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열었어, 들어와 커피 한잔해.'
최종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오류시장>은 굳게 닫힌 셔터 문을 올리며 새벽을 여는 남자의 따스한 인사로 시작한다. 영화는 정비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부동산 개발 회사의 횡포와 지자체의 무관심 속에 분투하는 전통시장의 10년 역사를 2대째 한자리를 지켜온 성원 떡집 내외를 중심으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했던 호시절은 사라지고 수도관이 터져 곳곳이 물난리에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시장을 밝히기 위해 이곳저곳에 거울을 갖다 놓아야만 하는 현실. 그럼에도 부부는 매일 아침 시장 골목을 살뜰히 청소하고 손님을 맞는다. 새벽부터 시작하는 고된 일이지만 수십 년째 가게를 찾아주는 단골들이 있어 힘을 내고 위로받는다.
개발업자의 횡포에 시장을 떠나는 사람들
1968년에 만들어져 서울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전통시장이었던 오류시장의 수난은 2005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재개발 사업 책임자가 시장 상인들 명의로 불법대출을 받아 많은 점포들이 허망하게 넘어갔고 이후 경매에 부쳐진 오류시장 지분을 사들인 부동산 개발회사 '신산 디앤아이'는 남아있는 상인들을 상대로 명도소송을 건다. 2011년 겨울, 재판에서 승소한 회사는 용역을 고용해 점포를 부수며 떠나라 협박했고 공권력도 상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갖은 협박에 시달리던 대다수의 상인들이 시장을 떠났고 이 과정에서 200여 개의 점포가 16개로 줄어들었다. 2016년, 한동안 잠잠했던 오류시장은 신산 디앤아이가 서울시에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개발계획을 제출하면서 다시 한번 몸살을 앓게 된다.
상인들의 곁을 지키는 카메라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지옥같은 하루'였던 나날들. 2005년 재개발 움직임이 시작된 이래 성원 떡집 사장님이 틈틈이 기록해둔 일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때 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류시장에 손님이 넘쳐나던 시절, 점포 문을 닫고 다 함께 놀러 가서 밥도 해먹고 장기자랑도 했지만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 상인들의 기억에만 의존해 꺼내 보는 추억이다. 그러나 2016년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상인들 곁에 최종호 감독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기록을 시작하면서 상인들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입주자 대표회의, 구청장과의 만남, 서울시청 1인 시위 현장 등 상인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어디든 카메라가 함께 했다. 조합설립 총회가 있던 날,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카메라가 밀쳐지지만 난감해하는 최종호 감독 대신 맞서는 상인들의 새된 고함이 오히려 감독의 기운을 북돋는다. 한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진 까닭은 충실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생생한 현장성 때문이다.
행복했던 추억을 되살리는 금요일 오후 2시
상인들의 고단한 새벽, 투쟁의 현장에 카메라가 함께 했다면 오류시장의 황금기 이야기는 마을라디오가 듣는다. <금요일 2시엔 오류시장>은 마을방송국 구로FM의 보이는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성원 떡집 사장님과 최종호 감독이 메인 DJ가 되어 시장 한가운데에 믹서를 두고 진행했다. 상인들이 풀어놓는 잘나가던 시절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다 같이 소풍 갔던 이야기, 단골손님이 들려주는 이 집만의 자랑, 53년이나 그릇 가게를 운영했다는 사장님이 지난 시절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얼굴에도 자부심이 가득했다. 신청곡을 함께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아마 상인들에게는 유일한 휴식이었을 것이다.
상인들의 승리, 그 후
2018년, 결국 부동산 개발회사의 무리한 지분 쪼개기가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한 행정법원은 오류시장 정비사업 무효소송에서 상인들의 손을 들어준다. 가슴을 졸이며 소식을 기다리던 남편에게 승소 사실을 알리던 서효숙 사장의 모습에 나 역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영화 초반에는 마이크 들고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수줍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가 어느새 시청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직원들의 만류에 고함을 치는 투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빼곡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세상을 바꾸려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상업영화였다면 아마 승소한 상인들이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시장이 다시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장면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다큐를 보고 난 뒤 포털사이트에 '오류시장'을 검색했다. 가장 먼저 뜨는 기사는 2023년 8월 2일 자 '구로구 오류시장, 55년 만에 역사 속으로...최고 26층 주상복합으로 재정비'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 그토록 바라던 엔딩은 현실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기록은 힘이 있다는 것. 공임비 5만 원을 3만 5천 원으로 깎아달라던 손님은, 크게 앓고 난 떡집 사장님에게 '건강하시오, 그래야 떡도 해가고 그러지' 무심한 위로를 건넨다. 코 끝이 시큰해지는 장면이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시장 골목에 꽃을 심고 매일 물을 주는 사장님, 오류시장이 처한 상황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응원하는 인근 남구로 시장의 상인들, 개발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장면들이 관객에게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그리고 최종호 감독이 어떤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상인들 곁을 지켰는지 알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면서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이 투쟁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부동산 투기꾼으로 돌변한 수협에 맞서 상인들이 지난한 싸움을 이어갈 때 동작FM의 마이크도 그들 앞에 켜져 있었다. 그것이 마을미디어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주류 매체들은 시장에 남아있는 상인들을 개발을 저해하며 더 큰 보상금을 바라는 이들로 몰아가기 일쑤다. 아마 나도 마을방송국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상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현실은 여전히 내 마음 같지 않지만, <오류시장>을 보면서 이 일을 계속해도 되겠다는 희망도 보았다. 재개발이 시작된 이곳에 아직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신청곡과 사연을 들려줄 할머니들도.□
글쓴이. 박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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