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국제 다큐멘터리 협회(International Documentary Association) 사이트에 게재된 Jessica Devaney의 글, <Queering Documentary: An LGBTQ+ Conversation>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 https://www.documentary.org/online-feature/queering-documentary-lgbtq-conversation)
본 대담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다큐멘터리 창작에 관한 퀴어로서 각자의 경험과 고민을 나눕니다.
본 기사의 내용은 ACT!가 지향하는 가치와 맞닿아 있고,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다양성과 당사자로서의 퀴어 재현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소개하고자 번역했음을 알립니다.
*This article is a translation of Jessica Devaney’s writing, originally posted at the website of ‘International Documentary Association’. (https://www.documentary.org/online-feature/queering-documentary-lgbtq-conversation )
In this conversation, documentary filmmakers share their experiences and thoughts about making documentary films as queer.
ACT! is a non-profit Korean media activism journal that aims to promote progressive values. This article resonates with our agendas and needs to be discovered by the people in Korea who embrace diversity as their core value and play a part in cultivating better queer representation in documentaries. The following article is the first part of the whole text and the rest will be published in six articles in order.
[ACT! 131호 미디어 인터내셔널 2022.08.16]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4
번역: 한진이 (ACT! 편집위원)
(128호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1' 기사,
129호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2' 기사,
130호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3 기사에서 계속)
제시카 데바니: 섹스, 불경함, 아웃사이더 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존경성 정치respectability politics[1]가 진보적 영화 공동체로 자기-정체화self-identified한 우리 공동체에 가져온 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 내 우리 같은 퀴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얀시 포드: 아이고야. 평생이 걸려도 못 다 말할 것이다. 흑인 공동체 내의 존경성 정치와 마찬가지로 진보적 영화 공동체의 존경성 정치 또한 문제적이며 뿌리째 뽑혀 폐지되어야 옳다. 더불어 나는 “좋은 진보”와 “나쁜 진보”라는 개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젠더퀴어라고 해서 꼭 존경성 요건box of respectability을 충족시키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누가 지원을 받을 것이며 누가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인지를 판가름할 때,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예술가에 대한 언짢음이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그간 수없이 많은 LGBTQ+ 영화 제작자들이 이 판 도처에서 놀라운 작업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그들이 거둔 결실은 이성애자, 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cishet, 백인 남성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동등하게 평가받았더라면 경력 면에서 더 훌륭한 것을 이룩할 수 있었을 테다.
킴 유타니: 다년간 몸 담으며 아웃페스트가 잇단 퀴어 축제에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본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아웃페스트의 퀴어 영화, 그 경계를 넓히고 싶었다. 이에 실로 많은 반발을 겪었다. 어떤 관객들은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모종의 영화 안에서 자신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것,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영역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스크린 위에 재현된represented 저를 보고 싶어한다. 특정 취향의 인물을 주로 만족시키는 영화제의 경우, 그 파급은 프로그램의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선댄스에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혹은 성취해야 할 또 다른 무엇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 최초로 영화를 공개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영화를 선전하고 또 선보인다. 그러나 선댄스와 일하는 나의 취지가 과거 아웃페스트와 일할 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관객을 몰아붙이고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음을, 우리가 우리 자신과 관객에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음을 확실히 하고 싶다.
비리디아나 리버만: 킴이 말한 관객에 대한 도전, 그것이 바로 내가 살고 싶은 미래이다. 나는 대학원 재학 당시 재현론representation theory에 대한 글을 다수 작성했고, 할리우드가 이야기를 말해 온 태도와 관련하여 그 패턴을 연구했다. 무엇이 됐든 모종의 요건box에 맞아 들어가는 즉시 우리는 본래의 비전, 바로 사실성truth과 진정성authenticity을 상실한다. 나는 관객에 대한 도전을 단순히 관객과의 대립이 아닌 이야기의 진짜 의미를 고수하는 것, 보다 쉬운 접근—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든—을 가능케 하려는 목적으로 어떠한 겹도 덧씌우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샘 페더: 언어를 둘러싼 정체성 정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이 젊은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거부되고 흔들리는 것을, 그리고 종종 그러한 사실에 나이든 이들이 불평하는 것을 목도한다. 내가 그 젊은이 중 하나이던 시절도 기억난다. 당시에 나는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할 때 나의 나이듦을 깨닫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옳은 것을 구별할 수 있으며 그들이 행하는 바가 종내 미래라는 것, 우리는 그들의 주도에 따라야 한다는 것 역시 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내가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존경성 정치의 기로이다. 정상적인normative[1] 것들? 에이. 알다시피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존경성 정치의 꽁무니를 좇는 것은 단 한시도 내 실천의 일부였던 적이 없다. 반면 젊은이들의 말 좇기는,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할지라도, 결코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제스 서치: 내가 느끼기에 존경성 정치는 보다 젊은 이들의 과제challenge에 가까운데, 그들의 경우 원한다면 존경성에 완벽히 흡수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그러한 선택지를 가질 수 없었던 마지막 세대였던 성 싶다. 생각지도 못한 화제였던 것이 천만 다행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저 “정상normal”이 되고자 염원하는 사람들을 재단하느냐? 아니, 당연히 아니다.
피제이 라발: 내 생각에 이는 전형적인 재현의 짐burden of representation에 해당한다. 스크린 상에서 퀴어 영화제작자, 퀴어 이야기, 퀴어 서사에게 허락된 기회는 극히 희소하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등장하는데, 모범 시민model citizen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은 일종의 폐disservice라는 것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인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과중한 부담을 느낀 나머지 모범적 소수자에 대한 허구 서사를 제시한다. 모범적 퀴어라는 관념 역시 존재하며 그들은 입양할 여유와 멋진 옷장, 멋진 직업을 갖춘 백인, 시스젠더, 상류층, 게이 남성으로 대표된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제시되어야 할 방식이기에 그에 들어맞지 않는 사례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와 같은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반발은 조금도 새로운 일이 아니다. 제작 중인 영화들—내가 만드는 종류의 영화를 포함하여—의 지형landscape을 인식함에 따라 우리는 해당 스펙트럼 내 백인 우월주의와 계급주의라는 쟁점의 존재가 여전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LGBTQ+ 혹은 퀴어라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며 이는 문제를 까다롭게 만든다.
세트 에르난데스 롱킬요: 피제이가 교차성의 렌즈lens of intersectionality 안으로 끌어들인 이야기가 반갑다. 나는 미등록이주민으로서 나의 경험을 가져오려 하는데, 미등록이주민의 세계에 시민권을 “딸earn” 만한 모범 이주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지독한 인식이다. 즐겨 관람하는 종류의 이야기들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나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복잡한 반영웅antiheroes을 좋아한다. 복잡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공간이 보다 넉넉했으면 바란다. 왜냐하면 퀴어로서, 미등록이주민으로서, 필리핀인으로서, 아시아인으로서, 우리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이미 타고난 존엄만으로는 기꺼이 포용받지 못하며 도리어 마땅히 존중을 따내려면 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린지 드라이든: 경제에 관한 물음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니라 다큐멘터리 공간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 전 내가 영화기금을 위한 심사위원직에 있던 때, 최종 결정을 좌우하던 집행위원은 어떠한 부가적인 입장perspectives의 직접적인 작용 아래 있었다. 백인, 비-장애인, 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 퀴어 영화제작자들의 제안pitches에 상이한 반응을 체감하는 것은 (물론 우울하기는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뚱뚱하고, 난잡하고, 예술적인 퀴어성은 그들을 극도로 언짢게 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presentation에서 비롯된 언짢음은 그들로 하여금 영화제작자의 스토리텔링 기술을 의심케 만들었는데, 나는 이러한 입장을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이야기를 말할 자격을 얻는 이는 누구이며 그러한 자격을 수여하는 이는 누구인가.
“작업을 퀴어화하는 일이 이제는 마음 최전선에 있다. 퀴어화 없이, 나는 실종된다.” – 얀시 포드
[1] 소외 집단이 사회적 존경을 얻기 위해 혹은 차별을 면하기 위해 집단 내 개인에게 지배 집단의 가치와 행동 양식을 채택하도록 요구하는 분위기 및 전략. 다른 번역어로 존경의 정치, 위신의 정치 등이 있음.
[2] 흔히 ‘규범적인’으로 번역되나 이후의 맥락을 고려했을 때 ‘정상성에 부합하는’, ‘정상적인’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매끄럽다고 판단하여 이와 같이 번역함.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6 (0) | 2022.12.13 |
---|---|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5 (0) | 2022.10.05 |
50주년을 맞이하는 미디어센터, 미국 뉴욕 DCTV - 교육, 제작, 상영이 어우러지는 시민의 공간 (1) | 2022.07.07 |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3 (0) | 2022.06.07 |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LGBTQ+ 대담 - 2 (0) | 2022.04.0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