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독인큐베이터(dok.incubator)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목적으로 체코 프라하를 기반으로 2010년에 설립된 조직이다.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에서 제작되는 영화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국제 프로그램도 있다. 국제 프로그램의 경우 수개월에 걸쳐서 진행되는데, 프로젝트 중간에 정해진 기간 동안 모여서 편집 워크숍이 진행되고, 이 결과를 가지고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등에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게 된다. 지난 10년 간 독인큐베이터는 150편 이상의 영화를 지원했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에서 참여는 양주연 감독의 <양양>이 처음이다. <ACT!>에서는 다큐멘터리 포스트 프로덕션 지원 프로그램을 국내에 소개하고자 양주연 감독에게 글을 청탁했다. 독인큐베이터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국내에도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2015년, 단편 다큐멘터리 <옥상자국>을 만들면서 나는 기획부터 촬영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홀로 진행했다. 물론 편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작비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때는 다큐멘터리를 편집감독과 함께 편집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약 4개월을 홀로 편집실에서 지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결정한 방향을 함께 상의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그때마다 나는 다음 작업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영화를 편집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리고 첫 장편 다큐멘터리 <양양>이 편집 단계에 접어들면서 그때의 다짐을 떠올렸다.
독인큐베이터(dok.incubator)에 대해 내가 처음 알게 된 건 2019년 11월,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에서였다. 다양한 다큐멘터리 워크숍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나는 유럽에서 8개월간 편집, 마케팅, 배급에 관한 멘토링을 제공하는 독인큐베이터 워크숍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막막하기만 했던 편집을 함께 상의할 수 있는 멘토가 생긴다고? 그리고 편집뿐만 아니라 마케팅, 배급에 대해서도 같이 점검하고 피드백을 들을 수 있다고? 곧 편집을 앞두고 있던 나는 독인큐베이터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독인큐베이터에 지원하기 위해 알아보던 중, 몇 가지 눈에 띄는 조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워크숍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독, 프로듀서, 편집감독으로 구성된 팀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인큐베이터를 지원할 때 처음 제출하는 45분 이상 분량의 러프컷에 대해 워크숍 내내 유연하고 열린 마음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22년, 독인큐베이터의 인터내셔널 프로젝트로 <양양>이 아시아 최초로 선정되고, 세 번의 워크숍과 한 번의 프리뷰 발표까지 일 년에 총 네 번 유럽을 오가며 나는 깨달았다. 독인큐베이터에서 요구했던 두 가지 조건이 협업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고 어려운 조건이었음을 말이다.
2022년 4월, 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오랜만의 비행이라 피곤함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첫 번째 워크숍이 열리는 슬로바키아의 반스카 스티아브니차(Banská Štiavnica)는 부다페스트에서 차를 타고 약 1시간 30분 정도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다. 처음 도착했던 반스카 스티아브니차의 풍경은 너무도 생소한 유럽의 전원마을 풍경이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워크숍이 진행될 호텔에 체크인하고, 독인큐베이터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고, 처음 만나는 다른 프로젝트 감독, 프로듀서, 편집감독들과도 서로를 소개했다. 총 8개의 인터내셔널 프로젝트는 폴란드, 루마니아, 이탈리아, 헝가리, 스웨덴, 스페인, 영국 등 다양한 국가의 작업자들로 이루어졌다.
다음 날 본격적으로 첫 번째 워크숍이 시작되고 2개의 팀으로 나누어져 이틀간 각 팀의 러프컷을 함께 보고 피드백했다. <양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약 20명이 넘는 처음 만난 작업자들로부터 약 2시간 동안 다정하지만 냉정한 피드백을 들어야만 했다. 피드백은 독인큐베이터의 워크숍 과정에서 매번 중요한 의사소통 중 하나였다. 그렇게 스크리닝과 피드백이 끝난 후, 3일째 되는 날에 DNA 섹션이 시작되었다.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DNA 섹션은 경험 있는 프로듀서와 감독의 일대일 대화를 통해 영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되짚어보고, 감독 스스로 영화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시간이었다.
DNA 섹션을 진행해주었던 프랑스 프로듀서, 크리스틴이 나에게 질문을 시작하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모든 질문에는 솔직하게 답해주길 바라고, 너에게 질문하는 나의 위치도 절대 쉽지 않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는 말이었다. 크리스틴의 두 눈을 보고 알겠다고 답을 하는데 왠지 나도 모르게 편안해지면서 내 안의 감정을 무장 해제시켰다. 그렇게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한 시간 동안 울면서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했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은 열심히 그 이야기를 기록한 뒤 공유해주었다.
앞서 들었던 피드백과 DNA 섹션 때 나왔던 내용을 바탕으로 편집의 커다란 방향을 잡고 핵심 키워드를 선별했다. 그렇게 나머지 시간 동안 팀별로 주어지는 편집실에서 각자 멘토링과 새로운 오프닝 편집을 한 뒤, 마지막 날 다 같이 모든 프로젝트의 바뀐 오프닝을 함께 감상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든 팀이 선보인 새로운 오프닝이 마법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워크숍은 6월 말 체코의 올로모츠(Olomouc)라는 도시에서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체코 프라하로 먼저 가서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두 번째로 만나는 작업자들은 두 배로 반가웠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다시 만나서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역시나 워크숍이 시작되기 직전의 저녁은 늘 환대와 환희로 가득했다.
두 번째 워크숍 중반부터는 세일즈사 직원과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합류해서 함께 극장에서 러프컷을 보게 된다. 자연스레 편집의 마감이 만들어진 셈이다. 두 번째 워크숍은 시작부터 각자의 편집실에서 주로 진행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감독과 프로듀서는 마케팅 멘토와 함께 영화의 시놉시스와 배급전략 등을 다시 쓰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다시 편집감독이 편집하는 편집실로 와서 함께 편집 방향을 논의하고 계속해서 컷을 확인해야 했다. 시사를 앞두고 최종 러프컷을 제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 마침내 우리는 편집을 마치고 맥주를 마시러 갔다. 무더운 여름날 체코의 맥주는 참 맛있었다.
워크숍 3일 차부터 다음 날까지 모든 프로젝트의 극장 시사가 진행되었다. 시사하기 전 간단하게 프로젝트에 관해 소개하고, 시사가 끝나고 난 뒤에는 장소를 이동해서 1시간 동안 피드백을 나누었다. 첫 번째 워크숍에서는 함께 참여하는 작업자들에게서 피드백을 들었다면, 이번에는 세일즈사나 영화제 프로그래머로부터의 피드백이었다. 그들의 피드백을 들으며 그동안 함께 시도했던 편집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점검했다. 피드백이 끝난 후에는 바로 그들과의 비즈니스 미팅이 진행되었다.
세 번째 워크숍은 10월 초 체코의 들로우하(Dlouhá)에서 진행되었다. 이곳은 프라하에서 차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도착했을 때 놀란 건 주변 식당이 딱 한 군데뿐이라는 거였다. 온통 초록빛 나무들과 붉은 지붕의 낮은 건물들로 가득한 한적한 곳에서 워크숍이 열렸다. 하나, 둘 도착하는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데 이번이 마지막 워크숍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 번째 워크숍은 1일 차에는 마지막 전체 컷 편집을 진행하고, 2일 차부터는 새로운 트레일러 편집감독과 함께 트레일러 편집에 집중하는 일정이었다. 트레일러는 11월 암스테르담 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예정된 프리뷰 발표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짧은 시간에 영화의 톤과 스타일을 확인하는 목적이기도 했다. 물론 컷 편집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트레일러 편집에도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쉽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트레일러 편집감독과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되기도 했다.
트레일러 편집과 함께 영화의 시놉시스와 프리뷰 대본을 작성하는 시간이 병행되었다. 다른 방에서 프로듀서들과 함께 시놉시스, 프리뷰 대본을 작성하고 다시 편집실로 돌아오면 트레일러 편집감독은 트레일러 편집에, 편집감독은 러프컷 편집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프로페셔널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양양>이라는 영화가 기다려졌다. 모두의 눈과 마음이 모이고 모여 함께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독인큐베이터의 첫 번째 워크숍 때 모든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프로듀서 크리스틴이 모두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감독 한 명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독인큐베이터 내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영화는 감독의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걸 힘든 제작 기간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독인큐베이터에 참여하면서 새삼 다시 느낀 건 결국 영화는 공동작업이라는 거였다. 여기서 ‘공동’이라는 말은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스태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인큐베이터 워크숍에 참여하는 동안 만났던 무수히 많은 동료들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워크숍의 다른 참여자들, 멘토들, 프로그래머들, 세일즈 에이전트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 없었다면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 <양양>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장편 다큐멘터리 한 편이 완성되는데 평균적으로 3년에서 4년 정도 걸린다고들 한다. 나는 그 과정을 홀로 통과하면서 소모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편집 감독과의 협업과 워크숍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것 같다. 다행히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분위기이다.
최근 다큐멘터리 창작자들 사이에서 느슨하게나마 분업화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전문성 있는 편집감독의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편집 단계에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멘토링과 워크숍 프로그램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감독이 홀로 영화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영화에 함께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제 나는 곧 세상에 나타날 영화 <양양>을 동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의 시간이 담겨있는 만큼 부디 멀리멀리 퍼져 가기를 바랄 뿐이다.□
글쓴이. 양주연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주로 ‘여성’이 서사화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이어오고 있고,
현재 가족의 금기였던 고모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 <양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참고 사이트
- 독.인큐베이터 홈페이지 https://dokincubato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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