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독립 다큐멘터리 네트워크가 출범했다. DISCO라는 이름의 이 조직은 전 세계 40개국에서 모인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이다. 작년에 설립되어 각종 영화제에서 꾸준히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서 활동을 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DISCO 네트워크와 주요 활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탈중심화된 독립적 이야기-문화 조직자들 (Decentralised Independent Story and Culture Organizers)이라는 뜻의 약자로 이루어진 DISCO는 이름만 들었을 때는 언뜻 성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홈페이지에 있는 정의를 살펴보면 명확히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네트워크임을 밝히고 있다.
“DISCO는 현장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고 조정하며 문화, 사회 및 민주주의에 대한 독립 다큐멘터리의 특수한 중요성을 옹호하기 위해 함께 모인 글로벌 문화 및 다큐멘터리 조직의 네트워크입니다.
Ambulante, AFLAMUNA, DocsMX, Doc Society, DocSP, Docubox, In-Docs 등 다양한 다큐멘터리 지원 기구가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지난 해에만 이 네트워크는 콜롬비아, 영국, 미국, 호주, 네덜란드, 브라질, 우루과이, 케냐, 인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파키스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코스타를 포함한 40개 이상의 국가에서 활동했습니다. 리카, 쿠바, 에콰도르, 과테말라, 멕시코, 파라과이, 파나마, 페루,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우간다, 탄자니아, 르완다,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팔레스타인, 예멘,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수단, 남수단, 에티오피아, 코모로스 제도, 시에라리온 및 남아프리카. DISCO 전반에 걸쳐 우리는 자금 조달, 영화제 및 영화 마켓 개최, 각 지역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매년 2000명 이상의 독립 영화 제작자를 직접 지원하고 있습니다.”
- DISCO 홈페이지(https://thedisconetwork.com) 에서 발췌
홈페이지에 정리된 네트워크의 주요 활동 계획은 아래와 같다.
1. 다큐멘터리 제작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새로운 모델
2. 다큐멘터리 유통의 혁신
3. 다큐멘터리를 위한 탈식민지적 자금 조달
4. 다큐멘터리 독립성의 정의
5. 다큐멘터리 제작자를 위한 안전과 보안
작년에 처음 생긴 네트워크라서 아직 활동이 많지는 않다. 이 중 현재 확인할 수 있는 활동은 ‘4. 다큐멘터리 독립성의 정의’에 대한 것이다. ‘독립성 프로젝트 INDEPENDENCE PROJECT’라고 이름 붙인 이 프로젝트에서는 34개국 이상에서 온 51명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들을 인터뷰하고 책자를 발간했다. 인터뷰 질문은 단 한 가지이다.
“독립 다큐멘터리는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왜 중요한가요?”
34개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한다. 왜 첫 번째 질문이 독립 다큐멘터리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질문일까. 이에 대한 DISCO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전 세계의 독립 다큐멘터리 단체들이 문화,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독립 다큐멘터리의 중요성을 옹호하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공간은 누군가가 피해를 알기도 전에 사라질 것입니다. 성공한다면 결속력을 강화하고 동맹 관계를 강화하며 새로운 파트너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립 프로젝트의 목적은 모든 지역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들 사이에서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공익 미디어가 시장 세력, 거대 기술, 정치적 압력 등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는 시대에 우리는 조직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 실천과 그것이 중요한 이유를 명명하고 설명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함께 이 분야에 필요한 자원과 플랫폼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국가의 시민들이 이 중요한 장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인프라를 상상하고 설계해야합니다.
우리는 시장과 국가 권력 모두로부터의 '독립성'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숨쉬는 공기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작고 빛나는 세상 외부의 많은 사람들도 이를 이해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아마 우리의 잘못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립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상영될 수 있는 공간을 옹호하기 위한 동맹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작품을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 분야 밖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습니다.”
즉, 세계적으로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 및 상영이 위축되고 있고,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스스로 연대해서 독립 다큐멘터리의 중요성을 옹호하고 설득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다큐멘터리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지금처럼 다큐멘터리가 세계적으로 호황인 시기도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넷플릭스를 비롯한 전세계 각국의 OTT 플랫폼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주요한 콘텐츠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가 상대적으로 극영화보다 저렴한 제작비에 대비해서 많은 시청자 수를 창출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DISCO의 제안자들은 이런 현상이 다큐멘터리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플랫폼들이 범죄, 스포츠, 유명인이 나오는 이야기를 위주로 제작하면서, 시장 주도적인 시스템을 통해 결국 가장 광범위한 관객에게 도달하는 영화만을 지원하여 경계에 있는 영화를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다큐멘터리의 ‘황금기’가 아닌 ‘기업기’이다." 즉 이러한 현상을 황금기로 지칭하는 것은 "많은 플랫폼들이 창의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콘텐츠를 줄이고 있는 동시에, 여러 국가에서 정부의 검열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DISCO에서 발간한 ‘독립성 프로젝트 INDEPENDENCE PROJECT’를 살펴보자. 이 자료집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독립 다큐멘터리는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왜 중요한가요?”라는 하나의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답변을 담고 있다. 아쉬운 점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제작자의 답변이 있는데, 제작자에 대한 정보 없이 답변만 수록 되어있어서 제작자의 이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국적)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이런 답변이 나왔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다양한 국가의 정치적 검열 및 규제 수준, 제작 지원의 형태 및 정도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독립 다큐멘터리의 제작, 자금조달, 상영방식 등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몇 가지 주요한 답변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은 상업적이든 비상업적이든 상관없이 저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촬영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이나 편집 과정에서도 각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놀라운 세계관은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 정세를 고려할 때 다큐멘터리의 역할이 특히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대화가 필수적이며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를 촉진한다고 믿습니다. 완성된 영화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 아리아 로테 (책 11쪽)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영화감독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이 서랍 저 서랍을 열고,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자신이 원하는 배급사를 통해, 자신이 만들고 싶은 사람과 함께 원하는 곳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 Michel K. Zongo (책 19쪽)
“시간 문제는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최악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때로는 편집 과정도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편집 과정에서 많은 것이 결정됩니다. 1년 안에 제작을 강요하는 펀드들은 당신을 독립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회색 영역에 놓이게 하거나, 창작의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시간 제한을 설정하면 촬영 중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윤리적 과정 자체가 손상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체 과정을 서둘러야 하고 때로는 과정이 단순하게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우 배급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넷플릭스에 작품을 팔고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하면 무슨 독립성이 있겠습니까? 넷플릭스에 작품을 팔면 더 이상 직접 상영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넷플릭스가 작품을 삭제한다면 그게 끝입니다. 다큐멘터리는 독립적인데 배급도 독립적이었나요? 고민이 필요합니다.”
- 아나이스 타라세나 (책 44쪽)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은 내가 만드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작품 안에서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마치 내가 그들의 대의명분을 옹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대변인입니다. 나는 ‘아무도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불의가 만연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자원의 분배가 열악하고, 개인의 자유가 보편적이지 않다면, 내 영화가 이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이유입니다. 나에게 영화는 전 세계에 보내는 편지와 같습니다. 그 편지는 세상에 나가서 내가 말하는 것, 내가 옹호하는 가치와 원칙, 내가 관찰하는 것, 나의 관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람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전 세계가 투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영화가 이것을 보여주고, 이 세계적인 투쟁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 Michel K. Zongo (책 65쪽)
“인도 다큐멘터리는 지난 몇 년간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고 찬사를 받는 등 정말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OTT 플랫폼을 통해 다큐멘터리 시청자층이 더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OTT 플랫폼을 위해 제작되는 다큐멘터리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제한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실제 범죄나 유명인사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흥미진진하고 긴장감을 조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에는 종종 창의적인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독립적인 제작자 중심의 다큐멘터리가 있고, 다른 쪽에는 대다수가 소비하는 OTT 플랫폼 위한 다큐 시리즈가 있습니다. 둘 다 중요하고 나름대로 옳지만, 가장 큰 문제는 현재 이 두 다큐멘터리 영화 세계 사이에 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 아리아 로테 (책 78쪽)
"소위 '작은 나라'에 대한 차별도 있지만, 우리 사이에는 연대도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울 만큼 용감하고 영감을 주는 수많은 사람들을 업계에서 알게 된 것은 행운이며, 이는 나에게 큰 동기를 부여합니다.
저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영화계에서 일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되고 남편에게 봉사할 운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성이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모범을 통해 보여주도록 영감을 받았습니다. 한 여성이 같은 지역 사회의 다른 여성이 자신의 꿈을 쫓아 성공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꿈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앙아시아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지식을 공유하고 중앙아시아 인재들을 네트워크와 연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술과 교육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타지키스탄의 영화 산업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재능을 지원하고, 내가 가진 네트워크와 연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큰 꿈은 언젠가 타지키스탄 산맥에 영화 학교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젊은 인재들이 실제 기술을 배우고 연습하며 창의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를 개발하고 서로 지원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곳입니다. 전형적인 영화학교가 아닌 창의적인 전사들을 위한 학교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제 이야기가 전해지면 제 지역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비전은 저에게 정말 영감을 주며,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 아니사 사비리 (책 92쪽)
앞서 DISCO 네트워크와 출범한 목적과 배경, 그리고 각국 제작자의 독립 다큐멘터리에 대한 생각을 살펴봤다. 국가 차원의 정치적 규제와 폭력, 경제적인 상황 등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 한국의 제작자들도 많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 상황은 어떤가.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해 나은 부분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다. 팬덤 정치를 기반으로 한 극장 개봉용 다큐멘터리, 범죄, 사이비 종교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OTT용 다큐멘터리 외 다른 다양한 다큐멘터리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실패의 만성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독립 다큐멘터리의 생태계에 대한 개선 의지를 포기해버린 건 아닌가. DISCO 네트워크의 출범 취지처럼 우리 스스로 독립다큐멘터리를 옹호하고 이의 중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많은 노력을 해야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아직 DISCO 네트워크에 한국 제작자의 참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국내외 좀 더 많은 연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
참고자료
글쓴이. 김주현
2013년부터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약 10년 간 공동체미디어를 지원하는 일을 하다가 현재는 영화미디어교육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독립 다큐멘터리의 좋은 관객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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