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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7호 읽을거리] 놀면서 저항하는 해커들 - 찰리 기어, [디지털 문화 : 튜링에서 네오까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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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 acteditor 2016. 1. 2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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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7호 읽을거리 2009.11.30]

 



                                        놀면서 저항하는 해커들

                      - 찰리 기어, [디지털 문화 : 튜링에서 네오까지]를 읽고

 

 

 

 

최진성(한성대 겸임교수, 독립영화감독)

 

 

 

저자 찰리 기어(*주1)의 말처럼 <디지털 문화>는 일종의 문화 고고학으로 쓰여진 책이다. 현재의 디지털 사회로 오기까지의 지배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기어는 부제에서 언급한 것처럼 1930년대의 앨런 튜링 의 ‘수'에 관련한 논문에서 시작해서 워쇼스키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까지 촘촘히 훑고 있다. 물론 책의 본문은 튜링 이전의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 서막에 대한 맥락부터 시작해서 세계 전쟁 등으로 인한 테크놀로지의 발전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디지털 발전에 대한 것을 넘어서 저자가 가진 백과사전식 교양과 지식을 종횡무진 유기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 컴퓨터와 맑시즘과 섹스 피스톨즈 와 들뢰즈 와 존 케이지 와 해커, 그리고 테크노 음악 등 전혀 다를 법한 것들을 한 텍스트에서 링크시키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 책을 흥미롭게 하는 동인이고, 이와 더불어 기어 스스로도 이 책을 요즈음의 디지털 문화에 어울릴 법한 텍스트로 성찰적으로 쓰고 있다고 추측해 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텍스트에 ‘링크'에 ‘링크'를 걸어서.

 


실리콘 밸리와 샌프란시스코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첨단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메카인 실리콘 밸리와 반문화(*주2)의 근거지인 샌프란시스코가 근접지역에서 동시에 탄생했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약물이나 환각제에 열려 있었고,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 행동, 사유방식의 실험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도시였던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의 해이트 스트리트와 애쉬버리 스트리트 지역은 반문화의 극단을 포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모임 장소였다. 기어는 헤이트 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의 근접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1960년대까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필요로 한 기계류들은 반문화가 반대한 테크노크라시(*주3) 합리성의 일종이었다. 왜냐하면 냉전의 전략과 전술에서 이것들이 철저히 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문화적 사고의 한 측면은 히피 공동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단호하게 반테크놀로지적이었고, 기본적 라이프스타일로의 ‘타락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주장했었다. 이처럼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신자유주의 와 반문화적 사유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주 타당하다. 그러나 어떤 극단끼리는 연결되는 지점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와 반문화는 모두 집단보다 개인을 우위에 둔다. 또한 둘 모두 조직과 관료체제의 폭정으로부터 개별 역량을 자유롭게 발휘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반문화의 특징이었던 쾌락주의는 소비자의 자기-권리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호소와 달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닮아 있음을 기어는 역설한다. 결정적으로 둘 사이에는 정보 테크놀로지의 긍정적 힘에 대한 신뢰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앞서 말한 히피 공동체와 같은 반문화 공동체들은 반테크놀로지를 주창했지만, 실은 1960년대 후반부터 브랜드를 비롯한 반문화 선각자들은 컴퓨터의 잠재력을 이미 상찬했었다. 또한 신자유주의 수사는 지속적으로 컴퓨터의 비범한 능력과 서로 연결된 복잡한 시장들의 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를 강조했다. 기어는 신자유주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가속화하고 있지만, 실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에는 처음부터 반문화적 저항의 가능성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지배구조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들을 언급하는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파타주의자들의 사례는 여러모로 여전히 흥미롭다. 이들은 1994년 1월 1일, 미국과 다른 국가 간의 자유무역을 보증하는 NAFTA가 발표되는 날, ‘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이라는 게릴라 그룹이 남부 멕시코 치아파스 전역을 점령했다. 사파타주의자의 목적인 치아파스와 그 밖의 다른 곳, 그리고 전체 멕시코의 농업 공동체에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들이 취한 전략은 인터넷이었고, 그들은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압도적인 지배에 저항했다. 이들은 많은 해킹 기술들을 적절하게 채택했고, 자신의 메시지를 보급하기 위해 여타의 일렉트로닉 교란의 형식들도 개발했다. 사파타주의자들은 어떤 면에서 반문화적 해커들이었던 것이다.

 


명바기는 우리가 지키겠‘읍'니다

 


해커는 여러 종류가 있겠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수 십 억대의 금융사기를 하곤 하는 해커들도 있을 것이고, 오타쿠 스타일로 자신의 컴퓨터 다루는 솜씨를 과시하기 위해 주요 사이트를 해킹하는 해커들도 있을 것이고, 촛불 집회 때 한나라당과 청와대 홈페이지를 ‘턴' 해커들처럼 다소 정치적인 목적을 띤 해커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해커들이 있을 것이다. 해커는 문화적 현상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기도 하고, 동시에 숭배되기도 한다. 기어는 여기서 해커의 의미를 좀 더 확장시키며, 디지털 문화 시대의 지배 구조에 반문화적 대안 가능성을 지닌 자들로 재규정한다. 해킹은 저항의 한 형식으로서 1980년대와 90년대 액티비즘 현상들의 자율적 본질을 반영했다. 가령, 1980년대 영국의 <spiral tribe> 같은 DJ 그룹을 비롯한 노마드적 레이브 문화는 생태적 액티비즘과 더불어 그 효과를 발휘했으며, 그 밖에 건축이나 환경문제들 혹은 인두세 같이 반대중적인 정부 정책들에 저항하는 행동들과 함께 일어났다. 대처 정부는 그러한 대중적 형식들 대부분을 법적 수단을 사용해 억압했다. 이런 노마디즘(*주4)은 후기 자본주의의 억압적 맥락에 대한 하나의 저항인데 기어는 미국의 해킴 베이에 의해서 표현된 ‘일시적 자율 공간(Temporary Autonomous Zones)'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일시적 자율 공간'과 같은 노마드 지역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 베이는 역설했는데, 그런 지역은 권력에 대항하는 영토로서 작용하고, 억압되거나 흡수되기 이전에 해산된다. 이런 ‘일시적 자율 공간'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등장한 여러 종류의 대안적인 공간들로부터 기원했는데, 인터넷과 웹이 전략적으로 이용되었고, 해킹을 통한 ‘일시적 자율 공간'의 창출을 목표로 했다. 이렇게 인터넷이 보편화된 시대에 전략적으로 웹을 통한 ‘일시적 자율 공간'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효율적이고 파급력이 크다. 게다가 해커들 입장에선 오프라인에서 ‘일시적 자율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손쉬운 일이다. 지난 6월, 촛불 집회 때 청와대를 포위한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강경 진압이 진행 중이던 1일 새벽 3시 경 한나라당 홈페이지가 해킹당한 사건이 있었다.

 

 

해킹당한 한나라당 홈페이지의 화면에는 '이명박 정부와 함께 국민성공시대'라는 메인 화면 대신 사지를 활짝 편 고양이 사진(이명박에게 누리꾼들이 지어준 별명이 ‘쥐'다)이 떠있었고, 역사유물과 이명박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에는 "명바기는 우리가 지키겠'읍'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읍'에 대한 의도된 오타는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철자법을 틀리는 것을 패러디한 솜씨다. 이 해킹 사건은 순식간에 검색어 1위에 올랐고 누리꾼들의 ‘성지순례' 대상이 되어버렸다. 결국 홈페이지는 오전 8시 경 폐쇄됐다. 마찬가지로 청와대 홈페이지도 결국 ‘털리고' 말았다. 인터넷을 통한 의사 표현과 뉴스 전파의 속도가 실시간 수준이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이런 식의 해킹은 그 어떤 정치적 사건보다 파급력이 크고 직접적이다. 각종 포털 사이트의 페이지뷰 올리기 경쟁과 여기저기 난립하는 광고 배너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자본의 공간임을 다시 확인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해킹을 통해 ‘일시적 자율 공간'이 만들어지는 해방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기어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권력에 대항하는 영토로서 작용하고, 억압되거나 흡수되기 이전에 해산된다. 오프라인에서와 달리 온라인에서의 이들은 이미 잽싸게 해산된 지 오래다. 한나라당사에서 사이버수사대에 연락해 봤자 이미 그들은 사라졌다.

 


놀면서 저항하기

 


해킴 베이가 노마드적 지역의 존재와 필요성을 역설하며 주창한 ‘일시적 자율 공간' 개념은 영향력이 컸던 반면에, 한편 동감할 것을 예상했던 좌파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기도 했다. 명망 있는 무정부주의자 평론가 머레이 북친은 베이의 관념들을 ‘무정부주의 라이프스타일'이라며 평가하기도 했지만, 반면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행동주의자들은 베이에 대한 비판의 한 형태로서 가짜 해킴 베이 에세이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앞서 내가 언급한 웹상에서의 해커들이 홈페이지를 ‘터는' 사건들과 같은 풍경은 실은 엄숙주의로 뭉쳐진 활동가들이나, 인터넷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는 냉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들의 행동들이 재미에 치중되어 있고, 그래서 가볍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섹스 피스톨즈 같은 펑크족들의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이나, 좀 더 진지하게는 기 드보르 같은 상황주의자들이 보여줬던 68 혁명에서의 전복적인 행동들도 실은 모두 '유희‘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대와 펑크족들이나 상황주의자들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바로 유희와 저항의 공간이 사이버세계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매트릭스의 공간.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현실의 공간이 전부가 아닌,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바로 사이버 공간이 오프라인의 현실과 동등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의 촛불 집회를 통한 저항만큼이나 촛불집회를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중요해졌고, 또한 그 생중계를 모니터 앞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의 '펌질‘과 '댓글‘과 '블로그질‘이 중요한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런고로 이들의 감수성 자체가 유희에 기반한 것은 오히려 저항에 힘이 된다. 집회에서도 화염병을 던지기 보다는 전경들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 비누와 샴푸를 달라고 외치는, 그야 말로 놀 줄 아는 세대가 온 것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달라져 버린, 유희정신과 사이버공간에서의 자율성이 온 몸에 배인 '해커‘들 앞에서 지배 권력은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억압과 폭력으로 맞서고 있는 중이다. 공권력의 물리적 폭력과 벌금과 수배라는 엄포 따위를 통해서 말이다. 하긴 그들이 여전히 과거의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해커들의 저항 가능성은 훨씬 유리하다. 패러다임 변화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지배 권력과 싸우는 것이라면 말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놀 줄 모르는 자들과 놀 줄 아는 자들의 싸움인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영화 연출가인 마크 페로가 1975년 6월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한 인터뷰의 마지막 부분이다.

 


“역사가의 첫 번째 의무는 여러 제도권 기관들이 이 사회로부터 빼앗아간 역사를 되찾아 주는 일입니다. 사회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귀 기울이는 것, 내 생각에는 이것이 역사가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 여기에서 영화는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극영화이든 이른바 뉴스 영화라고 부르는 다큐멘터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나는 여러 유형의 영화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상상력이 역사[역사적 인식]이면서 동시에 ‘역사'[역사의 흐름 자체]인 역사가에는 그렇습니다.” (*주5)

 


와이브로 미디어 생중계, 디지털 카메라를 든 수많은 블로거들의 등장, 디지털 민주주의, 해커들의 ‘털기 좋아하는' 유희정신, 이를 통한 ‘전자교란'과 '전자적 시민 불복종'의 실천을 통한 노마드적 ‘일시적 자율 공간' 생성. 수많은 누리꾼과 사람들이 마크 페로가 말한 역사가의 ‘첫 번째 의무의 실천'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역사가'가 되어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여러 제도권 기관들이 이 사회로부터 빼앗아간 역사를 디지털 시대의 해커들이 되찾아 주고 있는 것이다. 페로는 ‘영화'를 예로 말하고 있지만, 영화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에는 그야말로 저항의 가능성에 ‘경계'가 없다. 디지털 캠코더, 카메라, 와이브로, 인터넷, 구글 어스 등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 2008년, 2009년 대한민국, 수많은 해커들이 지금 여기에 놀고 있다. □

 

 

주.

 


찰리 기어(Charlie Gere)는 영국 랑카스터대학교 교수로서 뉴미디어이론가이자 디지털미술사학자로서 활동하면서 미술,디자인 분야의 작가와 이론가 그룹인 ‘CHArt'(Computers and the History of Art) 회장으로 있다. 또한 런던대학교 벅벡칼리지 재직시에는 영국 최초로 ‘Digital Art History' 석사학위과정을 개설하여 7년간 운영하면서 디지털예술 창작과 전문연구자 양성에 기여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반문화(反文化)는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반대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문화로서, 대항문화라고도 한다. 1960년대의 미국의 히피, 동성애 옹호론자, 여성해방운동가 등이 이에 속한다.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 경제 체제를 관리하는 사회 체제이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크게 늘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지식과 기술을 소유하는 것이 권력에 접근하는 중요한 양식이 된다. 테크노크라시 사회는 인간에게 유익한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기술 관료적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큰 사회이다. 이럴 경우 사회는 점점 기계화, 조직화되고 그러한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은 이른바 조직인으로 전락해 고독감과 비인간화를 겪어야 하는 문제점이 있다.

 


노마디즘(Nomadism)는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 (노마드, Nomad)에서 나온 말이다. 유목주의라고도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발표한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서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여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기존의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는 것을 뜻하며 학문적으로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이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 문화와 심리현상, 수학, 경제학, 신화학 등에도 사용된다.

 


마르크 페로, 주경철 옮김, <역사와 영화>, 까치, 1999, p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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