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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격 -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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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3. 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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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4 Me.Dear 2023.03.30.]

 

어떤 자격

 

                                                                                                                                     정원    

      

 

처음 액트에게서 을지OB베어(이하 OB베어) 투쟁 현장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조금 망설였다. 나는 OB베어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연대하는 어떤 연대체에도 속해있지 않고, ‘연대하는 채식인 모임(이하 연채모)’의 일원도 아니며, 최근에는 투쟁에 자주 나가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고민은 내가 OB베어 투쟁 현장에 처음 가려 했을 때의 망설임예컨대 ‘나에게 연대할 자격이 있을까’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연대할 자격’이란 무엇일까? 일종의 자기검열과도 같은 이 질문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이 글은 ‘오고 가는 연대인’의 시선과 마음에서부터 쓰여졌다.

 

언젠가 현장에서 ‘OB베어에 처음 오게 된 계기’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 있다. 말문이 턱 막혔는데, 왜냐하면 어떤 대단한 사명감이나 분노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을지로의 상황과 만선호프의 만행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을뿐더러 ‘노가리 골목’이라는 공간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다만 어느 날부터 내 SNS 피드에 자꾸만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cheongyecheon)’의 게시물이 떴고, 모르는척 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눈 앞에 보이니 그게 잘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곳에 있는데 그걸 알고도 가지 않는 건 무언가를 배신하는 것 같았고.. 죄책감과 비슷한 감정에 시달리며 미루고 미루다가(심지어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함께 갈 동료를 찾고 찾은 끝에) 겨우 갈 수 있었다. OB베어에 가기까지 이토록 지난한 결정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 물론 ‘연대할 자격’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 때문이었다.

 

그렇게 겨우 당도한 OB베어는 그간 다녀왔던 여타의 집회 현장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투쟁가와 함께 케이팝이 나오고, DJ 파티가 열리고, 집에서 챙겨온 텀블러와 다회용기에 음식들을 나누어 먹고, 피켓을 든 채 춤을 추고, 모르는 얼굴들과 인사했다. 내가 동물성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없는 공간, 페미니즘이나 반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소리를 낮추지 않아도 되는 공간, 나의 정체성과 당신의 정체성이 다양하게 교차하는 공간. OB베어는 투쟁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환대의 공간이었다.

 

매주 일요일엔 ‘연대하는 채식인 모임’이 있었다. 연채모의 요리사들이 준비한 요리에 연대인들이 각자 조금씩 만들어 온 음식들이 더해져, OB베어의 연채모에서는 채식인과 비 채식인이 종 차별 없는 식탁 위에서 평등한 식사를 했다. 골목의 독점과 재개발,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곳에서 채식(과 밥을 나누어 먹는 행위)이 연대의 매개가 된다는 것이 낯설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같은 마음을 나누고  함께 분노한다면 누구나 무엇으로도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일견 개인적인 실천이면서 또한 소비 중심의 운동이기도 한 ‘비거니즘’이 연채모에서 사회 운동 방식 중의 하나로 확장되고 연대로서 기능하는 풍경들을 보면, 연대 할 자격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고 가는 마음들’이며 연대란 이 마음들이 마주쳐 ‘오고 가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행위 같기도 하다.

 

OB베어에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혼자 온 사람도, 모임을 마친 후 다 같이 온 사람들도, 동료와 함께 온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나처럼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마지못한 마음을 가지고 처음 이곳에 도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곤궁한 마음에 쫓기듯 현장에 나온 지 몇 차례,  어느 순간부터는 투쟁에 함께 갈 친구를 부러 찾지 않아도 되었고 복잡한 마음이 여기저기로 떠도는 날이면 으레 OB베어가 떠오르게 되었다. 언제든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건 물론 내 자격지심 따윈 아랑곳 않는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스스로를 향해 불쑥 찾아오는 질문과 검열에 완벽히 납득 가능한 답을 찾진 못했지만, 그럴 때마다 OB베어에서 마주친 다양한 얼굴들을 떠올린다.

 

OB베어는 22년 11월 30일 골목 선언과 함께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을지OB베어와 같이 쫓겨나는 가게가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것들이 자본이라는 무력 아래 파괴되지 않도록 여전히 집회를 이어 나가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 중구청 앞에서 을지OB베어를 되찾기 위한 예배와 연대하는 채식인 모임이 열린다. 이곳에 오기 위해선 어떤 자격도 필요치 않다. 누구든지 오셔서 연대로 뭉친 밥상의 맛, 밥상으로 뭉친 연대의 맛을 한번 보시라.

 

*이 글을 송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을지OB베어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기에 ACT!에 양해를 구하고 뒤늦게 이 문단을 덧붙인다. 노가리 골목에서의 강제 집행 사건 후 1년, 을지OB베어가 드디어 다시 가게를 연다. 지키고자 했던 그 골목, 을지로로 돌아갈 날을 위해 OB베어는 새로운 곳에서 연대인들과 함께 긴 싸움을 계속해서 준비한다. 더불어 연대와 관심, 지지가 필요한 소식도 함께 전한다. 현재 을지OB베어는 특수공무집행방해, 영업방해금지가처분 등으로 재판을 앞두고 있다. 7,200만원의 배상금 또한 납부해야하는 상황이다. 이 부당한 처분에 맞설 수 있도록 온라인 탄원서와 벌금 모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하니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로 ‘오고 가는 마음들’을 마주쳐주시길 부탁드린다.

 

 

□ 온라인 탄원서 작성하기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UIinBLpPKzr_19k0Olq7uwe6LgHDjJ7h05l1HGoY40NCDzg/viewform

 싸우는 상가 세입자 벌금 모금 프로젝트 [벌금의 꼬리표를 연대의 깃발로]

https://www.socialfunch.org/fightingstore

 

 

▲ 골목 선언이 있던 날 연채모 메뉴 중 하나였던 초코케이크. 연채모의 초코케이크는 정말 맛있다.

 

▲ 노가리 골목에서의 마지막 집회가 있던 날

 


 

 

필자 소개. 정원

모든 동물들이 해방된 세계에서 살고 싶습니다. 직접행동 DxE에서 활동하며,

초미모귀욤찐빵만두찔빱납작복숭아 고양이 수수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해방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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