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67호 미디어꼼꼼보기] 사람이 없었던 쌍용차 77일, 사진기록집을 내며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7호 / 2009년 11월 30일



사람이 없었던 쌍용차 77일, 사진기록집을 내며
 
정재은(인터넷언론 미디어충청 기자)

 

 

 

 

한 밤에 임진강을 따라 자유로 길을 운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구간이 나오면 어둠에 눈을 비비고, 고개를 빼며 속도를 줄이게 된다. 넓은 도로와 어둠에 임진강은 가려지고, 물빛에 비치는 달빛조차 찾을 수 없다. 가장 반가운 일은 앞차를 발견해 먼저 운전한 이가 비춰주는 빛을 따라가는 일이다. 짙은 어둠이라 멀리서도 그 빛은 반짝인다.

 


그 빛 보고 있노라면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옥쇄파업을 하는 노동자가 공장 안에서 밖에 있는 기자에게 비춰준 작은 손전등 불빛이 생각난다. 지난 7월 21일 이후 경찰, 용역, 쌍용차동차 임직원들이 공장을 완벽하게 포위, 봉쇄했을 때 취재를 위해 온 몸이 나뭇가지로 긁히는 상처를 입고 가방 안에 음식물을 가득 넣어 공장 안으로 들어온 동료 기자가 있었다. 경찰에게 잡히면 조사를 받고 경찰서로, 용역과 임직원에게 잡히면 구타를 당해야 하는 전쟁터. 생사의 갈림길에서 눈이 벌게지도록 밤에 규찰을 서며 때를 잘 맞춰 비춰준 노동자의 불빛과 공장안으로 들어가 노동자의 저항을 기록해야 한다는 기자의 용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민중언론 미디어충청의 77일간의 옥쇄파업 취재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불빛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동자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 인화물질로 가득한 위험천만 한 곳 도장 공장. 그 곳으로 몰렸던 8월 5일 이전부터 공장안에서 취재하고 있던 기자에게 한 노동자는 말했다. “우리 도장 공장 들어가면 같이 취재하러 갈 거지? 밖에는 기자들 많은데 안에서 우리 취재해줄 사람은 없잖아.”

 


사실 처음부터 거창할 것도, 사명감이 높을 것도 없었다. 충청지역 인터넷 신문사가 경기도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 취재에 결합한 것도 단순한 이유였다. 경제위기 속에서 대량의 정리해고가 예상된다는 것과 전철이 뚫려 아산에서 평택까지 거리가 가깝다는 것. 그 뿐이었다.

 


취재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평택공장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목소리는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그 목소리를 전한 언론들은 ‘좌빨(좌파 빨갱이)'로 몰리거나, 기자는 사측으로부터 ‘건조물칩입(무단침입과 비슷한 법률용어)' ‘퇴거불응', 혹은 ‘업무방해'로 고소당했다. 사실 그 자체를 전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택공장은 ‘전쟁터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과연 어떤 죄 값을 받을까? 전쟁터에서 과연 객관성과 공정성이 존재할까?'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게 만드는, 노동자와 국가, 사측, 용역간의 전쟁터였다.

 


단순한 계기로 시작된 취재였지만 그렇게 전쟁을 경험하며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저항, 파업일상을 세상 밖으로 알리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 되었다. 취재 도중 평택공장을 나가다가 구사대에 무차별 구타를 당했던 한 동료기자가 공장안으로 들어서면서 던진 한마디가 기억난다. “몰랐는데, 들어와 보니 정말 그러네요.” 통역이 필요하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노조가 말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평택공장의 현실이었고, 미디어충청은 그 곳에서 파업의 처음과 끝을 함께 했다. 
 


진실을 기록하고자

 


쌍용자동차 파업 사진기록 ‘77일'은 평택공장 안팎의 진실을 기록을 남기고자 만들어진 책이다. 이 투쟁이 얼마나 복잡하고, 폭발적으로 전개될지, 언제 투쟁이 끝날 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때문에 미디어충청 역시 처음부터 사진기록집을 만들기 위한 계획은 없었다.

 


또한 노사가 ‘대타협'을 했지만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책이다. 8월 22일 파업에 참가했던 한 노동자는 경찰의 허위자백 강요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노조와 회사가 ‘대타협' 정신에 입각해 쌍용자동차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합의한 지 불과 15일만의 일이다. 그 뒤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생활고와 경찰의 강압수사에 못 이겨 자택에서 고무호스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했다. 노동자의 자살 시도는 77일 파업 이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민형사상 책임 압박, 100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 가압류, 파업 참가자들의 노조사무실, 공장 출입 금지… 공장 안 노동자들은 ‘로봇'이 되어 그들의 일상마저 통제당하고, 회사는 한 발 더 나가 노조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탈퇴를 강압적으로 추진했다. 옥쇄파업이 끝난 다음 조합원 300여명이 경찰조사를 받았고, 연대온 사람까지 포함해 80여명이 구속되었다.

 
 


 
사진기록집이 발간되고 책을 차근차근 보며 ‘더 알차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또한 사진 하나하나를 보며 오감으로 느꼈던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세포를 움직이며 내 몸 안에서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진은 파업 돌입 전 노사가 매일 밤 공장안 라인에서 대치하고 했던 사진이다. 5월 22일 옥쇄파업 돌입 전날까지 노사는 한 날도 쉬지 않고 대치했다. 공장 안에는 “경영진이나 죄 짤라라”라고 적힌 종이들이 이곳저곳에 붙었고, 정문주변엔 농성을 하는 노동자, 가족들의 천막이 즐비했다. 이 때 회사는 조립 3팀 야간조만 작업을 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노사 간의 갈등은 더 높아만 갔다. 노조 간부들은 정문 맨바닥에 앉아 야간출근을 하는 노동자들을 돌려보내며 야간 근무를 거부했고, 노사는 밤새 힘겨루기를 했다. 불 꺼진 어둠의 공장 안에선 소화기가 뿌려지고, 라인마다 노동가요가 울려 퍼졌다. 난폭한 관리자가 있는 부서에선 멱살을 잡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고,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채증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더 심해졌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77일간만 이어졌던 게 아니다. 1월 9일 상하이차가 법정관리를 신청할 때부터, 아니 한상균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은 당선되었던 2008년 11월 말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 상하이차가 경영했던 4년 동안 노동자들은 해외투기자본에 저항했다.

 


당시 사측은 기자를 생산 정보를 밖으로 빼돌리려는 ‘스파이' 쯤으로 여겼다. 카메라를 빼앗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또한 노조가 취재를 요청했기에 노조와 한 패거리쯤으로 여겼다. 일부 언론사만 보도자료 안 주기, 취재 장소에 안 들여보내기 등의 방법을 쓰며 국민의 알권리를 차단했다. 
 
  


 
또한 7월 19일 경찰병력이 본격적으로 평택공장에 투입되어 노동자-경찰, 사측, 용역의 대치가 가장 격렬했던 밤, 도장 공장 옥상에서 사측의 선무방송과 공격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숨죽이며 공장을 지키고 있었던 사진이다. 노조는 20일 낮에 노조 간부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측에게 음악과 방송을 끄고 애도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으나 사측은 방송을 더 크게 틀었다. ‘오! 필승 코리아' 노래는 온 공장과 평택지역을 덮었다. 이어지는 방송과 음악은 밤을 지새웠고, 쌍용차 평택공장의 밤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갈등으로 깊어만 갔다.
 
 
기자로서 느낀 수많은 경험과 고민들

 


쌍용차 파업이 끝났지만 ‘기자'로서 취재하면서 느꼈던 수많은 경험과 고민들은 아직은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사측은 규모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작은 언론이든 큰 언론이든 가리지 않고 취재를 차단했다. 그 기준은 얼마나 사측의 입장에서 기사를 ‘써주느냐'였다. 공장정문에는 ‘MBC는 노동조합의 나팔수'라고 붙여 놓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무방송을 하며 노동자들에게 ‘미디어충청, 사자후' 등의 언론사를 믿지 말라고 했다. 회사 측의 이러한 태도는 77일간 이어졌다. 회사 측의 이야기를 쓰면 공정보도, 노조의 이야기를 쓰면 편파보도였던 것이다.

 


사측 임직원-비해고자들은 구사대로 변해 ‘정상조업'을 외치며 공장 진입을 시작했을 때도 기억에 남는다. 6월 26~27일 ‘32시간 전투'를 치르며 노동자 간의 갈등은 최고조에 올랐다. ‘32시간 전투' 당시 구사대는 동료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렀고, 미디어충청 기자에게만 욕설을 퍼붓고 물리적으로 취재를 막았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사측이 무장했다는 것을 보도하지 않았고, 파업노동자들을 ‘폭도'로 묘사하는 데만 급급했다. 일부 언론은 노사 양측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기조를 유지했지만, 노사 간의 물리적 충돌을 중심으로 한 선정적인 보도는 노동자들이 왜 싸우는 지, 그 요구를 드러내지 못했다. 언론의 위력은 강력하지만 철학의 부재로 인해 껍데기뿐인 언론을 직시하게 되었고, 이 같은 직시는 미디어충청과 기자 개인에게도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였을까. 미디어충청에 악성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논쟁과 비판, 의견을 나누는 댓글이 아닌 기자 개인을 협박하고, 인신공격하며,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댓글들이었다. 파업이 끝난 뒤에도 이어진 댓글을 통해 어떤 이들은 기자의 자동차 번호나 집주소를 알고 있다거나 오백만원을 주면 소리 소문 없이 청부살인이 가능하다고 협박했다. 기자가 ‘여자'라는 것을 안 이들은 언어 성폭력을 통해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켰고, 기자의 이름을 활용해 온갖 거짓 기사를 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택공장 안은 파업기간동안 인터넷이 차단되는 등 주변의 여러 가지 여건상 댓글들을 꼼꼼히 볼 수 없었다.

 


사측과 경찰은 파업이 끝난 뒤에도 공장안에 남아있던 기자들에게 끝까지 불이익(?)을 주었다. 다섯 명의 기자들은 바로 경찰서로 연행됐고 유치장에서 46시간 만에 나왔다. 특히 미디어충청 기자는 업무방해로 고소까지 됐다. 취재를 위한 행동이 ‘업무방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경찰들은 조사 내내 취재와는 상관없는 질문들을 경찰들은 쏟아냈고, 항의에도 불구하고 동의도 없이 녹화조사를 감행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더 잘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기록집을 본 쌍용차 노동자의 부인이자 가족대책위 회원이었던 한 분이 이렇게 적어주셨다.

 


“파업 중에 공권력이 새벽에 공장을 강제로 침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겁도 없이 큰 아이의 가방을 싸서 어린 아들을 안고 공장 안 천막에서 잠을 잤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앞에 나가 제발 이러지 말라고 사정이라도 해야겠어서 말입니다. 다행히 그날 새벽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달걀하나 부쳐서 아침을 먹이고 조합원 삼촌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학교에 가려고 정문 앞에 서있는 아이의 사진이 사진집에 있습니다. 가방을 메고 실내화주머니를 듣고 사진기를 들고 있는 기자를 보고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 내 딸이어서 그럴까요? 그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쁩니다. 이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할 거 같습니다. 구속자로, 해고자로, 무급자로 징계를 기다리는 비해고자로 모두들 각자에게 떨어진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로따로 힘들어말고 이제 같이 나눠지고 함께 가자고 우리 아이들이 맘껏 웃을 수 있게 그런 날도 한번은 만들어 보자고.”

 


이것만으로 사진기록집은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까지다.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아마도 77일 파업이 쌍용차 노동자들만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민주노조 운동에 중요한 획을 긋는 역사이자 나의 역사. 그리고 이 땅 민중, ‘없는 자'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