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3호 Me,Dear 2015.5.10]
슈퍼맨과 관심병사
이수미(ACT!편집위원회)
얼마 전 지인들과 모임에서의 일이다. 사는 얘기를 한참 나누다 화젯거리가 떨어질 무렵 누군가 최근 육아예능의 대세로 떠오른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삼둥이 이야기를 꺼냈다. 누구는 민국이 팬이니, 만세 팬이니, 대한이 팬이니 하며 마치 엄마인 양, 이모인 양 아이들의 귀엽고 총명한 모습을 자랑하느라 입씨름을 할 정도였다. 그러다 한 사람이 이번에 군 입대를 한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대화는 자연스레 군대예능 프로그램으로 옮겨갔다. 최근 여군특집에 ‘아로미’에서 시즌1에 어리바리 ‘아기병사’까지 여자들이 모여 앉아 한참을 군대 얘기로 꽃을 피웠다.
육아예능, 군대예능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연예뉴스를 장식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몇 해 전의 일이다. 스타들의 고군분투 육아 경험담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휴일 오후 시간대를 점유하고 있는 육아예능 프로그램과, 일반인에게는 접근금지구역이었던 병영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군의 이미지를 친근하게 바꾸고 있는 군대예능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 KBS2 <슈퍼 선데이- 슈퍼맨이 돌아왔다> 사진: KBS
특히 최근 육아예능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KBS2 <해피선데이 -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주1) 아침에 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내고 모여 앉은 젊은 엄마들이나, 식사 후 커피잔을 들고 모인 회사원들, 경로당 텔레비전 앞에 삼삼오오 모인 어르신들까지 공통의 화제가 삼둥이인 것을 보면 ‘국민 아기’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을 통해 노출하는 먹거리, 의류, 유아용품, 학습지 등의 매출이 급격히 오르며 스타의 아이들이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다.(*주2)
▲ 사진: ELLE ▲ 사진 : 웅진싱크빅
▲ 사진: 세르반
어린아이들에게 이렇게 대중적 관심이 쏠리는 것을 보면 그동안 억눌린 대국민의 육아 욕구가 TV 속 아이들을 통해 분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장기간 지속하고 있는 출산율 저하의 여파로 실제 생활에서 어린 아기를 볼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TV를 통해서라도 아이들의 재롱과 성장을 지켜보고 싶은 것은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일지 모른다.
그러나 육아예능 프로그램에 대중적 관심이 몰리면 몰릴수록 천진한 아이들의 재롱을 마음 편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다. 통계청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1.21명으로 2001년 이후 14년째 초저출산을 기록하고 있다.(*주3) 특히 30대 후반(35~39세)의 노산이 늘고 있는 반면 20대 여성들의 출산은 급격히 줄고 있다.(*주4) 한창 결혼할 나이에 청년들이 취업의 문턱에 걸리고 경제난에 넘어지느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채 젊음을 보내고 있다. 간신히 결혼을 해도 육아비와 교육비를 감당하기 힘들고, 맞벌이라도 할라치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치 않다. 보육정책 개선이니 무상보육이니 말은 많지만 실질적인 대책은 세워지지 않고 있다.
▲ TV가 그려내는 ‘소비를 통해 이루어지는 육아’에 대한 환상은
출산·보육문제에 대한 현실 인식을 가로막는다. 영상 캡처: KBS
이러한 현실에서 PPL(*주5)로 가득한 TV 속 육아 공간과 그것들의 소비를 통해 이루어지는 ‘육아’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당신도 멋진 슈퍼맨 부모가 되기 위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소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삼둥이 사진이 새겨진 달력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사서 먹이고, 그들이 광고하는 유아용품을 소비한다 해도 결코 우리는 ‘슈퍼맨’이 될 수 없다.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을 외면한 채,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어린이집 유아 폭행 사건들을 덮어둔 채, 장밋빛으로 펼쳐 보이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환상은 대다수 국민에게 채울 수 없는 갈증만을 줄 뿐이다. 대리만족 뒤에 남는 건 그보다 큰 절망이다.
▲ MBC<일밤 - 진짜 사나이> 사진: MBC
육아예능 프로그램이 능력자 부모와의 동일시를 통한 ‘슈퍼맨’ 되기를 부추긴다면 군대예능 프로그램은 계급적 서열 구조 속에서 하급자를 강압하는 강자와의 동일시를 강요한다. 연예인들의 병영 생활 체험기를 다루고 있는 MBC의 <일밤- 진짜 사나이>는 아직 군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돌이나 외국 출신, 또는 이미 오래전에 군대를 다녀왔거나 군 복무를 면제받은 연예인들이 주요 출연진이다. 이들은 체력이 부족하거나, 군대문화에 익숙하지 않거나, 주눅이 들거나, 또는 그냥 겁에 질려서 온갖 실수를 저지른다. 시청자들은 어쩐지 조금 모자라 보이는 이들의 실수를 때론 동정 어린 시선으로, 가끔은 쯧쯧쯧 혀를 차며, 때론 낄낄거리며 느긋하게 지켜본다. 결국, 이들의 시련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로, 또는 뜨거운 전우애로 감동적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들 ‘관심병사’들이 구르고, 애원하고, 쩔쩔맬 때 그를 지켜보는 우리가 공유하는 은밀한 시선은 약자의 고통을 즐기는 강자의 그것이다. 엄격하고 통제된 군대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집단을 군에 불러 놓고 그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겪게 되는 생고생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재미 창출 방법이다. 군대예능 프로그램의 이러한 오락성은 군대라는 폐쇄된 특수 집단의 계급적 서열구조 속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이 오락성의 바탕이 현실에선 군대 폭력의 발판이기도 하다.
▲ 사진: MBC
두 달간 지속적으로 매를 맞다가 결국 숨진 윤 일병(*주6), 집단따돌림과 놀림에 시달리다 총기를 난사해 동료 장병들을 살해한 임 병장(*주7), 직속상관의 지속적인 성추행과 협박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오 대위(*주8)…. 군대 내 왕따, 폭행, 성추행, 그로 인한 자살과 총기 사건들이 상명하복의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군대 폭력을 뿌리 뽑고 병영문화를 개선하겠다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힘을 악용하는 군대의 고질적 병폐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미화시키며 시청자를 강자의 시선에 동일시하게 만들고, 약자의 고통을 희화화하는 군대예능 프로그램의 말하기 방식은 사악하다.
특히 ‘여군특집’은 엄격하고 통제된 군대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 연예인들을 혹독한 군사훈련과정에 투입시켜놓고 이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부각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성(性) 자체를 ‘관심병사’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번에 방영된 <진짜 사나이- 여군특집2>에서는 8명의 여성 연예인들이 여군 부사관 특별전형과정에 투입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여성들은 끊임없이 훌쩍거리거나, 쩔쩔매거나, 새된 소리로 악을 쓰거나, 여유가 있을 땐 남성 상관에게 핑크빛 시선을 던지는 존재로 그려졌다. <진짜 사나이>란 제목이 말하고 있듯 군인은 진짜로 ‘사나이’여야 한다는 식의 성차별적 시각은 여성을 남성보다 하등 위치에 수직 배열시킴으로써 군대에서의 여군의 위상을 남성 상관의 보조자로 한정시키는데 일조한다. 군대 내 여군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과 인권유린이 지속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군대 예능의 성에 대한 편향된 시각은 여군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 MBC<일밤-진짜 사나이‘여군특집2’> 영상캡처: MBC
▲ 영상 캡처: MBC
언젠가 TV 광고 중 ‘척한 당신 착한 당신’이라는 카피의 광고가 있었다. 이 광고에는 늘 생활고로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척하는 착한 당신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당신이 정말 착한 당신일까? 아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야 한다. 약자인 당신이 마냥 강자인 척 하다 보면 진짜 강자는 더욱 강해져서 당신을 영원히 약자로 옥죄일지 모른다. 최근에 육아예능과 군대예능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슈퍼맨인 척하라고 말하고 있다. 슈퍼맨이 되어 소비하고, 슈퍼맨이 되어 관심병사의 고통을 즐기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 대부분은 슈퍼맨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병사에 가깝다. 사회의 부조리 앞에 눈을 감고 ‘슈퍼맨’인 척하는 당신은 착하지 않다. 스스로 ‘관심병사’임을 자각하고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바로 당신이, ‘착한 당신’이다. □
*각주
(*주1)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3.30일 현재 39주 연속 동시간대 전국기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닐슨코리아 조사]
(*주2) [아동 패션계도 '삼둥이'에 푹 빠졌다] 한국일보 2015.02.04.
http://www.hankookilbo.com/v/b2ff08555f7b41e3baec7e1892374a2d
[송일국 삼둥이, 광고계 러브콜 계속된다 ] 민중의 소리 2014.12.19
http://www.vop.co.kr/A00000827794.html
[유아용품업계 스타 자녀 PPL 효과]파이낸셜뉴스 2015.03.01
http://www.fnnews.com/news/201503011711472625
(*주3) ‘합계출산율’은 한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를 말한다. ‘초저출산’은 합계출산이 1.30명 이하.
(*주4) [지난해 출산율 1.21명…역대 두 번째로 낮아] 한겨레 2015. 02.2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9871.html
(*주5) PPL(Product Placement)이란 특정 기업의 협찬을 대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해당 기업의 상품이나 브랜드 이미지를 끼워 넣는 광고기법이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주6) [윤일병 가해병사 살인죄 적용, '무기징역 선고 받나?'] 헤럴드경제 2014.09. 02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409022130007002205_1
(*주7) [총기난사 임병장은 왜 반성 않나...] 경향신문. 2015.02.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170600045&code=910302
(*주8) [오대위 유족 "'같이 잘까'가 농담? 당신 딸이라도?"]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4.03.26.
http://www.nocutnews.co.kr/news/1211453
[필자소개] 이수미(ACT!편집위원회)
글쓰기와 독서, 미디어교육을 오가며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산골 라디오에서 DJ를 하는 할머니로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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