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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71호 이슈와 현장] 두리반, 투쟁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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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71호 / 2010년 9월 30일

 
 
 
 
두리반, 투쟁을 노래하다
 
 
 
류한주(미디액트 독립 다큐멘터리 13기 수료생)

 

 

 

 

분명 두리반은 철거 농성장이다. 주변에는 부서진 건물 잔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고 개발 구역을 에워싸고 있는 철판에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구호들이 어지럽게 휘갈겨져 있다. 그리고 농성장 내부, 여기엔 이곳이 주변에서 꽤 알려진 칼국수 집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단서가 없다. 그동안 두리반에서 열렸던 행사 포스터와 투쟁을 응원하는 문구들이 어지럽게 벽면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곳엔 전기가 끊긴지 오래다. 두 달 가까이 외부로부터 전기가 차단된 이곳은 발전기로 만들어진 전기가 근근이 알전구 몇 개를 밝혀 줄 뿐이다. 하지만 두리반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것도 ‘철거'라는 암울한 단어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밝고 발랄한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다. 모여서 노래하고 춤춘다.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든다. 두리반 앞을 지나던 행인들이 두리반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철거 농성장으로 보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즐거워하는 모습은 어딘가 어울릴 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곳을 철거농성장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두리반을 이해하는데 있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칼국수집 두리반, 농성장으로 변하다

 

 

2005년 3월 안종녀 씨는 두리반이라는 간판을 걸고 동교동에 칼국수집을 차렸다. 청약예금을 해약하고 대출을 받은 돈으로 겨우 마련한 식당이었다. 소설을 쓰는 유채림 씨는 가끔씩 들러 식당일을 거들어 주었다. 두리반은 그들 네 식구에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함 없게 살아가게 해 주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식당을 차린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은 2007년 12월 명도소송장이 날아들었다. 두리반 근처에서 공항철도역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후였고 이미 개발시행사인 (주)남전디엔씨는 두리반과 그 주변 동교동 167번지 일대의 땅을 다 사들인 뒤였다. 두리반과 그 일대 세입자 12세대는 2008년 2월부터 법정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임대차 보호법의 예외 조항은 지구단위개발의 세입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시행사 측은 세입자들에게 이사 비용 70만원, 100만원, 300만원을 주겠다며 나가기를 종용했다. 그리고 반드시 개별적으로 협상에 임할 것을 요구했다. 세입자들이 대책위를 만들어 대응했지만 시행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입자들은 금전적인 이유로 항소를 단념했던 라틴댄스학원이 용역들의 방해에 영업을 포기하고 쫓겨나간 것을 기억했다. 그들은 불안해졌다. 두리반을 제외한 세입자들이 개별적으로 개발업자들에게 연락을 하였고 몇 백만 원의 이사 비용을 받고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갔다. 오직 두리반만 남았다. 그리고 얼마 뒤인 2009년 12월 24일 두리반에 용역이 들이닥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용산참사 협상이 타결되고 사태가 일단락되었을 때는 작년 12월 30일이다. 두리반에 용역들이 몰려들어 집기를 들고 나간 때는 작년 12월 24일. 그리고 그 다음날, 두리반 주인인 안종려 씨와 유채림 씨는 철판을 뜯어내고 두리반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용산참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두리반 농성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때, 두 분은 후배 두 명과 함께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는 용역들을 대비해 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두리반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리고 두리반에 있던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매서운 추위와 떨치기 힘든 불안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던 시기였다.

 

 

 

농성장 두리반을 찾아 온 사람들

 

 

 

내가 두리반을 혼자 찾아 갔던 때는 1월 31일이었다. 미디액트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을 끝내고 문정현 감독의 조감독으로 다큐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때였다. 다큐 연출자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조차 감이 별로 없었던 초짜 연출자에게 아니나 다를까 유채림 선생님과 안종려 사장님은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나는 그 분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고 용역들에 대해 한참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그 분들은 날 두리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온 용역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 후로 꾸준히 두리반을 드나들었지만 그 냉랭함을 완전히 거두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두리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공감대가 만들어 진 것은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한 4월 초, 두리반에 여러 사람들이 오고가며 분위기가 온화해진 농성 100일 기념 행사 전후였다.


용역으로 오해를 받은 사람이 또 있었다. 홍대 주변 클럽에서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는 머머스룸의 정동민 씨가 그랬다. 그가 유 선생님과 안사장님을 만나 토요일 자립음악회를 제안 했을 때도 두 분은 음악회가 열리는 그 날까지 동민 씨가 용역은 아닐까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고 한다. 어디에서 두리반 소식을 듣고 왔는지 두리반에 사람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유채림 선생님이 활동해 오셨던 작가회의의 문필가 분들과 지인들이 두리반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사람들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두리반의 현실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두리반 투쟁을 노래하다

 

 

2월부터 개인적으로 두리반을 찾은 이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매주 행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월말 그룹 천지인에서 활동했던 엄보컬 김선수가 ‘하늘지붕 음악회을 월요일마다 열었다. 2월초 푸른영상의 문정현 감독은 화요일마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목요일엔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의 예배가 드려졌다. 금요일엔 활동가 조약골과 도둑괭이가 주관하는 ‘칼국수 음악회' 그리고 토요일에는 자립음악가생산조합이 ‘자립음악회'를 열기 시작했다. 여러 행사들로 두리반은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드나들 수는 있는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바꿔 갔고 유 선생님과 안사장님은 용역들에 대한 긴장을 거두어 갈 수 있었다. 
 

 


긴장과 불안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투쟁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홍대주변의 가난한 뮤지션들 몇몇은 재개발의 폭력적인 논리가 자신들의 활동영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그들에게 두리반은 그 폭력이 실체로 드러난 현장이었다. 건설자본이 홍대주변의 땅을 개발해서 땅값이 치솟으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대게의 클럽들은 홍대주변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클럽이 사라지면 뮤지션들도 떠날 수 밖에 없다. 두리반에 모인 뮤지션들은 그렇게 투쟁을 노래한다. 그리고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의 ‘잉여'들이 두리반에 모인다. 취업이니 스펙이니 결혼이니 하는 말들에 그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두리반에선 그런 그들에게 일하기를 강요하는 이가 없다. 일을 시키는 사람도 없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할 때 한다.

 

 


 

그런 그들이 모여 일을 냈던 게 51+였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51개 밴드를 불러 5천 백 원의 입장료로 두리반 투쟁자금을 모으자. 이들의 기획 의도는 이렇듯 간단하고 명료했다. 4월 초부터 이야기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고 함께 할 밴드들을 섭외하고 나니 출연을 약속한 밴드들이 애당초 예상했던 수를 훌쩍 뛰어 넘었다. 62개 밴드가 모여 행사명이 51+가 된다. 그리고 행사 당일 두리반엔 2천 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오전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공연이 이어졌다. 그날 두리반 행사를 진행했던 사람들은 고작 5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날 화창한 그 봄날, 두리반엔 어떤 곳에서도 쉽게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가 공간에 가득 차 있었다. 열정과 자유 그리고 선의와 호의가 충만한 공간에 있을 때 그 느낌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은 음악가들이 왜 철거현장에서 아무 대가 없이 노래했는지를. 또 턱없이 부족했던 인원이 13시간 이상 이어졌던 행사를 어떻게 사고 없이 진행할 수 있었는지를. 또 무엇이 수많은 관객들을 두리반으로 불러 들였는지를 생각할 때 그 답을 난 아직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단전, 그들이 두리반을 대하는 방식

 


지금도 여전히 두리반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21일 두리반에 전기 공급이 중단됐다. 더위가 물러난 지금이야 그 때 만큼 절실한 것이 아니지만 무더위 속에 전기 없이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역이었다. 냉장고를 돌릴 수 없어 음식을 보관할 수 없었다. 조리한 음식은 하루를 넘길 수 없이 금방 상해 버렸다. 선풍기 조차 마음대로 돌릴 수 없어 두리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찜통 같던 더위를 그저 온 몸으로 느껴야 했다. 밤이면 고통은 더했다. 열대야에 잠을 청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모기들의 극성에 잠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이 힘든 일이 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두리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지쳐갔다. 51+ 이후로 즐거웠던 공간이었던 두리반이 힘겨운 곳으로 변했다.


 

 

발 시행사가 두리반에 이어진 전기선을 끊은 것은 농성 직후인 작년 12월 26일이다. 단전일까지 전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인근 공사현장에서의 호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행사가 건설회사에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는 공문을 보내면서 더 이상 두리반은 건설 현장으로부터 전기를 끌어 쓸 수 없게 되었다. 두리반 대책위원들은 한전에 전기를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다음날 전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은 시행사의 공문 한 통으로 몇 시간이 안 돼 취소되었다. 두리반의 안종려 사장은 마포구청을 찾았다. 일주일간 도시계획과를 점거했다. 점거라기 보단 동거라 할 만한 구청 안에서의 시위는 마포구청장이 두리반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전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마무리 됐다. 구청에서는 덩치 큰 발전기 하나만 보내주고 말았다. 하루 10만 원 이상 들어가는 연료비는 두리반의 책임이라고 한다. 억울한 두리반은 신문사에 광고를 실기로 하고 두리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돈을 모았다. 충분한 돈이 짦은 시간 안에 모였다. 하지만 광고를 내기로 한 모 신문사와의 약속도 바로 전날 취소됐다. 그들은 두리반 일대 개발업체의 배후이자 그 신문의 최대 광고주 중 하나인 GS건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신문사 광고국을 찾아가 항의했다. 고성이 오가는 대화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서야 광고가 실리게 됐다. 두리반과 그들의 약속은 그렇게 쉽게 저버릴 수 있는 헛된 것이었다.

 


두리반 아직도 투쟁을 노래한다

 

 

 

두리반에서는 지금도 음악회가 열린다. 여전히 사람들은 두리반을 찾고 있고 아직도 전기는 공급되지 않고 있다. 두리반이 언제 농성을 마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철거 당사자들의 바람은 그저 비슷한 규모의 식당을 인근에 다시 열 수 있는 현실적인 보상이지만 그들은 그런 요구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도 두리반은 꿋꿋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런 무언의 폭력에 굴하지 않으며 함께 하는 이들의 연대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 이 힘에 그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는 두리반에서 투쟁의 노래가 어떻게 그치게 될지도 그 때 알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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