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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 같아지기보단 상처받을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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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5. 2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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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미니즘을 둘러싸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람, 무관심한 사람, 관심은 있지만 아직은 두려운 사람, 또는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 그렇다면 페미니즘과 함께 어떤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ACT! 135호 페미니즘 미디어 2023.05.30.]

 

『붕대 감기』 - 같아지기보단 상처받을 준비를.

 

김도치 (인스타그램 '읽는페미' 계정 운영자)

 


 5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 덕분에 대학시절을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었을 만큼 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친구. 함께 많은 시간을 공유했고 많은 생각을 주고받았던, 그러나 이제는 5년이라는 공백이 느껴지는 관계. 대학을 졸업하며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친구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반가움과 동시에 약간의 어색함이 감도는 자리에서 대뜸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던 친구. 역시 너답다는 생각에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잘 지냈어?'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슈였던(필자가 쓴) 『언니의 비밀 계정』 책을 선물했다. 그러자 친구의 입에선 '너 페미 그런 거야?'라는 말이 돌아왔다. 친구는 페미라는 단어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고 집에 가서 읽어보겠다며 책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후 너에겐 어떤 연락이 올까.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우리는 페미니즘을 둘러싸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람, 무관심한 사람, 관심은 있지만 아직은 두려운 사람, 또는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 그렇다면 페미니즘과 함께 어떤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 『붕대 감기』 소개 이미지


 ‘이거 나만 불편해?’ 현실의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털어놓기’보다는 ‘호소하기’를 선택한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내가 느낀 감정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겪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이는 성장과정에서 자신의 감정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에 형성된 ‘여성적 특징’의 슬픈 단면이다. 

 그럴수록 우리에겐 페미니스트 친구가 필요하다. 내가 겪은 일과 감정을 상대방에게 설득할 필요가 없는, 자기검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물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방이 반드시 여성, 페미니스트여야 할 필요는 없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서로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화의 시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이 타인에게 존중받는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사회는 여성들의 감정과 경험을 일생에 거쳐 소거시켜왔다. 언제까지고 혼자 견디며 버틸 수는 없다. 

 아마 많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겪어온 고민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소개할 윤이형의 『붕대 감기』를 통해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물론 소설이기에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다양한 등장인물에서 나의 모습이 조금씩 묻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 『붕대 감기』


『붕대 감기』는 기혼녀와 비혼녀, 전업주부와 워킹맘, 헤어디자이너와 탈코르셋 등 서로 다른 상황의 여성들을 둘러싼 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얽혀있는지. 서로를 얼마나 오해하고 또 이해할 수 있을지 소설이라는 방식을 통해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 책에서는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독자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길 권한다. 

 작가는 이렇게 소설 안팎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여러 물음에 대한 답을 직접 주지는 않는다. 예컨대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자매애’와 같은 모범 답안 말이다. 그 대신 작가는 차이가 적대감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성들이 서로 갈등하면서도 공존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서로의 차이를 견디면서 여성들 간의 우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등등의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독자들이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서 이들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소설을 열어둔다. _ 176쪽 ‘진짜 페미니즘’을 넘어서 ; 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페미니즘‘들’에 대해 말하는 방법, 심진경 문학평론가 _ 윤이형, 『붕대 감기』 (작가정신)

 그럼 이제는 필자가 나름의 고민 끝에 찾은 개인적인 의견을 나눠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입장이 다른 친구와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다르듯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도 모두 다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또는 이해받을 수 없다. 바닥에 자유롭게 풀린 형형색색의 실타래를 생각해보자. 부분적으로 겹칠 수는 있지만 애초에 동일한 한 가닥의 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서로의 가치관이 다를 경우 이를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무엇보다 우리의 차이는 더욱 섬세하게 연대하기 위함이지 편갈라서 싸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여성으로 겪어온 억압과 경험들이 전부 동일하지 않다.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그게 페미니즘의 원동력이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을 했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알지 않는가. 또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더 잘 견딜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진정한 의미의 의견 교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상처 줄 수 있음을 인지하고 동시에 상처받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붕대 감기』 속 세연과 진경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본다. 서로를 향한 애정과 진심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날것의 마음이 부대끼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들 관계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텐데 그 어려운 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여자들이 있다. 

 어쩌면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일 지도 모른다. (중략) 그러니 상처받을 것이 두렵다고 해서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암시한다. _ 194쪽 ‘진짜 페미니즘’을 넘어서 ; 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페미니즘‘들’에 대해 말하는 방법, 심진경 문학평론가 _ 윤이형, 『붕대 감기』 (작가정신)

▲ 『붕대 감기』 소개 이미지



 이 책을 읽고 각자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보면 어떨까. 추신; 필자의 친구에게는 먼저 용기내줘서 고맙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

 


글쓴이. 김도치


앞선 여성들이 내민 손을 잡고, 뒤에 올 여성들을 위해! SNS에서 페미니즘 계정을 운영하며 삶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인스타그램 @reading.f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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