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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7호 이슈와 현장]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얼간이들의 세상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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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7호 / 2009년 11월 30일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얼간이들의 세상을 위한 안내서
 
 
완군 / 미디어스 북 에디터 (www.mediaus.co,kr)

 

 

 

편집자주

 

절차상 위법은 있지만 법적 효력은 유효하다고 한 헌재의 판결 이후 더욱 거세지고 있는 미디어법 재개정 논란. 과연 이 미디어법이 시행되면 실제 우리의 삶과 일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우리는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이번 ACT!에서는 막상 손에 잡히지 않는, 좀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미디어법이 현실화되면 어떤 것들이 변화할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처음엔 그저 채널이 몇 개 더 생기는 것인가 했다. 사실, 지상파의 독점이 너무 심각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미국이나 일본은 안 그렇다는데... 얼핏 생각하기에 우리 미디어 환경이 좀 너저분할 정도로 후진 것도 같았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 경쟁이야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 말이다.

 

 

게다가 방송국 사람들 월급은 또 좀 높은가. 나한테 특별히 떨어질 것 없었지만 은근히 고소하기까지 했다. 또 나 같은 신방과 출신 백수의 입장에서야 회사가 늘어나면 무조건 좋은 일 아닌가. 백수들만 앉아있는 카페에 빌게이츠가 들어와서 카페 안 사람들의 평균 소득이 늘어난 들 내 소득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내가 빌게이츠가 될 수도 있다는 환상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런 얘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종합편성채널이 도입되면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근본적인 토양이 사라지고 말 거라고. 사실 그러려니 했다. 원래 그런 디스토피아만 얘기하는 사람들은 꼭 있는 법이다. MB의 말처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반대만 해댄다는 생각도 했다. 솔직히 그 호들갑스런 우려와 반대의 설레발들에 쉽사리 납득이 안됐다. 한국사회를 뭘로 보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냐 말이다. 뭐든 할 수 있는 민족 아닌가. 게다가 한국처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 사회에서, 그리고 이미 인터넷이라고 하는 놀라운 표현의 경연장이 있는데 방송국 몇 개 더 생긴다고 표현의 자유가 어찌 되기야 하겠나 싶었던 것이다.

 


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그래서 헌재가 관습법만큼이나 괴상망측한 논리를 들고 나왔을 때도 그저 달리는 창밖으로 스치는 고속도로 풍경 대하듯 '저 할배들 세상 참 어렵게 사네'했고, 언론노조 위원장이 '사람 보는데서 굶으면 잡혀 간다'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도 '추운데 사서 고생하네' 하기만 했었다. 그렇게 조중동이 방송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의 논리에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하며, 구경만 했었다. 솔직히, 품평하기 딱 좋은 주제이지 내 일은 아니지 싶었다.

 


이제 안다. 그 대책 없던 방관, 그게,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사회의 공기가 이렇게까지 추잡스러워지고 둔탁해진 것은.

 


맞다. 무식했다. 명색이 신방과 출신이라지만 솔직히 종합편성채널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몰랐다. 학교에서야 워낙 영어 공부만 해댔으니 별로 기억에 남는 언론학 개념도 없었고, 취업에 직접 필요하지도 않은 그깟 시사용어들은 대충 언저리만 알고 있어도 되는 것들 이었다. 얼추, 지상파 같이 뉴스에서 쇼오락까지 다 할 수 있는 채널이 케이블에도 생기나보다 정도로 이해했다. 그래, 그랬다.

 


이미 케이블에서는 각각의 분야별로 다양한 채널들이 경합 중이던 상황이었다. 어차피 몇 수십 개의 채널은 리모컨에서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한 채널에 모든 것이 집약된다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콘텐츠들이 방송에 추가되는 것 이상의 무슨 큰 메리트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뉴스의 경우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으면 안 보면 그만인 일이었고, 나머지 프로그램들이야 재밌어야 보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싶었다. 이제 서야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처음엔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조중동이 굴지의 기업들과 손을 맞잡고 종합편성채널 사업자가 되었다. 경제지들에겐 홈쇼핑 채널이 떨어졌다. 종합편성채널 사업자로 선정되기 전까지는 고분고분하던 조중동은 3사가 모두 사업자로 선정되자 종합편성채널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종합편성채널이 반드시 필요하고, 사업자가 되기 위해 온갖 사투를 다할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볼멘소리의 강도가 세지기 시작했다. 시작 전부터 정부의 지원이 더 화끈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는 협박을 공공연히 했다.

 


때 마침 선거 직전이었다. 그때쯤부터 다음 대선에선 보다 화끈한 종합편성지원정책을 약속한 이가 청와대의 주인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살짝 변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이왕 시작했으니, 종합편성채널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어떤 유력한 대선 후보는 종합편성채널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연간 2000억의 비용 중 40%를 국고에서 융자해주는 파격적인 안을 제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광고를 종합편성채널에 몰아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겠다는 이도 있었고, 수신료 개념의 세금을 마련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렇게 시작한 종편이지만 그 시작은 참으로 미약했다. 어디까지나 전체 200여개의 채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홈쇼핑들을 밀어내고 이른바 징검다리의 황금 숫자들을 차지했지만 뚜렷한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조선일보 방송의 경우 많이 자제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몇몇 고비에서 이념적 편향성을 노골화하면서 점차 고립됐고, 동아일보 방송의 경우 아무리 선의로 봐주려 해도 도저히 깜이 안 되는 듣보잡들을 끼워 넣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나마 선전했던 것이 중앙일보 방송이었는데, 미국의 타임워너그룹과 컨소시움을 맺은 전략이 주효했는지 타임워너그룹이 유명 프로그램들을 재방영하거나 그 라이선스를 확보한 자체 제작 프로그램들을 선보이며 일부 화제를 일으켰다. 또 QTV와 CJ 미디어의 콘텐츠들을 끌고 들어와 먼저 방송에 진출해있던 노하우를 십분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종편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은 1%에 채 미치지 못하는 시청률을 기록할 뿐이었다. 이전부터 스멀스멀 잠재해있던 회의론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은 종편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아일보의 부도설이 사실로 확인된 순간부터였다. 겨우겨우 어떻게 꾸려가던 동아일보가 종편 운영의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종편 채널 사업권을 매각할 수도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얼핏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종합편성채널은 결국 실패한 프로젝트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때부터였다. 삼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TV를 틀자마자 중앙일보 방송이 나오도록 설정된 차세대 LED TV를 공짜로 주는 행사가 시작됐다. 과거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보려면 공짜이되 의무적으로 광고를 봐야했던 것과 같은 일종의 의무시청이었다. 그 프로모션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300여만 원에 달하는 TV를 공짜로 준다는데 그까짓 의무시청이 대수인가 싶었다. LG는 조선일보 방송을 의무 장착한 더 큰 TV를 선보였다. 그러자 중앙일보는 신문 구독 신청까지 하면 또 다른 서비스를 제공했고, 삼성카드를 쓰는 사람에게 추가 할인 혜택을 주었다. 휴대폰을 애니콜로 기기를 동반 변경하면 많게는 수백만 원의 현금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공정거래에 위반된다는 항의가 있었지만 인터넷만 좀 시끄러웠을 뿐이었다. 그 시점 정부는 결과적으로 삼성을 등에 업은 중앙일보 방송의 물량공세에 주춤하던 조선일보 방송을 도와주려했는지 종합편성채널의 심의 기준을 대폭 완화해버리기까지 했다. 중앙일보와 삼성의 합작 프로모션에 주춤하던 조선일보가 정부의 그 방침이 발표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조선일보 방송은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변신이 빨랐다. 이념, 그 따위는 개나 줘버리지 싶더니 이번에는 정확히 그 극단적 지평에서 지독히도 선정적인 상업주의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 SEX의 지평이 극단적으로 넓어지고 추해진 시간이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연예인 지망생들이 일반인들과 직접 성관계를 갖는 프로그램이 선보여졌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이들이 뭔가 약점 잡힌 사람처럼 TV로 불려 나와 메가톤급의 자기 비밀을 폭로하는 토크쇼가 연일 계속됐다. 조선일보의 편성은 참혹할 정도로 고약했는데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더 센 성경험을 말하는 사람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을 제시하는 서바이벌 베틀까지 등장했다.

 


그 사이 뉴스는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잘 모르겠다. 워낙 뉴스를 볼 일이 없게 되서. 종합편성채널 출범 이후 뉴스는 점점 줄어들더니 최근에는 지상파 방송들조차 메인 뉴스의 폐지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이다. 일종의 사회적 합의와도 같던 9시에는 뉴스를 한다는 법칙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 마저 채 몇%도 안 되는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지상파 채널 사이에 자리를 잡은 종편들은 표적 편성이라고 하여 9시대에 전체 프로그램 중에 가장 핫한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것은 지상파의 여론 지배력을 꺾기 위한 이른바 자객 편성이었다. 생각해보라. SBS에서 드라마만 할 때도 휘청거리던 것이 뉴스의 얄팍한 시청률이었는데, 동아일보 방송에선 연일 최신 개봉대작 영화를 해대고, 조선일보 방송에선 좀처럼 TV에선 볼 수 없던 이들이 장기자랑을 벌이고, 중앙일보 방송에선 아예 거대 연예기획사와 함께 전 국민이 참여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하는데 고루한 뉴스가 무슨 수로 버틸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겉만 들쑤시는 보도를 할 수 밖에 없던 TV 뉴스는 이제 거의 도태된 상황이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전략은 TV 자체를 저열한 매체로 만들어 단물만 빼먹고, 오피니언 사이에서 신문의 지배력을 거꾸로 강화시키는 전략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인터넷에는 연예 뉴스들만 넘쳐나니 역설적이게도 종이신문의 사회적 위력은 강화되고 말았다. 미디어가 무슨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 새끼도 아니고 이 역행을 뭐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결국, 그래서 세상은 종편이 없던 때로부터 한 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했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예산을 국회에서 심의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응답이 50%를 넘었다. 종편이 추진되던 시점쯤 추진되었던 4대강 정비 사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물이 썩어가 수돗물을 수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10대들의 경우 한국의 강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그렇지 않다는 의견보다 조금 더 높은 지경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얼간이들의 세상을 살고 있다.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00원짜리 삼겹살에 앞다리 살이 쓰였다고 분개하고, TV에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닮은 여대생이 나왔다고 욕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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