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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쓴 시네필리아와 해적의 역량 - 영화 <킴스 비디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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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10. 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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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7호 리뷰 2023.11.08.]

 

가면 쓴 시네필리아와 해적의 역량

- 영화 <킴스 비디오> 리뷰

 

산하

 

나는 물론 해적질을 해본 적이 있고, 그렇기에 법이 수호하고 있는 제도 바깥에서 각종 파일을 ‘불법적으로’ 다운로드하고 이용하는 일련의 행위가 어떤 커뮤니티를 구조화하고 어떤 건축물을 인터넷상에서 쌓아 올리는지 알고 있다. 혹은 그것들이 얼마나 전능한 속도로 철거되는지, 또 철거 뒤에 어떤 자재들과 성배들이 어떤 전설과 구담 속으로 사라지는지에 대해서도 체감하고 있다. 무엇보다 해적들이 지나쳐 왔던 해로를 함께 종횡무진 순행하는 것이 어찌나 달콤한 일인지 또한 부족함 없이 알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해적질을 둘러싼 비판이 얼마나 허다한 허구로 들끓고 있는지, 혹은 정합된 정의를 내세우는 법제가 때론 위법을 옹호하고 적법을 배제하는 식으로 얼마나 자주 자가당착에 빠지는지 일일이 지적할 생각은 없다. 전자에 대해선 《마테리알》에 수차례 연재된 한민수의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을 읽어보면 족할 터이고, 후자에 대해선 지지부진한 조문과 판례 간의 불일치를 강학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나는 블랙홀 없는 세계, (법이 수호하고 있다고 알려진) 공정한 분배, 위법과 적법 사이 명확한 경계, 제도의 신비화된 초상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는 해적질의 정신을 믿는 편이고, 이 글도 그곳에서 시작해 보려 한다.

 

<킴스 비디오>를 관람하기도 전에 해당 영화에 관한 글 청탁을 덜컥 수락했던 이유 또한 별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해적질로 끌어모았던 전리품과 그것으로 인해 형성된 나의 영화문화 경험, 그리고 이를 <킴스 비디오>와 적절히 엮어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전술하기도 했던, 저 유명한 한민수의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을 나의 방식대로 둘러보거나 전설의 인물(당연히 김용만 씨를 가리킨다)을 지침 삼아 지금 이곳의 전망과 가능성 따위를 내다보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정작 <킴스 비디오>를 보고 나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영화가 생각보다 평범했던 탓도 있지만, 이 영화가 제도의 금기에 대항하여 새로운 토템을 세워 올리는 해적의 정신을 내뿜고 있기는커녕 1980년대 시네필 문화를 그리워하며 여하간 헛물을 들이키는 영화라는 인상이 날 덮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가 하나의 추리극 형식을 띠게 되는 중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는 해적질에 관한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해적질을 하고 난 뒤 그들에게 주어졌던 전리품과 노스텔지어, 또 이를 사수하겠다는 강박과 집착의 수순으로 넘어가는 듯 보인다. 이탈리아 마피아와 정치권 인사의 죽음, 미스터리에 대해 따져 묻는 감독의 취재는 우리에게 익숙한 몇몇 극영화의 문법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해적질과 제도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긴장과는 전연 관계없는 별개의 서스펜스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영화를 자기 삶과 끊임없이 빗대어 설명하는 시네필 감독의 눈에 이러한 독립된 서스펜스가 감지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이탈리아 살레미의 황톳빛 건물, 먼지 덮인 VHS DVD, 컨테이너와 쇳밥 앞에서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는 데이비드 감독은 킴스비디오 컬렉션을 추적하는 탐정극의 주인공으로 점차 얽혀 들어가면서 해적들이 울리곤 했던 혁명의 전언과는 점점 멀어진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따져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전언의 내용은 무엇이었고 또 <킴스 비디오>는 이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킴스 비디오>가 들어선 샛길을 들여다보기 전 해적질이 담고 있는 정신적 발로를 살피는 것은 꽤나 유용한 일일 테다.

 

해적질의 기원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나, 우리는 우선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써 다른 이들의 양분을 사정없이 먹어 치우는 섭취와 무수한 집적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브라질의 시인인 오스왈드 지 안드리지는 바로 브라질의 문화가 그러한 노선을 택해야 한다고, 혹은 그러함으로써 그간 생존해 왔다고 피력하면서 「식인종 선언」을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서 이 모더니스트가 강론해 마다않는 문화의 풍경은 타인의 것을 몸으로 직접 빨아들인 뒤 또 다른 섭식의 대상을 찾아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을 직접 감각한 뒤 또 다른 문화적 반응의 대상을 어김없이 찾아 나서는 해적 문화와 비슷한 자세를 공유하고 있다. 신의 말씀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포르투갈에서 온 주교를 먹어 치웠다는 브라질 민담과 몽테뉴의 「식인종에 대하여」,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 등을 매쉬업/리믹스한 이 선언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바라본 문화의 모습이 해당 문화의 데스마스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골자로 전개되다가 급기야는 법제, , 교리문답 등 고유하고도 절대적인 문화의 종착지를 모조리 벗어나고자 한다. 최종의 역사를 부정하고 앞으로 계속될 이야기만을 기대하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 하지 않기. 혹은 집이라는 개념 자체를 미심쩍게 바라보기. 시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언서를 이어 나간다.

 

 

▲<킴스 비디오> 스틸컷

 

 

해적들의 기획과 친연성을 맺고 있는 이 선언서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시인은 어떠한 문화적 자원도 그 문화의 내부로부터 태어났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정확한 시계열이나 한정된 뿌리, 즉 연대기적 강박과 정든 근원지에 대한 열망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고유한 집도 구획도 허용하지 않는 이 문화는 자신이 멋대로 빨아들인 외부의 먹이를 다른 구성원들에게 친히 나누어 줄 생각에 항상 부풀어 있을 뿐 자신을 자신이게끔 했던 요소들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브라질이 2000년대 초중반 카피레프트 성향의 문화 정책을 펼쳤던 것은 이러한 정신의 한 결과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킴스 비디오>로 돌아가 보자면, 이 영화는 이미 감독 내부의 경험을 나열하는 포트폴리오로 시작하고 있다. 링클레이터 영화 속 인물을 찾으러 직접 오스틴까지 여행한 기억, 침대에서 나와 <폴터가이스트>를 보던 기억 등의 사적인 경험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방황하지만 이내 곧 킴스비디오 대여점에서 고유한 집을 찾는다. "킴스비디오는 집을 줬다"는 발언 안에서 킴스비디오라는 장소는 감독의 개인생활사와 그에 엮인 영화 모두의 생명원이 된다. 때문에 대여점이 폐업하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소년처럼 컬렉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감독의 태도는 집과 물리적으로 떨어진 자가 앓고 있는 유기공포처럼 보인다. 이는 대사관을 오가며 복사해 왔던 영화 해적판을 FBI가 수거해가자 일주일 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새로운 해적판으로 매대를 채워놓곤 했다는 김용만 씨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김용만 씨의 이러한 '아무렇지도 않'은 배출과 소화의 태도야말로 <킴스 비디오> 영화와 비교할 만한 해적의 정신, 즉 「식인종 선언」의 그것일 테다.

 

이탈리아로 넘어간 킴스비디오 컬렉션을 되찾기 위해 세계의 이곳저곳을 오갈 때에도 감독은 영화가 유령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드문드문 고백하면서 사적인 기억과 영화 사이의 영매적 관계를 엮어나간다. 컬렉션에 대한 마음이 집착으로 변모되었다고 실토하는 장면이 있고 나서 <비디오드롬>을 빌려 "내가 영화 소장품"이라 나레이션을 삽입하는 장면은, 이미 생애주기가 종결된 자와 기어이 결합한 시네필리아의 감탄 섞인 성사와 다를 바 없다. 그 밖에도 "영화가 날 불렀다", "영화가 집에 가고 싶다고 소리쳤"다는 증언은 영화 감독의 말이라기보단 죽은 혼령과 의사를 주고받는 자의 말처럼 들리고 마는데, 이쯤 되면 영화라는 대상은 대상(object)의 말뜻대로 서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자리에 던져진(ob-jectum)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으로 떠올려지거나 과거의 영역으로 굴러떨어진 그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킴스 비디오>는 해적의 역량, 김용만 씨의 역량, 킴스비디오의 역량, 영화 그 자체의 역량을 묘사하길 어느 순간 잊은 채 퍼즐을 맞출 생각, 집으로 돌아갈 생각, 유령과 동행할 생각으로 사육제를 맞는다.

 

 

▲<킴스 비디오> 스틸컷

 

 

실제로 <킴스 비디오>는 김용만 씨가 어떻게 몰래 직원들을 활용하여 영화제의 스크리너를 확보했고 어떤 장소들에서 부틀렉을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입을 닫는다. 킴스비디오의 생명원은 바로 그러한 해적질을 통해서 확보된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보단 오락실로 변해 버린 대여점, 김용만 씨의 뒷모습, 결정적으로는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를 차례차례 몽타주하면서 자율적인 회고만으로도 충분히 이 모든 여정이 마무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타율성을 배제하고선 그 어떤 자율도 상상할 수 없듯이 <킴스 비디오>가 배제한 해적질의 과정 없인 망령의 얼굴을 띤 자경단의 가면도 뒤집어쓸 수 없다.□

 

 


글쓴이. 산하

주로 영상비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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