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95호 Me,Dear] No paradise(, keep the parade)

전체 기사보기/Me,Dear

by acteditor 2015. 10. 27. 20:58

본문

[ACT! 95호 Me, Dear 2015.11.15]


No paradise(, keep the parade)


스이 (ACT!편집위원)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베를린 외국인청에 비자를 받으러 가기 전날 밤. 12시가 넘어가는데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아니 이제 오늘이로군) 새벽 4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부담스럽다거나,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수면양말을 신고 이불을 덮어도 발이 시렵다거나, (이제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아침 열한시에 일어났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입학허가증이 있으면 임시비자는 잘 주는 편이라고 하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상황인데. 나는 왜 잠이 오지 않는 걸까. 


 작년 8월, 전세집을 빼야했던 날에 맞춰 급하게 출국하고 나서 벌써 1년이 지났다. 왜 나왔는지, 여기서 뭘 할 건지 뚜렷한 생각이 없었음에도, 그 때는 독일로 오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일종의 터널효과였는지도 모른다.(이 괜찮은 정신분석학 용어는 닥터 프로스트가 알려주었다) 아무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던 작년 여름, 독일(여)행은 언젠가부터 정답처럼 머릿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터널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쾰른에 도착한 첫날, 임시 숙소로 가는 우반(U-Bahn, Untergrund Bahn/Underground train의 약자라고 하니, 일종의 지하철인 셈이다) 안에서 독일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이번 여행 혹은 이주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정답인 듯 보였던 이 궤적은 탈출도, 엄청난 전환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이 쪽 어항에서 잠시 솟아올라 다른 쪽 어항으로 풍덩 빠져들어 간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고('부담스러운 비유를 쓰다니 새벽에 글을 써서 그렇군',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이미지는 우반 안에서 떠올랐던 것이 맞다), 서울에서 견뎌야 했던 막막한 일상만큼이나 지루한 일상과 숨막히는 불안이 여기에도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생각과 다른, 반전의 연속이었다. 영상과 관련된 일을 배우면서 재미있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영상 일을 찾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인간이었고, 독일 역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안정되어 있는 만큼 불안이 크고, (기반 없는) 외국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곳이었다. 언어와 경력,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모든 것이 "0"인 상황에서 하고 싶은 일을 구체화하고, 이뤄내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서울에서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과정을 견뎌내는 중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없는 독일 TV의 (자막) 방송과, 지구본에서 찾아본 적도 없는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왠지 모르게 눈을 떼기 어려운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와, 담당 공무원 마음대로 기간이 정해지다 보니 세 번이나 연장해야 했던 비자와, 잠시 한국에 다녀온 듯한 느낌을 주는 아시아 마트의 한국 라면 덕분에 이 곳에서의 1년을 버텨냈지만, 이 곳의 공기는 여전히 낯설고 여기서 무얼 할 수 있을지, 언제쯤 돌아가게 될 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1년은 독일 사회를 읽어내기에는 터무니 없이 짧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읽어내지 못한 채 돌아가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다만 지난 1년 간 알게 된 것은, 탈출구는 없다는 것. 어디에나 골치 아픈 문제는 상존하고, 늘 살아왔던 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 어디에도 낙원은 없지만, 어딘가에서는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 


 새벽 두 시. 이제는 진짜 자야한다. 건물 밖에 서서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어쨌든 임시비자를 무사히 받을 수 있길.



덧 1. 보고 싶은 액트 편집위원님들, 3개월 후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담아 미,디어를 끄적거려보았습니다 - 청탁 기술이 여전하신 것을 보고 조금은 마음이 놓였습니다 - 액트는 제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 어떤 식으로든 연을 이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덧 2. 운동화 안에 핫팩을 붙이고 외국인청 앞에서 네 시간 40분을 기다린 후 번호표를 받고,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려 임시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임시"이기 때문에 2개월 후에 다시 외국인청에 가야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한동안은 안심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