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연히 ‘그레이스 리 보그스’라는 인물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그레이스 리 보그스’는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신기한 것은 이름도 생소한 이 미국 할머니의 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직접 자막까지 번역 및 제작해서 서울을 비롯 남원, 전주, 광주 등 전국 8개 도시에서 상영회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온라인 상영회도 기획하여 300명 제한 인원을 꽉 채워 마감했다. 상영회에 대한 홍보 및 공유는 온라인 업무 협업툴인 ‘슬랙’과 ‘노션’을 통해서 진행됐다. 다큐멘터리와 그레이스 리 보그스라는 인물도 흥미로웠지만, 이 상영회의 기획과 진행과정이 더 궁금했다. 다행히 주최측과 연락이 닿아 이번 상영회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 신인아 님이 생생한 상영회 후기 글을 보내주었다.
[ACT! 131호 이슈와 현장 2022.08.17.]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 다큐멘터리 <어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이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2013) 상영회 후기
신인아
2022년 3월 9일, 3.8 여성의 날의 다음 날, 혐오의 언어를 등에 업고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혁명가인 그레이스의 말을 함께 들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 리 보그스(Grace Lee Boggs, 1915-2015)는 탁월한 선동가였다. 그의 선동 덕택에 '악명 높은' 그 디트로이트 항쟁(1967)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또한, 그는 선동의 여파를 온전히 책임지기 위해 100년의 생애 동안 끊임없이 사유하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온 혁명가였다. 그레이스는 젊은 혁명가들에게 'What time is it on the clock of the world?(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묻고는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흑인보다 흑인 운동에 크게 기여한' 중국계-미국인의 이야기에 접속하기까지
나는 디자이너니까, 그래도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뉴욕에 간 적이 있다. 기구하게도 내가 갔던 시기는 유난히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리뉴얼하고 있던 시기라 큰맘 먹고 갔는데도 내가 볼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와중에 가장 온전히 볼 수 있었던 전시는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었던 'We Wanted a Revolution: Black Radical Women 1965-1985(우리가 원한 건 혁명이었다: 급진적 흑인 여성 1965-1985)'이었다. 변화가 아니라 혁명을 원했던 이들이 겪었을 이중의 억압을 제목으로 추측해보며 생소한 작업과 생소한 이름을 읽어갔다. 전시 말미에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섹션이 있었는데, 제공된 종이에 나는 '미국의 인종에는 백인과 흑인뿐인가 보다'같은 감상을 남겼던가? 끝내 그 말을 남기진 못했던가? 그랬다. 그때 나는 백인우월주의가 비백인 그룹을 서로 다르게 취급하고, 분류하여 '인종 갈등'을 조장한다는 걸 잘 몰랐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페미니즘은 자꾸만 나를 미국 흑인 운동으로 이끌었다. 몇 번의 가볍고 끈질긴 인연으로 참여하게 된 워크숍에서 'Transformative Justice(변혁 정의)'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배경을 알고 싶어 찾다가 이 개념이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변혁 정의는 아주아주 간단히 말해 폭력의 근간을 억압에서 찾고 억압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고민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억압을 내포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이 억압에 공모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들을 읽는 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오, 이런 게 있군'이라는 마음으로 갤러리를 둘러보던 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그보다는 조금은 더 필사적으로 그들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을 참 속 시원하게도 했고, 나에게 중요했던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되어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새로운 범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이 발견들이 너무도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나는 우리가 주로 접하는 미국 문화가 얼마나 백인중심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오드르 로드도, 옥타비아 버틀러도, 제임스 볼드윈도 너무 늦게 번역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같이 얘기할 사람도 필요하고, 혼자 원서를 읽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니, 책 한 권을 읽는 모임을 열었다. 책은 마침 진도가 안 나가던 (변혁 정의를 찾아보면 자꾸 만나게 되는) 디트로이트 지역 흑인-퀴어-페미니스트 활동가인 Adrienne Maree Brown(에이드리언 마리 브라운)의 'Emergent Strategy(발현적 전략)'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리듬과 관점에서 책을 발견하고 체험했고, 책보다 우리 얘기를 더 많이 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에머전트'하다며 신기해했다. 그 모임을 통해 내가 발견한 건 에이드리언이 멘토라 부르는 '그레이스 리 보그스(Grace Lee Boggs)'라는 이름이었다. 미국에서 인종은 백인과 흑인뿐인 것 같다고 느꼈던 내가 이 중국계-미국인의 이름에 주목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일 테다. 구글링을 통해 어렵지 않게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감독이 한국계-미국인인 그레이스 리(Grace Lee)라는데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공동체 상영용이라 좀 비쌌지만) 라이센스를 구매했다.
내가 원하는 것도 혁명이니까
생각해보면 한국 주류 정치나 매체에 나의 이야기가 있다 느낀 적이 없다. 내가 투표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당선된 적이 거의 없거니와 선거철 내내 나오는 공약이나 현안들은 내 삶에서 한 발짝씩 비껴나 있다. 그런데 올해는 좀 차원이 좀 달랐달까. 그간은 작더라도 희망의 실마리라도 찾아 위안으로 삼기도 했는데, 그래도 일상을 살아가자는, 애써 서로를 토닥이는 말들이 보기 싫은 정도였다. 일상을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유지하면, 또 이런 일이 반복될 테니까. 아니, 더 나빠지기만 할 테니까.
<American Revolutionary: The Evolution of Grace Lee Boggs>(미국 혁명가: 그레이스 리 보그스의 진화, 2013)를 처음 보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가 혁명에 대한 철학을 설명할 땐 침대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환호했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지면 영화를 일시 정지시키고 그의 말을 곱씹다가, 당장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질문을 한다는 데 또 감탄했다.
대선이 끝나고 온 세상이 미워지는데 그레이스의 말들이 나를 진정시켰다. '반란(rebellion)은 분노의 표출일 뿐이지만,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revolution)은 자신을 변화시키는데서 시작한다'는. '우리는 리더에게 바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갈망하던 리더의 수준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 성질머리에 토닥임은 어울리지도 않고, 나는 그레이스의 말을 빌어 선동하고 싶었다. 일상을 살지 말자고, 혁명을 위해 변하자고.
사실 처음 이 영화를 공동체 상영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던 건 같이 책을 읽고 있던 주온이었다. 그때는 한글 자막이 없으니 아쉽다며 말았는데, 역시 사람은 궁지에 몰려야 뭔갈 하는 걸까…. 이번엔 '에라이 그깟 거 내가 번역하고 말지' 싶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팟캐스트 <시스터후드>를 진행하는 효진에게 대뜸 문자를 보냈다. 다시 문자를 보니까 미친 나는… 내일모레까지 번역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곧 책을 함께 읽었던 멤버들이 있는 슬랙 채널에도 글을 올렸다. '적어도 주온은 같이 하겠다고 하겠지!'하며.
'요즘 너무 혁명 말리는데… 그레이스 리 보그스 다큐 상영회 열까요? 상영회 제목은 혁명이 후끈후끈 …'
혁명은 발현적(emergent)으로
슬랙에 메시지를 올린 밤, (역시 예상과 같은 응답해 준) 주온과 행아웃으로 마주하고 앉았다. 당장 내일 상영회를 열 기세였던 나와 달리 주온은 대통령 취임 날인 5월 10일을 제안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무슨 참사가… 벌어졌을까… 감사합니다…) 그리곤 번역을 도울 사람들을 좀 찾아보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그러지 뭐! 하고 간단한 소개와 함께 번역을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고 SNS에 올렸다. 일주일 후, 상영회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10명으로 늘어났다.
내일모레 상영회를 열겠다는 나를 진정시키고, 시간이 확보되자 이번 프로젝트를 발현적으로 진행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가 참여하는 사람들에 따라 진화했으면 했다. 나는 최대한 모든 옵션을 열어두고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모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각자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은 피하고 싶은지 파악하는 일이었다. 바쁜 현대사회는 우리가 모여서 킥오프 회의할 여유도 만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구글 문서와 스프레드시트를 활용해 최대한 모든 내용을 공유했다. 자막 작업을 하다 보니 디트로이트라는 지역성이 눈에 띄어 이 영화는 서울보다는 지역에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임지기로 하고 광주, 대전에 사는 친구들을 꾀였다. 이제 상영회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14명으로 늘어났다.
번역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었다. 모든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보고 또 봐도 고치고 싶은 게 눈에 띄었다. 우리가 구입한 라이센스는 500명 어치였다. 1000000명은 봐야 이 고생이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홍보를 위해 노션 페이지를 만들면서 우리끼리 500명을 모으긴 어려울 테니 동시 상영을 맡아줄 곳들이 있다면 연락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자고 했다. 공지를 올렸고 천안, 강릉, 남원, 전주, 대구 등에서 연락이 왔다. 광주와 서울에서도 추가로 연락이 왔고 부산에서도 연락이 왔다. 나는 신나서 팔도강산용 홍보 이미지를 만들어두었다. 그러니까 랜덤으로 아무 지역명이나 넣어서 포스터를 만들어두었는데 실제로 그 지역에서 연락이 오면 그게 그렇게 신기했다. 아무튼 이제 상영회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몇 명인지 (슬랙에 모두 들어온 것이 아니므로) 이제 파악 불가.
파악 불가라니… 그렇다… 모든 과정이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간 것 같다. 그러니까 상영회의 모든 과정이 당연히 아름답진 않았다. 감당할 수 없게 일을 크게 벌인 건 아닌가,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내가 매니징 할 수 있는 규모를 고집하고, 문제는 없는지 확실히하고 넘어갔겠지만, 이번엔 일부러 그걸 놔버렸다. 그런데 그만큼 예상 밖의 장면을 많이 목격했고, 그게 이 상영회를 특별하게 만들어 줬음을 안다. 다행인 건 기획팀이 회고를 진행하면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는 거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탄하며,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낯선 방식으로 일했고, 익숙한 방식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앗, 이거… 변혁 정의 아냐? ... 이거… 혹시 혁명 아냐!?!?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처음 효진에게 말도 안 되는 문자를 보내던 때 내 머릿속에 있던 상영회의 모습은 이랬다. 내일모레(ㅋㅋ) 200명쯤(?), 온라인에 모인다. 줌을 통해 영화를 스트리밍한다. 2시간 후, 와 재밌었다~ 박수치고 끝.
그러나 주온은 5월 10일이라는 의미 있는 날짜를 정해줬다. 이나는 꼭 오프라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상영회의 제목을 지은 것도 이나 님이다. 나는 '엉덩이 혁명ㅋㅋ' 이러고 있었다). 일시적 입맛상실을 겪을 정도로 충격적 사연이 있었지만, 효진은 멋진 공간을 대여해주었다. 혜진은 뚝딱뚝딱 그레이스 리 보그스 위키를 만들어 냈다. 소영, 서진, 티나, 이재, 희연은 참여자 모두가 칭찬한 퀄리티의 자막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거 처음이라 너무 떨린다고 하면서도 덤덤한 태도로 지선은 광주 상영회를 진행했다. 근사한 공간을 자랑하던 대전의 선아는 새벽에 참여자들이 남겨준 포스트잇을 일일이 스캔해 참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대구의 참여자들은 입을 모아 대구가 '혁명하기 좋은 도시'라는 후기를 남겨주었다. 빨간 빤스 입고 가길 잘했다며… 강릉의 참여자들의 긴 대화록을 읽으며, 남원에는 곡성, 남해, 완주 사람들까지 보였다는 소식을 보며, 각자가 남겨준 긴긴 후기를 읽으며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참,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법 같았던 상영회가 끝나고 나는 그 동력으로 이 영화를 만든 그레이스 리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부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리 보그스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후로 그는 미국 내 동양인의 역사를 추적하기도 하고, 'LA폭동'을 주제로 '누가 말할 권리를 얻는지' 묻기도 하고, 유색인종 여성들의 선거 도전기를 따라가기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흰머리가 많아진 그가 요즘엔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상영해온 PBS를 상대로 백인 위주로 돌아가는 편성과 자원을 지적하고 차별을 타파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회고 모임 때 끝까지 남았던 주온, 혜진과 나는 이제 진짜 진짜 마지막이야! 라고 하면서도 다음엔 우리 '그레이스 리 보그스 자서전 읽고', '10월에 1박 2일로 메인주에서의 대화처럼 얘기하고 음식 만들어 먹고 춤추고 그러자'면서 신나서 소리 지르고 엉덩이를 흔들다가 헤어졌다. 다시 보니까 또 너무나 얼토당토 없네. 그런데 또 아나, 이게 어디로 우릴 이끌지. 이러다가 우리 행사 제목처럼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러고 사는 거 아냐? 그레이스 리 감독처럼. 그러면 너무 좋겠다. 그때까지 서로의 곁을 잘 챙기면서 일을 저지르고 살길. 이 영화로 모인 430여 명, 모두가 그러길. 그럼 참 좋겠다. 하하하.
PS. 상영회 준비과정과 영화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상영 후 송출된 시스터후드 팟캐스트를 듣자!
[팟캐스트 시스터후드]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아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에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
https://podbbang.page.link/GAS3HnufHh54mLgXA
글쓴이. 신인아
고양이 마크니의 반려인이자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을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돈을 잘 벌고 싶은 반자본주의자로 늘 자아분열의 위기에 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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