈'라는 유명한 게임을 통해 현재 나와 있는 게임들의 규칙이 어떠한가를 정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좌파적인 규칙을 가진 게임이 아니다. 그는 좌파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할 게 아니라, 이용자들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게임만이 민중을 실제적인 주체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의 이론을 그대로 게임에 적용한 것이다.

 

 

곤살로 프라스까는 게임에 대한 분석과 이론의 수립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사회참여적인 게임을 발표하고, 자신의 이론대로 이용자가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게임을 제작하고 있으며, 그 게임들은 인터넷에서 많은 논란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게임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책에서 그는 “만일 어떤 매체가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전달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 때문에 누군가가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지를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문학의 경우 이런 일은 다반사이고(가령 살만 루시디(*주1), 드문 경우이지만 틀림없이 영화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게임에 대한 항의 메일을 받고서야 게임이 자신이 알리고자 했던 이념을 성공적으로 잘 전달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게임은 newsgaming.com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아래의 사진은 9/11 사태 이후 미국 정부가 펼친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9월 12일'이라는 게임이다.

 

 

(http://www.newsgaming.com/games/index12.htm
 
 

 

 

마지막으로 책에 실린 그의 에세이 중 한 부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나의 가장 생생한 유년의 기억들 중 하나는 내 어머니와 이모가 뒤뜰에서 자기 책들의 대부분을 불태우면서 함께 우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이는 나의 조국이 군사독재 치하에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는 어떤 책들을 소지하는 것이 투옥이나 고문의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시절이다. 어느 날 누군가 비디오 게임들이 담긴 파일 앞에서 성냥개비를 들고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것들을 불사를 것을 고민한다면 이상한 생각이 들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 문명이 아마도 대중매체를 정말 중요한 무엇인가로 바꿔놓을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덕분에 우리는 책이 화씨 451도에서 불탄다는 사실을 안다.(*주2) 비디오게임이 불타는 데 필요한 열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 주

 

1) 살만 루시디가 쓴 《악마의 시》는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스러운 묘사로 원리주의 이슬람 세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이 출판된 이듬해인 1989년 이슬람 시아파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 책을 “이슬람에 불손한” 것으로 규정하며 루시디의 처형을 명령하는 격문을 내걸었다. 이는 루시디가 소설에서 이슬람교를 희화화하고 무하마드의 부인들을 창녀로 묘사한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호메이니는 모든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공개적으로 루시디 뿐 아니라 책을 출판한 이도 처형할 것을 요구했고, 루시디의 목에 3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루시디는 그로부터 약 10년 가까이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이집트에서의 폭동으로 인해 여러 명이 죽었다. 1990년 루시디는 수필집인 In Good Faith를 내어 그에게 향한 비난을 진정시키고, 이슬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며 사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란 성직자들은 기존의 선고를 철회하지 않았다. 《악마의 시》는 인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영국의 몇몇 아시아인 거주지에서는 거리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 1991년에는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이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노르웨이 쪽 출판사 사장도 공격을 받아 부상당했다. (출처: 위키 백과)

 

 

2)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화씨 451』(Fahrenheit 451)은 레이 브래드베리가 1953년에 쓴 SF 대표작이다. 소설에서 그리는 사회는 책이 금지된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로, 주인공의 직업은 책을 불태우는 것. “화씨 451”은 종이가 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말한다.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직업의 이름은 방화수(fireman)이다. 하지만 그는 남들 몰래 한 권 한 권 책들을 빼돌려 모으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가 만난 한 소녀는 그에게 '소방수가 불을 끄고,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누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에서 '책'으로 상징되는 생각의 자유를 찾으려 든 주인공의 이야기는 책이 출간된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을 배경으로 더욱 의미심장하게 해석된다.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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