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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감춰졌을까: <유령>, <밀수> 그리고 <여공의 밤>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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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10. 1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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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7호 Me,Dear 2023.11.08.]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감춰졌을까

: <유령>, <밀수> 그리고 <여공의 밤>을 보고

 

재연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여공의 밤>은 시미즈 히로시의 <경성>의 푸티지를 인용한다. 식민지기 일본의 침략 하에 근대화된 조선의 풍경을 담은 이 영화는, 근대화된 시각성이라는 권력의 문제를 상기하게 한다. 주은우가 논문 식민지도시와 근대성의 영화적 재현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제국주의 일본의 시선에서 포획된 <경성>은 근대화된 경성의 풍경을 외피로 하여 식민화를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가시화하고 있다. 멋들어진 경성의 풍경 이면에는 식민지의 비극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응시와 대상이란 이분법적 위계 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시적 열정』 등의 논의에서 레이 초우가 말하듯 피대상과 동일시될 관람자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일 것이다. 즉 피식민자 관객이 관람하는 것은 근대의 시각성에서 응시의 대상이 된 식민지 조선의 상황, 즉 풍경보다, 그 대상이 된 조선의 피식민자가 영화를 보는 관람성, 그것의 스펙터클이다.

 

그러므로 <여공의 밤><경성>에서 목격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대상화된, 경성 거리를 걸어 다니는 여성의 얼굴이 아니라 대상화되지 못한, 찍히지 못한 여성들의 얼굴과 표정이다. <여공의 밤>이 인용한 뤼미에르 형제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와 마나키 형제들의 초기 기록 영화 <WEAVING WOMEN> 등에서 볼 수 있듯 서구 근대의 시각 체계가 영화로서 처음 포착한 광경에 노동자의 모습, 특히 여성 노동자의 모습이 담겼음을 상기할 때 우리가 <여공의 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담지 않은, 혹은 한국의 근대사가 관심을 가지지 않은, 그리하여 비가시화된 영등포 경성방직 여공의 모습을 내러티브하려는 영화의 시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의 시각 체계에서 벗어난 조선의 여성 노동을 영화로써 프레이밍 하려는 시도, 즉 비가시화된 것의 가시화의 전략, 혹은 사라진 초기 영화 <경성전시의 경>을 구성하기 위해 <경성>에 빗대어 사라진 것을 프레이밍 해보는 것. 고로 <여공의 밤>은 근대화의 빛 속에 가려진 어둠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빛은 영사기의 빛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 영화 <경성> 스틸

 

<여공의 밤>을 보며 사뭇 뜬금없게도 나는 2023년 올해 개봉한 텐트폴 영화 중에 상반기 설 명절 특수를 안고 나온 <유령>과 하반기 여름 휴가철 특수를 안고 나온 <밀수>, 두 작품이 떠올랐다. <유령>은 중국 영화 <바람의 소리: 유령>을 한국 지형에 맞게 각색 혹은 번역한 작품으로 식민지기 일본 내에 잠입하여 스파이로서 항일운동을 했던 유령을 추적하는 극영화이다. <밀수>1970년대 근대화 이후 공장폐수로 어업 피해를 본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코미디 액션 범죄영화이다. 두 영화는 여성 배우를 주연으로 세운 영화이며 김선아가 『한국 영화라는 낯선 경계』에서 레이 초우의 강압적 모사주의를 인용하며 말한, “비서구 영화가 국제 영화 시장에 나아갈 때 짊어져야 할, 일종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글로벌 시각 경제 안에 초국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을 고루 갖추고자 하였던 한국 영화의 오래된 열망 안에 놓여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 박차경(이하늬)이 새로운 파트너 유리코(박소담)와 함께 항일 운동을 이어 나간다는 의미를 담은 <유령>의 총격 엔딩씬을 두고 영화 <시카고>의 마지막 시퀀스가 떠오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록시 하트(르네 젤위거)가 라이벌로 여겼던 벨마 켈리(캐서린 제타 존스)와 비즈니스 관계로 화해하고 함께 무대를 꾸미는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중절모를 쓴 그녀들이 관객을 향해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멋지게 춤을 추는 장면 말이다. <유령>은 민족성을 보다 초국적으로 보편화된 감정인, 사랑으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유령> 속 유령의 존재를 증거하는 영화표는 사랑의 증표이기도 하기에 영화표를 숨기는 것은 마치 사랑의 증표를 감추는 행위이기도 하다. 차경이 그렇게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명백하게 동성 연인이다. <유령>은 민족성을 동성애로 치환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을 비규범적인 욕망으로 대체하는데 이때 화려한 영화적 양식은 이 일련의 의도를 영리하게 감춘다. 민족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선 동성애적 정체성을 경유해야 한다. 이 매력적인 협상의 결과물은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 영화 <시카고> 스틸

 

한편 <밀수>에서 나를 사로잡은 장면은 악당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만끽하는 배 안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웃고만 있는 똑순이(박경혜)의 얼굴이었다. 다른 해녀들이 짧은 탄성일지라도 한 마디씩 대사를 내뱉는 와중에 그녀는 그저 정적을 지키고 있을 뿐이어서 그랬을까? 사실 조연 배우의 대사 분량이 적은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 <밀수>가 여성 주연을 앞세운, 일순 여성 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팜므파탈이라는 고루한 여성성의 전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권 상사(조인성)의 존재로 인해 동성사회성에 그쳐 버리는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화)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저 남성의 자리를 여성으로 성별 치환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한국형 남성 누아르 혹은 액션 영화의 변두리에서 자주 보았던 여성 캐릭터들이 이제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건 분명하니까. 여성 인물이 영화 내러티브의 전면에 드러나고 무언가를 성취하고 있지만 그 전형성이 전복되지 않고 지속시간만 늘려갈 때 여성 서사라는 공허한 외침 앞에 이를 바라보는 여성 관객인 나는 어쩐지 맥이 빠진다.

 

▲ 영화 <여공의 밤> 스틸

 

드러났지만 감춰진 장면들이 있다. <여공의 밤>은 일제 식민지 시기 경성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사라진 역사를 스크린에 드러내고자 한다. 드러낼 수 있는 사료들이 적을 때 <여공의 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실증할 지표들이 비어있는 공간 그 자체를 프레이밍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영등포의 과거를 포착하기 위해 현재는 베이커리 카페로 바뀐 옛 경성방직 건물의 자리에 카메라를 세운다. 이 카페는 빵이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고 나 역시 과거 그곳에 방문하여 빵을 먹은 적이 있다. 과거의 역사를 기술한 현판이 건물의 한편에 버젓이 걸려 있었음에도 보지 못했던 사실을 카메라를 통해 본다. 사실 본다는 것은 허상이고 그 실체를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스크린 전면에 펼쳐진 여성 액션 영화에서 어떠한 해방감 못지않게 모종의 절망감을 느꼈을지라도 우리가 목격한 것을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또 다른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니 여성 관객으로서 나는 두 텐트폴 영화를 보며 그저 질문할 뿐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상업영화 시장에서 여성 투톱의 텐트폴 영화, 다시 말해 상업적 판단 안에서 나온 여성 주연의 영화를 두고 우리가 읽어내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협상물은 나를 흥분하게 하고 어떤 협상물은 나를 슬프게 한다면, 이 상업화된 프레임 안으로 무엇은 드러나고 무엇은 감춰졌기 때문인 걸까. 답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글쓴이. 재연

영화를 보러 다니는 여성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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