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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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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10. 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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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글은 국제 다큐멘터리 협회(International Documentary Association) 사이트에 게재된 Jessica Devaney의 글, <Queering Documentary: An LGBTQ+ Conversation>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 https://www.documentary.org/online-feature/queering-documentary-lgbtq-conversation)
본 대담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다큐멘터리 창작에 관한 퀴어로서 각자의 경험과 고민을 나눕니다.

본 기사의 내용은 ACT!가 지향하는 가치와 맞닿아 있고,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다양성과 당사자로서의 퀴어 재현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소개하고자 번역했음을 알립니다.

 

[ACT! 132호 미디어 인터내셔널 2022.10.19]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5

 

번역: 한진이 (ACT! 편집위원)

 

 

(128호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1' 기사,

129호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2' 기사,

130호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3  기사

131호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4  기사에서 계속)

 


제시카 데바니: 퀴어와 트랜스 이야기가 맞닥뜨리는 장애물의 특수성particularity까지 짚어내는 말씀을 해주셨다. 어떤 LGBTQ+ 영화가 대중의 승인을 얻고 인지도를 쌓아 수상작으로 여겨지는가? 멀티튜드의 우리 팀은 전환 치료를 다루는 영화, <프레이 어웨이(Pray Away)>의 제작을 막 마무리한 참이며, 이달 트리베카(Tribeca)에서 최초로 공개된 해당 작품은 오는 8월 중으로 넷플릭스에 업로드 될 예정이다.(각주1)  멀티튜드는 퀴어가 이끄는 회사이니만큼 영화 제작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고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나 이는 오산이었다. “가장 시급한 LGBTQ+ 과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수많은 이성애자 자본가와 게이트키퍼gatekeeper(각주2)들이 마치 우리가 최고 비극적인 수준으로 절박한 퀴어 이야기를 가려내는 경쟁이라도 하고 있는 양 굴었다. 의사 결정자들은 미-서부 특유의coastal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관점으로 우리를 본다. 그들은 “재밌고” “행복한” 우리와 파티를 즐기지만 우리가 트라우마를 털어놓을 때는 곁을 떠난다. 그렇게 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태반이 이성애자인 게이트키퍼들의 기대에 엇나가는 퀴어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더 깊이 골몰하게 된다.

 

 

▲영화 <프레이 어웨이>의 장면. 교회에서, 전환 치료 생존자 줄리 로저스(Julie Rodgers). 크리스틴 스톨라키스(Kristine Stolakis) 감독. (사진 출처: 멀티튜드 필름)

 

제스 서치: 분명 우리가 채널 포(Channel Four)에서, 그리고 독 소사이어티에서 일을 시작하던 즈음에는 인정 받고자 투쟁하는 이들, “퀴어들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동성혼을 위시한 대단한 성공이 있은 후, 역사적 과업이 이미 완수된 지금 퀴어 이야기에 돈을 투자하는 것은 이전만큼 우선하지 않게 되었다는 인식이 자랐다. 우리는 퀴어 영화 자금을 마련하고 타other투자자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해 왔다. 그리고 내가 얻은 깨달음은, 만약 타other게이트키퍼 그 자신들이 커뮤니티의 일원이 아님에 어떤 것을 본능적인 수준에서 감각하지 못한다면 아마 더욱 중대한 정치적 의의를 놓쳤으리라는 것이다. 왜냐, 내가 보는 바로는 퀴어의 삶이, 현 시점에서는 특히 트랜스의 삶이, 우파가 문화 전쟁에서 자행하는 일들의 선두에서 무기화되었기weaponized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우리의 절박한 문제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가? 해방은 다만 절박한 문제를 이야기함으로써 가능하단 말인가?

린지 드라이든: 트라우마 혹은 병리화에의 욕구는 이미 논의된 바 있지만 재차 꺼내보려 한다. 나는 특정 공동체의 이야기에 접근하는 한 방법으로써 트라우마의 묘사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하는 데 관계해 왔다. 같은 일이라도 지금이라면 과거에 했던 것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다. TV를 틀어 즐겁고 아름답고 희망찬, 게다가 우연찮게도 퀴어인 무언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다지만, 퀴어 경험의 트라우마가 아닌 이야기가 설 공간이 있나? 아직은 먼 일인 것 같다.

우리의 일은 우리를 황홀한 기분이 들게 하는 동시에 LGBTQ+ 삶의 트라우마와 난점, 역경까지도 다루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례를 만드는 것이다.

비리디아나 리버만: 트라우마를 면전에 내세우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지난 크리스마스 마침내 만나볼 수 있게 된 레즈비언 로맨틱 코미디 역시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커밍아웃 이야기였다. 자리에 잠자코 앉아 있다 돌연 아아악! 하게 되는 그런 순간. 그러니까, 이야기는 언제나 트라우마 관한 것, 무조건적인 정체성 풀어놓기다. 그냥 세상을 항해하면서 개인의 정체성과는 조금도 관련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이어도 될 텐데.

킴 유타니: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유형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한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지나치게 자주 목도하는지도 모르고, 그것은 심지어 퀴어 영화 제작자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매우 경직된 몇몇 생각들이 영화 제작자들을 자기-검열하게끔self-imposed 만들어 말할 수 있었을 이야기를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이야기와 함께 오는 어떠한 자유마저 불가능하게 한다.

얀시 포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 생각에 사람들은 “어렵거나 도전적인” 혹은 따뜻하고 포근한 결말을 의도하지 않는 영화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그런 영화는 으레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퀴어 영화의 경우 유달리 더, 그것이 가령 다수가 퀴어 공동체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다소간 진보적 줄 세우기progressive kind of prioritizing라고 본다. 우리가 지금—그리고 우리는 늘 이 “우리” 안에 없다—우리가 지금 말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그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저 다른 것에 투표하면 될 일이다.

내가 지금 “가치importance” 혹은 다큐멘터리가 항상 그렇다고 비난받는 그 비슷한 어떤 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이러한 것이 ‘가치 있으니까’ 수상하면 좋겠다고?” 그렇게 따지면 예능은? 주목 받아야, 인정 받아야 하는 영화들을 무시하는 작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영화 <하우 투 서바이브 어 플레이그>의 장면. 사진: 윌리엄 루카스 워커(William Lucas Walker). 출처: 국제다큐멘터리협회 사이트 https://www.documentary.org/online-feature/protocols-action-david-frances-how-survive-plague/



제시카 데바니: 바로 그거다! 작년 오스카 시즌, 우리 팀은 다큐멘터리상 부문의 역사를 쭉 훑어 봤으나 <스트롱 아일랜드>를 포함하여 여태껏 수상 후보로 호명된 LGBTQ 테마의 영화는 고작 다섯 개가 전부였다. <스트롱 아일랜드>는 2018년에 후보에 올랐고, 이미 언급해주셨다시피 이 영화가 퀴어를 주제로 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채지는 못한다. 그보다 이전에는 2012년 후보에 오른 액트 업(ACT UP)과 에이즈 유행에 대한 영화 <하우 투 서바이브 어 플레이그(How to Survive a Plague)>(각주3) , 1992년 후보에 오른 전환 치료에 대한 영화 <체인징 아워 마인드: 더 스토리 오브 닥터 에블린 후커(Changing Our Minds: The Story of Dr. Evelyn Hooker)>(각주4) , 1989년 수상한 에이즈 추모 퀼트에 대한 영화 <커먼 쓰레드: 스토리즈 프롬 더 퀼트(Common Threads: Stories from the Quilt)>(각주5) , 그리고 1984년 수상한 동성애자 권익 활동가 하비 밀크(Harvey Milk)에 대한 영화 <하비 밀크의 시간들(The Times of Harvey Milk)>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개의 수상과 에이즈가 범람하는 가운데 얻어낸 후보 지명 하나, 2012년 과거의 에이즈 운동을 돌아보며 얻은 또 하나의 후보 지명, 그 뒤를 이은 <스트롱 아일랜드>의 후보 지명까지 목격한 것이다. 그야말로 실종되었던 모든 경이로운 퀴어 영화들에 대한 인정의 순간이었다. 지난 해만 해도 <디스클로저>와 <웰컴 투 체첸(Welcome to Chechnya)>을 후보에 올릴 수 있었다.

얀시 포드: 사람들이 뭘 알고나 하는 건지. 여태까지의 패턴이 모든 것을 말해주긴 한다마는. 2012년 다음이 2017년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고. 그리고 그 전에는 뭐, 1992년? 제발 좀. 내가 이름 댈 수 있는 것만 해도 벌써 한두 개가 아니다. 케이트 데이비스(Kate Davis)의 영화 <남쪽의 편안함(Southern Comfort)>이 호명된 적 있던가? 심사 대상 명단에 오르기는 했는지? <셀룰로이드 클로지트(Celluloid Closet)>는 또 어떻고? <풀어헤쳐진 말들(Tongues Untied)>은? 이런 영화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영화 제작의 유감스러운 공간, 사람들을 언짢게 만드는 그곳에 가닿는 그때 당신이 다루게 될 것은 당신 작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이다. 그리고 그건 더이상 당신 작업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불편함에 대한 것이며, 그것이 슬프고 문제적인 지점은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또한 공교롭게도 권력과 돈을 쥔 이들이기 때문이다.

 

 

▲ 영화 <풀어헤쳐진 말들>의 썸네일. 사진 출처: 배급사 프레임라인(Frameline)의 사이트 https://cms.frameline.org/distribution/films/tongues-untied/



특히 코로나를 빠져나오면서, 그리고 특히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타살murder과 그에 국가 전체가 들고 일어나 “더 이상 참지 않겠다” 선언한 방식의 여파 안에서—나는 이처럼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한 걸음 물러나 자신들이 타성에 빠져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고된 일 혹은 그들이 점한 삶과 존재 가운데에서 생겨난 것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관심을 두고 있던 일을 기꺼이 끌어안던 시절이 있었다. 관심curiosity은 평가절하되고 있다. 예전만큼 사람들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

 


[각주1] 2022년 9월 기준, 한국 넷플릭스에서 <프레이 어웨이>를 시청할 수 있다.

[각주2] 게이트키퍼는 뉴스 등의 매체에서 청자에게 보여질 메시지를 취사선택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영화 산업의 경우에는 청자가 관객으로, 메시지가 영화로 대체된다. 게이트키퍼에는 배급업자, 투자자 등이 포함되며 수문장, 문지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각주3] 아직 국내에 공식적으로 소개된 적 없는 영화인 바, 원제를 임의로 번역하지 않고 음차 표기하였다. “역병을 살아내기,” “역병에서 살아남는 방법”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각주4] 마찬가지 이유로 음차 표기하였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다: 에블린 후커 박사의 이야기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각주5] 마찬가지 이유로 음차 표기하였다. “함께 엮은 실: 퀼트가 말해주는 것들,” “공동의 실: 퀼트로 짜여진 이야기들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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