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을 전후하여 많은 수의 조선인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들은 일부 지식인층과 더불어 유학생, 노동자 등의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적, 물적 자원을 일제에 총동원했던 일제 말기에는 노무동원, 군인동원, 위안부동원 등의 형태로 다수의 조선인들이 일제의 전시 체제 아래 강제 동원되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한반도로 돌아오게 되지만 일부는 정치 경제적 상황으로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 사회는 고국귀환과 민족통일 등을 목표로 삼으며 여러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재일조선인 사회는 남북의 정치적 영향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남북 대립의 한가운데 서야만 했다. 식민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재일조선인의 목소리는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열화 되어감에도 굳건히 존재하고 있는 필름의 물질성과 닮아있다.
재일조선인 2세 박수남과 그의 딸 박마의가 작업한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오랜 시간 박수남이 촬영했던 필름들을 디지털 복원하며, 근현대 동아시아 역사를 거쳐 온 조선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강제동원, 원폭, 위안부 피해자 등의 역사를 취재하며, 재일조선인의 저항과 투쟁을 줄곧 카메라로 찍어온 박수남.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1963년 ‘코마츠카와 사건’(*주1)의 사형수 재일조선인 2세 이진우의 구명운동에 참여한 후 본격적인 재일조선인 운동을 시작했다. 작가로 활동하며 펜을 통한 역사 기록을 해오던 박수남은 재일조선인 피해자들의 침묵과 그들의 ‘떨리는 말, 떨리는 몸’ 자체를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들어 영상을 제작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과거 촬영했던 필름의 복원에 관한 작품이다. 박수남과 박마의가 필름 복원을 결심하고 그것을 디지털 복원하여, 각기 다른 시공간을 현재로 끌고 오는 행위는 그들의 역량이자 영화가 가진 힘이다. 영화가 그 힘을 드러내는 방식은 조선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서술하는 것도, 그렇다고 제국/신민, 여성/남성 등의 대항 구도로 그들의 이야기를 포섭하는 방식도 아니다. 과거 필름 영상 속 조선인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신체를 통해 발화되어 새로운 역사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원폭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의 대화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이며 규정할 수 없는 어떠한 언어로 나타난다. 또 침묵과 같은 언어화될 수 없는 행위는 매끄러운 대화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직 신체에 기입된 그들의 역사와 감각만이 필름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과거 조선인 피해자들의 역사와 감각은 이를 기록한 박수남과도 무관하지 않다.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재일조선인 문제에 앞장섰던 그이지만 그의 정체성은 스스로도 확신하기 어렵다. 더욱이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그는 과거 필름 영상을 피해자들의 대화를 통해 읽어낸다. 하지만 흐릿해져가는 그의 시력과는 달리 영화 속 박수남의 태도와 말은 선명하고, 분명하다.
영화 초반 박수남과 박마의가 의견 차이를 보인 대화에서 박수남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데? (...) 더 친절하게? 그럴거면 내가 만드는 의미가 없어. (...) 역사의 사실을 사실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험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야.” 그의 말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다. 그는 필름을 복원하여 영화로 만드는 과정이 단순히 복원된 영상을 과거의 것으로 설명하거나 박제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재일조선인 피해자들의 역사와 감각은 과거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도리어 그것이 얼마나 시급한 현재의 문제인지를 상기시킨다.
일제에 의해 미쓰비시 조선소에 징용되었던 김성수는 수송선과 항공모함을 제작하던 중 원폭을 맞은 원폭 피해생존자이다. 2015년 미쓰비시 징용 피해자 김성수를 비롯한 세 명이 피폭자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했으나 나가사키 시는 ‘기록이 없다’며 각하하자 이들은 소송을 제기했다. 이 때 김성수의 증언이 결정적이었고, 결국 ‘징용공 재판’으로 승소하여 이들에게 피폭자건강수첩이 교부된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을 누구보다 또렷이 갖고 있던 김성수는 끝내 2022년 세상을 떠났다. 박수남과 박마의의 필름 속 영상은 시공간을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하며 그렇게 소환된 과거의 필름은 현재의 경험과 만나 말 그대로 되살아나는 역사가 된다.
영화에서는 줄곧 모녀의 대화가 필름 영상 사이를 분주하게 가로지른다. 그들의 대화는 사적이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과 역사를 되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의 2세대와 3세대의 역사관,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박마의는 그녀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한다. 박수남이 그러했듯 박마의의 삶 역시 재일조선인과 그 개인의 역사가 뒤엉켜 있는 사물, 즉 필름과 끊임없이 접촉한다.
영화의 마지막 촬영은 100년 만에 발굴된 조선인 학살 그림에 대한 것이다. 관동대진재 100주기가 되는 해에 발굴된 조선인 학살 그림은 여전히 남아 있는 전쟁과 차별, 혐오범죄 등에 대해 일갈한다.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인상에 남는 것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박수남의 말은 말해지지 않았거나 혹은 말할 수 없었던 그간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그 이야기는 박수남과 그리고 필름에 의해 되살아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영상은 보이지 않더라도 현장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저는 발군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주
1) 1958년 8월 도쿄에 위치한 코마츠카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한 여학생이 살해당한 사건. 사건의 행방을 찾던 중 요미우리 신문사에 한 남성이 전화를 걸어 범행을 자백한다. 이 때 남성은 또 다른 살인사건의 범행마저 자수하면서, 두 개의 범죄에 대해 판결 받는다. 이 남성은 코마츠카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18세의 재일조선인 이진우였다. 이진우의 범행에 대한 의문과 재판과정에서의 문제는 계속 제기되었지만 도쿄지방법원은 결국 이진우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글쓴이. 김명우 (한상언영화연구소 연구원)
한국의 영화운동에 관심을 두고 영화사를 조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1980-90년대 영화운동과 독립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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