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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3호 현장] 표현의 자유는 허가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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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3호 / 2009년 7월 28일

 

 

표현의 자유는 허가받지 않습니다!
-13회 인권영화제가 열리기까지 






민지 (인권영화제 뉴스레터 [울림] 편집위원)
 
종이 한 장의 위력은 컸다. 영화제 준비가 막바지로 접어들던 어느 날, 인권영화제를 주최하는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로 공문 한 장이 도착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보내온 공문의 내용은 청계광장에서 “시국관련 시민단체들의 집회”가 열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인권영화제의 청계광장 사용허가를 “취소”하겠으니 “이해”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납부한 시설사용료는 돌려주겠다는 친절함까지. 철저히 행정적인 어투에 기껏해야 몇 줄 되지 않는 공문으로 너무나 손쉽게 표현의 자유를 빼앗는 순간이었다. 13회 인권영화제 개막 이틀 전이었다.
인권영화제는 12회 때부터 거리에서 열리고 있다. 거리, 공원, 광장에서의 영화제는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 초기 인권영화제는 대학 강의실을 돌며 겨우 영화를 상영했지만, 사전검열제가 폐지된 2001년부터 는 독립영화상영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극장 측에서 대관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원래 인권영화제는 등급분류를 받지 않고 영화를 상영해 왔다. 현행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에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영화가 등급분류를 받아야 하며,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영화는 상영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인권영화제는 무료상영을 하고 있고 상영작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아니다. 또한 대부분의 영화제 상영작에 적용되는 ‘심의면제추천'이라는 틈도 거부해 왔는데, 인권영화제가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는 허용된 법의 좁은 틈새를 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심의면제추천이라는 것이 심의로 작동할 가능성은 항상 남아있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 2001년 모 영화제의 상영작 중 두 작품에 면제추천을 해 주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작년부터 극장 측에서는 심의면제추천을 받지 않으면 대관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심의 없이 영화를 상영하는 인권영화제에 공간을 빌려주었다가는 영업 정지 등 정부의 보복성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결국 등급분류를 받지 않으면 상영관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예전처럼 정부가 대놓고 인권영화제를 탄압하지는 않더라도, 영화 상영을 방해하는 사전검열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며, 극장에서 상영이 안 된다면 차라리 거리로 나가겠다는 결정에 이른 것이다. 작년에는 마로니에 공원을, 올해에는 촛불의 상징인 청계광장을 선택했다.
상영장소를 청계광장으로 결정하면서 고려해야 할 점이 많아졌다. 청계광장은 한 단체가 한 행사로 3일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시민의 공간을 한 단체가 독점하지 못하게 한다는 취지에 동의하여 원래 일주일 동안 진행되던 영화제를 3일로 단축했다. 3일 동안에 모든 상영작들을 적어도 한 번씩 상영해야 하므로 낮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영화를 상영해야 했다. 그리고 낮 상영을 위해서는 부족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비싼 LED 장비를 갖춰야 했다. 사방이 트인 공간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돌발 상황도 고려해야 했고, 어느 때보다도 현장 자원활동가가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광장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경찰의 방해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개막 이틀 전까지 이 모든 준비는 기한에 맞춰 잘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의 일방적 통보는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긴, 우리는 언젠가부터 전경버스가 도심에 차벽을 치는 괴사한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말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공문이 도착하기 전날 경찰서에서 영화제가 일정대로 진행될 것인지 묻는 전화가 오기도 하는 등 수상한 낌새가 있었다. 우리의 표현의 자유는 극장 안에 없었고, 그에 항의하며 나선 광장에도 없었다. 우리에게는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표현할 자유가 있지만 청계광장에서는 그럴 자유가 없었다. 이 나라에서 자기표현은 국가가 정해준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날 오후에 시설관리공단과 면담을 했고, 취소 통보에 항의하며, 다른 장소는 내어줄 수 있는지 협의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저녁에는 활동가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러 가지 가능한 상황과 변수를 고려하며 회의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지난 몇 달간 영화제를 준비해왔던 많은 자원활동가들은 자신들이 기획한 개막식을, 자신들이 만든 자막이 들어간 영화를 많은 시민들 앞에서 예정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영화제 자체가 무산되는 결과만은 피하고 싶었다. 마로니에 공원이나 용산 참사 현장 등 다른 장소에서 개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광장에서 말할 권리를 빼앗기고서도 그저 안정적인 영화 상영만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긴 회의 끝에 인권영화제의 목표와 정신, 그리고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을 생각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인권영화제는 예정대로 청계광장에서 개막하기로 결정되었다. 오전부터 청계광장에 들어가서 상영시간표대로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일단 저녁 개막식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경찰이 어디서부터 막을지, 광장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주변 어디에서 스크린을 펼쳐야 할지, 그것도 방해한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자원활동가들 중에는 기말고사를 앞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모두 연행을 각오하고 영화제를 열어야 할 상황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열린 기자회견에는 생각보다 많은 언론들이 참여했다. 파장이 커지자 시설관리공단은 반박 보도자료를 내고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활동가들은 ‘계획에 없던 형태의' 개막식을 준비하고, 한편으로 취소 통보에 항의하는 1인 시위 준비도 하고 있었다. 각종 선전물과 안내문을 준비하고 전화연락을 하고 바뀐 상영환경에 맞춰 장비를 준비하는 등 사무실은 비상사태였다. 청계광장 개막을 결정한 이후에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고 뭐고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당장 수습해야 할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긴 면담 끝에 시설관리공단은 ‘청계광장 사용허가 취소와 관련해 재승인'을 한다는 공문을 새로 보내왔다. 부당한 처사에 물러나지 않은 덕에 얻은 결과였다. 분명히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급박한 상황 때문에 눌러두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영화제 개막일은 24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는 제쳐두었던 ‘계획대로의' 개막식을 위해 초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실제로 48시간도 안 되었던 그 이틀이 마치 이주일 같았다.




개막일 아침도 순탄치는 않았다. 당일 새벽 경찰이 청계광장에 무대를 쌓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있었다. 경찰은 공단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등 변명을 늘어놓다가 두시간만에 철수했다. 무대설치가 늦어졌지만 오전 12시 첫 영화 상영이 무사히 시작되었다.
이후 3일은 몸은 피곤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6월 5일 개막식에는 1700여명의 관객이 모였다. 사용허가를 취소했다가 재승인하는 쇼를 벌여준 덕분에(!) 인권영화제가 각종 신문과 방송에 등장하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렸다. 인권영화제 재정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억압에 저항한 인권영화제의 결정에 많은 분들이 지지를 보내준 덕이기도 하다. 활동가들은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것에 우리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며 농담을 던지곤 했다.


28편의 영화가 모두 청계광장에서 무사히 상영되었다. 하지만 3일은 너무 짧았고 단 한 번씩만 상영했기 때문에 영화를 볼 기회를 놓친 관객도 많을 것이었다. 짧은 영화제 기간을 보완할 수 있도록 6월 11부터 4일 동안 열리는 앙코르 상영회가 기획되어 있었다. 마포의 성미산 마을극장이 흔쾌히 상영공간을 내주었다.
앙코르 상영회는 청계광장에서와는 달리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성미산 마을극장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극장이었다. 워낙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고 찾아오는 길이 조금 복잡해서 오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관객 수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 꾸준히 2~30명의 관객이 찾아왔다. 앙코르 상영회 기간 내내 얼굴을 보인 사람도 있고, 낮부터 밤까지 모든 영화를 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앙코르 상영회에서는 청계광장에서 하지 못한 ‘감독,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마련했다. 영화 상영 후 아담한 극장 안에 감독과 관객들이 마주 앉아 진행되는 대화가 바로 이번 앙코르 상영회의 묘미였던 것 같다. 활동가들이 진행자로 나섰지만 별다른 진행이 필요 없을 만큼 관객들이 열정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또 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이렇게 생각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들인데,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글이라도 어디 마음 편히 올리지 못하는 시대라니.


내년의 14회 인권영화제에는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수상한 시절인 까닭이다. 지금도 인권영화제가 불허 통보를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들 하는데 그 변화가 퇴행이었나 보다. 표현의 자유 정도야 경제 살리기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니 가볍게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보다. 
서울 도심의 청계광장에서 울리는 영화 속 약자들의 목소리, 영화 출연진과 감독의 발언, 관객들의 지지의 공감의 표현을 그들은 들었을까.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오는 선택을 한 것이었지만, 올해 영화제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오히려 더 많은 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인권영화제를 찾아준 관객들의 지지에 힘입어, 영비법 개정을 위해 힘쓸 일이 남아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영화들이 등급분류와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나는 영화가 되어 자유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인권영화제 http://www.sarangbang.or.kr/hrfilm
13회 인권영화제 블로그 http://blog.jinbo.net/hr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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