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습니다. 20살이 되던 2014년부터 장마철마다 꾸준히 부천을 찾았으니, 올해로 꼭 10번째 부천을 찾은 셈이네요. ‘판타스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올해도 피와 살점이 흩날리고 기발함과 기괴함 사이를 넘나드는 영화들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연례행사처럼 충격적으로 조악한 영화들을 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올해 영화제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영상은 상영작이 아니었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매년 흥미로운 트레일러를 선보여 왔습니다. 매년 영화제의 대주제에 맞춰 슬래셔, 고어, 바디호러, 오컬트 등 다양한 장르의 연출자들을 섭외해 트레일러를 제작해 왔습니다. 올해의 트레일러(https://www.youtube.com/watch?v=PMBwhhxRfHk)는 “영화+”라는 영화제 슬로건에 맞추어 제작되었습니다. 최근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지켜봐 온 관객이라면, 영화제가 VR, XR 등으로 불리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데 힘써왔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영화의 확장을 연상케 하는 이 슬로건은 영화제가 기존에 힘써온 방향성에 관한 것처럼 다가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습니다. 트레일러는 이렇습니다. 부천 시민들이 미소짓는 얼굴이 슬로모션으로 등장합니다. 영화 마니아부터 학생, 택시기사, 퇴직 공무원, 이주민 등 다양한 모습의 부천 시민들의 얼굴을 부천과 연결지어 보려는 문구들이 이어집니다. 트레일러는 “부천 50년에 영화를 더하다”라는 문장을 끝납니다.
“202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제시하는 슬로건 ‘영화+’는 K-시리즈·K-팝·K-웹툰 등 한국의 대중문화가 결합·융합되면서, 산업과 문화환경 전체의 지각변동 그 한복판에 서 있는 한국영화의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전망하고자 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의지를 담고 있다.”라는 홈페이지의 설명은 프로그램 속에서 그 의미를 찾기 어렵습니다. “영화+”라는 슬로건은 “영화를 더하다”라는 의미불명의 문구로 변형되었습니다. 영화제 프로그램상에서 “영화+”라는 슬로건이 활용된 것은 케이팝과 연관된 세 편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된 섹션 뿐입니다. <위커맨>, <용쟁호투>,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 <청춘 낙서> 등 네 편을 상영한 “부천시 50주년 기념전”의 상영작들은 별다른 맥락 없이 ‘좋은 영화’ 네 편을 모아놨을 뿐입니다. “영화+”라는 슬로건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부천 50년에 영화를 더하다”라는 공허한 문장을 짧은 로고로 함축해낸 것일까요? 사실 별생각 없이 지나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자체와 결합된 영화제는 어쨌거나 지역행사이고 지역축제입니다. 타협은 불가피합니다. 부천시 50주년이라는 명분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타협점을 찾는 데 실패한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트레일러는 영화제 동안 실질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했습니다. 일반상영이 시작된 6월 30일까지만 해도 트레일러는 정상적으로 상영되었지만, 주말 사이 부천 시민들이 등장한 앞부분이 잘려나가고 “부천 50년에 영화를 더하다”라는 문구만 영화 상영 전 등장했습니다. 온라인 상영에서는 아예 트레일러가 상영되지 않았습니다. 영화제 개막 이전 홍보차 트레일러를 공개하던 관례마저 올해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트레일러가 영화제 유튜브에 공개된 것은 폐막식이 진행되던 날이었습니다. 이것이 트레일러에 대해 쏟아진 관객의 비판에 따른 결정인지, 다른 내부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에게 “영화제가 이전과 다르다”는 인상을 주기엔 충분했습니다.
최근 많은 영화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2021년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잠정중단을 선언한 데 이어,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폐지되었습니다. KT&G 상상마당시네마가 운영을 잠정중단하며 중단된 대단한 단편영화제는 2022년 가까스로 부활했지만, 운영주체 변경에 따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2022년 지방선거 이후 강릉국제영화제, 평창국제평창영화제가 폐지되거나 사실상 폐지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습니다.국내의 가장 오래된 독립영화제라 할 수 있는 인디포럼은 2022년 영화제를 개최하지 못한 것에 이어 폐지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작년 12월에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집행위원장과 사무국장이 예산 초과와 임금 체불 문제로 해임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배우 정준호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임명하며 논란을 빚었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또한 방송계 인사를 집행위원장에 임명하며 우려를 사기도 했습니다. 혁신위원회의 발족으로 영화제 정상개최를 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내홍은 모두가 알 것입니다. 원주아카데미 극장 철거와 관련한 논쟁과 함께 원주옥상영화제는 원주시의 비협조적인 행정으로 개최 위기를 맞았었고, 인천여성영화제는 퀴어영화 상영작을 검열하려는 인천시 당국의 행위에 반발하며 지원금 없이 영화제를 치렀습니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은 개막식 당일 오후 서울시의 갑작스러운 보조금 지원 중단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성인이 된 제가 처음으로 찾은 영화제였습니다. 그 뒤로 저는 무수한 영화제들을 돌아다녔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발, 인디포럼, 서울독립영화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서울국제대안영상페스티벌, 서울국제실험영화제, 디아스포라영화제,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한국 퀴어 영화제, 미쟝센 단편영화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충무로뮤지컬영화제…. 몇몇은 사라졌고, 몇몇은 큰 위기를 겪고 있으며, 어떤 곳은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영화제의 오랜 관객으로서, 짧게나마 영화제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으로서, 국내 영화제들의 현재에 큰 불안감을 느낍니다. 국내에서 영화제는 지속될 수 있을까요? 지난 3월 진행된 반짝다큐페스티발은 영화제라는 이름의 축제가 주는 희열로 가득한 3일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지원금 없이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영화제의 지속 가능성에 재차 회의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방선거 이후 교체된 지자체장과의 갈등이건, 외부인은 알기 어려운 영화제 내부에서의 갈등이건, 많은 영화제가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저희는 앞으로 계속 영화제에 갈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영화제가 멸종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고민이 많아지는 여름입니다. ACT!도 함께 고민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136호에 수록된 글들을 소개합니다.
[이슈와 현장]에서는 AI 기술이 불러온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살펴보는 글과 함께, "아카데미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원주 아카데미 극장과 연대하는 분들을 인터뷰 했습니다.
[미디어 인터내셔널]에서는 양주연 감독님의 2022년 독인큐베이터(dok.incubator) 인터내셔널 프로젝트 경험기를 담았습니다.
[리뷰] 코너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다큐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 시리즈"에서는 장윤미 감독님이 이강현 감독님의 작품들에 관해 써주셨습니다. 마테리알 편집인 함연선님이 쓴 『이방인들의 영화』 서평과, 박동수 편집위원의 <206: 사라지지 않는> 리뷰도 함께 실립니다.
[인터뷰] 코너에서는 자신만의 웹진을 꾸려나가고 있는 웹진 해파리의 두 운영진과, 공동체미디어 릴레이 인터뷰의 일환으로 옥천FM을 인터뷰하였습니다.
[페미니즘 미디어 탐방]에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여성 씨름선수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모래바람>의 박재민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Me, Dear] 코너에서는 레즈비언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는 레즈용의 에세이, 종이잡지의 낭만에 관한 원혜윤님의 에세이, 『활동가들 - 위기와 비관에 맞선 사람들』의 엮은이 플랫폼C 활동가 임현창님의 글, <너에게 가는 길>을 가지고 해외 상영 투어를 다녀온 변규리 감독님의 후기글이 실립니다.
[Re:Act!] 코너에서는 ACT! 지난 호에 참여해주셨던 권아람, 이한준, 로새님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며 (0) | 2023.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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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의 너에게 (0) | 2023.10.13 |
이상을 현실로 (0) | 2023.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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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그리고 변화를 생각하며 (0) | 2022.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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