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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6호 인터뷰]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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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1. 2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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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6호 / 2009년 10월 29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
 
오재환(ACT! 편집위원회)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몬스터'에는, '511 킨더하임'이라는 비밀 교육기관이 등장한다. 이곳에 들어간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점점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기억이 사라지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서로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 만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어렸을 때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어른이 된 한 등장인물이, 함께 교육을 받았던 다른 친구에 대한 기억을 애써 되살리는 장면이다. '그 녀석은 코코아를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벌레를 좋아했소. 하지만, 곤충 채집은 벌레를 죽이기 때문에 싫어했어요...'

 

 

얼마 전, 불법 체류 때문에 출입국 관리소에 연행되었던 미누가 예상보다 일찍 강제 출국을 당했다. 미누 씨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많은 사람이 이에 반대하면서 미누가 한국에 남아 있도록 해 달라고 법무부에 탄원을 했다. 사람들은 미누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으며, 이주민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법무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속하고 단호하게 미누 씨를 내보냈다. 미누의 체류가 불법인 데다가, 오랫동안 체류했기 때문에 더 큰 불법을 저지른 것이며, 이렇게 큰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명확하지 못한' 이유로 용서한다면 또 다른 불법을 조장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꽤 많은 사람이 법무부가 이야기하는 이유가 설득력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미누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체류 자체가 불법인 데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법질서 확립, 경제적 효율성, 시장의 자유, 이런 말들이 가지는 힘은 강력하다. 그리고 그 강력한 힘은 종종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하는 데 쓰인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품는 연민이, 훨씬 더 커다란 명분 앞에서 우스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왠지 너무 순진한 소리인 것 같아서 자꾸 안으로 움츠러든다. 사람이 겪는 비극을 정당화하는 힘을 가진 말에 설득당하지 않으려면, 그 사람들이 당한 일이 왜 부당한 것인지를 계속해서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사람을 꽤나 지치게 한다. 반면에 잊어버리는 건 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믿음을 잃어버리고, 거대한 힘을 가진 말에 경도되어 누군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똑같이 따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켜내는 방법은, 혼자 고민하다가 지쳐버리지 않도록 함께 모여서 서로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일일 것이다. 이번 ACT! 66호에는, 생각하기 버거운 문제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자는 초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지금껏 미누가 살아왔던 삶을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깡그리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미누: 친구들의 이야기). 강은 지금껏 스스로 흘러 왔고, 그 상태 그대로가 가장 아름답고 좋다(강을 걷다: 낙동강 3.14 프로젝트). 이토록 많은 젊은이가 힘겹고 무기력해하는 건 그저 게을러서가 아니라, 사회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88만원 세대의 청춘을 열었다! 아마추어가 반란을 일으켜도 서울은 성나 있고 나는 프리타?).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 의구심을 느낀다면,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보는 게 어떨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어디선가 혼자서 고민하고 있을 다른 친구들을 불러내어 용기를 주는 것도 좋겠다. 당신이 느끼는 것이 맞다. 생각이 짧다거나 뭘 잘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아직 옳고 그름에 대해서 그 정도의 감은 가지고 있지 않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미누를 돌려달라고 이야기했지만, 미누는 결국 한국에서 쫓겨났다. 미누를 다시 데려오기엔 우리의 목소리가 너무 약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를 끌어낼 수 없더라도, 함께 이야기한다는 건 중요하다. 앞으로도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쌓여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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