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독립 미디어 세미나 2024.09.13.]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서의 공정이용(Fair Use)
: 저작권과 표현의 자유 사이의 균형 찾기
김보람
올해 초, 국내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을 대상으로 저작권 자료 공정이용(Fair Use)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정이용(Fair Use)은 국내에선 아직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제작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영화에 사용하는 자료의 저작권에 대해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해외에서 이 문제를 제작자와 전문가 집단의 협의로 해결해 나간 사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 네트워크가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을 상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2005년 미국의 미디어 및 사회적 영향력 센터(CMSI)에서 발표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들의 공정이용 모범 사례 선언문(Documentary Filmmaker’s Statement of Best Practices in Fair Use)’의 배경과 내용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진행되어 온 공정이용 관련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과도한 저작권 보호가 창작의 걸림돌이 될 때
다큐 제작을 하면서 주변의 창작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료 저작권에 대한 고민을 종종 듣곤 했다. 출연진이 나온 해외 뉴스의 클립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해당 방송사에서 20초에 750여만 원을 요구했다는 이야기,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영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저작권을 해결하지 못해 개봉을 포기했다는 이야기 등 주로 막대한 저작권료와 복잡한 절차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입장에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에 꼭 필요한 자료의 비용이 가용 예산의 범위를 넘어선다면? 저작권자의 허가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저작권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2005년 미국에선 조금 다른 관점의 문제의식이 제기됐다. 지나치게 엄격한 저작권 보호는 저작권 독점으로 이어지고, 창작자들의 작품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그 결과 피해를 보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야 하는 대중들이기도 하다.
문제의식의 배경에는 PBS의 다큐 시리즈 <Eyes on the Prize(1986)>의 사례*가 있다. 이 작품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민권 운동의 역사를 14시간의 방대한 분량에 담아낸 다큐멘터리로, 사회적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영상에 사용된 수많은 아카이브 자료의 라이선스 기한이 만료된 뒤, 갱신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유통이 중지됐다. 당시, 이 상황을 두고 저작권 이슈 때문에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자료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이 일었다. 2005년 제기된 미국의 공정이용 논의는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참고기사(클릭): “저작권 이슈에 방영 막힌 수상작 민권 다큐멘터리 <Eyes on the Prize>”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공정이용(Fair Use) 모범사례 선언문
2005년 11월 18일 미국의 미디어 및 사회적 영향력 센터(CMSI: Center for Media & Social Impact)는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공정이용 모범 사례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현업에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저작권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것이다.
이 글은 지난 10년간 저작권을 준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엄격해지며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창작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공정이용(Fair Use)은 저작권법의 중심에 있는 사회적 합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며, “새로운 문화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창작자들이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활용해 새로운 영화를 만들 때 그 자료를 사용할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교육, 비평 등의 영역에서 활용되어 왔던 공정이용을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이용(Fair Use)은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저작권자의 이용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한 권리를 뜻한다.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하는 저작권법 안에서 일정 부분 예외를 허용하는 것이다.
단, 공정이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뒤따른다. 영화에 어떤 자료를 사용할 때 원자료가 사용된 맥락과 다른 새로운 목적으로, 적절한 범위와 분량 안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료를 사용하는 것이 원본의 시장 가치를 훼손하고, 저작권자에게 과도한 경제적 피해를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다.
선언문에 따르면, 다큐멘터리 영화는 위의 두 질문이 함의하고 있는 ‘변형적 이용’의 조건을 쉽게 충족한다.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삽입되는 자료는 원자료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고, 발췌된 일부분만을 인용하기 때문에 시장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공정이용은 저작권법 내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표현한다.
이 선언문은 이 중요한 법적 원칙을 명확히 하고,
영화 제작자가 이것을 자신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선언문을 통해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 중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사용하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유형 네 가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각각의 경우 어떻게 공정이용이 성립하는지, 성립 여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제한 조건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첫째, 저작권 자료를 사회·정치·문화적 비평의 대상으로 활용하는 경우
: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영화 안에서 어떤 작품을 비평하기 위해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등의 자료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논평과 패러디는 모두 비평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공정이용의 권리 행사다. 단, 삽입한 자료가 원래의 목적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비평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작품 자체로 관람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작품 속 주장이나 관점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대중문화 자료를 인용하는 경우
: (직접적인 비평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영화의 관점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드라마, 영화 등 기존 대중문화 콘텐츠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시대상을 담아내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작품 안에 인용하는 것은 인쇄 매체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며, 다큐멘터리 제작에서도 공정이용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 경우 가능한 적절한 범위 내에서, 다양한 출처로부터 가져온 자료를 사용해야 하며, 자료의 출처를 화면이나 크레딧을 통해 적절하게 표기해야 한다.
셋째, 촬영을 할 때 TV나 라디오 등에서 나오는 미디어가 함께 포착된 경우
: 벽에 걸린 포스터의 이미지, 라디오에서 재생되는 음악, TV에서 나오고 있는 프로그램 등 일상 촬영에서 우연히 포착되는 미디어들이 있다. 이것은 일상을 기록할 때 피할 수 없는 부분으로, 예상치 않게 포착된 사운드나 이미지들은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영화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단, 화면 안에 포착된 자료가 따로 연출되거나, 자료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넷째, 역사물에서 아카이브 자료의 사용
: 대부분의 아카이브 자료들은 라이선스에 따라 합리적인 조건으로 제공되는데, 때로 그 시스템이 무너질 때가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매체의 사회적, 교육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 경우 공정이용이 적용되어야 한다. 공정이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특정 자료에만 의지해 설계되어서는 안 되고, 자료의 출처가 적절히 명시되어야 한다.
위에 요약한 내용들은 선언문에 언급된 내용 중 일부 가이드라인으로, 실제 영화 제작 현장에서는 위의 네 가지 경우가 혼재된 경우, 그밖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선언문에서는 윗글에 포함된 공정성, 적절성, 합리성 등의 기본 가치를 지침으로 삼아 공정이용의 성립 여부를 판단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공정이용 모범 사례 선언문’이 가져온 변화
‘공정이용 모범 사례 선언문’ 발표 후 미국 다큐멘터리 제작 환경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미디어 및 사회적 영향력 센터(CMSI) 홈페이지에 올라온 자료들을 통해 그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저작권 문제로 대중에게 공개되거나 완성되지 못했던 영화들이 출시되었고, 제작자들은 불필요한 라이선스 비용 수백만 달러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 내 공영방송에서 공정이용을 사업 관행으로 채택하고, 미국의 4곳 보험사에서 공정이용 청구에 대한 오류 및 누락 보험에 대해 수락하는 등 전방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CMSI의 설립자이자 공정이용 연구를 이끈 패트리샤 아우프더하이드 교수의 저서 『Reclaiming Fair Use : How to Put Balance Back in Copyright(2015)』에는 ‘공정이용 모범사례 선언문’이 지난 10년간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어 왔는지 다양한 사례와 함께 나타나 있다.
영국의 사례
공정이용에 대한 논의가 미국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지난 2021년 영국 DFC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 <Making it Real>(참고기사: 영국 다큐멘터리의 미래를 함께 만들자!(클릭 시 이동)) 에서도 공정이용과 관련된 언급이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스크린 헤리티지(Screen Heritage)’라는 개념으로 아카이브 자료로의 접근 문제를 다루고 있다. 스크린 헤리티지에 접근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 미학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언급하며 크게 4가지 항목을 들어 아카이브 자료에 공정하게 접근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해 실천 강령을 개발하는 방식은 미국의 ‘공정이용 모범사례 선언문’ 개발 방식과도 유사하다. ‘스크린 헤리티지’라는 용어에서 느낄 수 있듯 아카이브 자료를 문화 자산으로 인식하고 다양한 배경의 제작자들이 공평하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제작 환경에 맞춘 공정이용 가이드라인은 무엇일까
발제를 위해 공정이용(Fair Use) 자료를 정리하면서 처음엔 그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의 관행대로 이용 허가를 받고 저작권료를 내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공정이용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해외의 사례들을 살펴보며 제작자들의 네트워크가 전문가 집단과 협의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 네트워크가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을 상상해 보게 되었다.
공정이용은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현장의 논의가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계속 변화해 가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한국의 제작 상황에 맞는 공정이용의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다면 창작자들이 더 이상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을까.
반가운 소식은 현재 한국에서 공정 이용(Fair Use)에 관한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가깝게는 오는 9월 28일(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제작과 공정이용’에 관한 포럼이 열린다고 하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면 좋겠다. 제작 환경의 변화에 맞춰 앞으로 필요한 제도와 방향을 점검해 보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제작자들이 시도해 볼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장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
참고자료
글쓴이. 김보람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 불안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독립 미디어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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